리뷰, 명강연(271호)

“종교가 과학과 기술 등 외부 시스템에 의지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가 2016년 4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2030 에코포럼’ 발족기념 특별토론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발 노아 하라리(Yuval Noah Harari, 1976~ )는

이스라엘 태생으로, 현재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이다. 그는 약 30개국 언어로 45개국에 번역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의 저자다. 이 책은 석기시대부터 정치적·기술적 혁명을 거쳐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진화를 거듭하여 호모 사피엔스가 된 인간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최근 미래에 대한 전망을 담은 〈호모데우스〉를 출간해 또다시 선풍을 일으킨 바 있다. 이 책은 7만 년의 역사를 거쳐 지구를 정복한 인류가 이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 종교는 물론 역사학·심리학 · 기술공학 · 생명과학 등 여러 학문의 경계를 종횡무진 한다.

이 강연은 두 책이 국내에 출간되기 전인 2014년 5월 이스라엘 텔 아비브대학에서 ‘종교의 미래’를 주제로 강연한 내용이다. 짧은 강연에 그의 견해가 모두 담기진 않았지만, 종교의 미래와 우리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는 계기가 되기에는 충분하다.

저는 오늘 21세기에 있어서 종교는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몇가지 단어를 정의하겠습니다. 저는 인간사회의 규범과 가치체계, 즉 초인간적 체제 또는 범인류애 등에 신념을 가지는 것을 모두 종교라고 봅니다. 따라서 불교 · 이슬람교 · 자유주의 · 공산주의 · 나치즘(Nazism)은 모두 종교에 속합니다. 혹자는 종교에는 신이 있어야만 한다고 보고 공산주의 · 자유주의, 심지어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저 ‘종교’라는 단어에 대한 의미론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유발 하라리가 2016년 4월 서울시청에서 열린 독서모임 ‘서로함께’에서 강연하고 있다. 오른쪽 끝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앉아 있다.

종교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 보면 신(神)이 존재하는 종교와 자연법(Natural laws)이 신 대신 존재하는 종교가 있습니다. 주지할 점은 사학적 관점에서 종교의 기능을 중심으로 보면 공산주의나 이슬람교는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입니다. 정통성, 안정성 등을 통해서 인간사회에 질서를 제공하며 왜 우리가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우리의 행동을 관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초인간적 질서는 신의 존재에 기인할 수도 있고 공산주의, 불교, 나치즘의 경우와 같이 자연법에 의거할 수도 있습니다.

이제 종교로서의 인본주의(Humanism)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종교의 정의는 중요합니다. 인본주의는 세속적인 종교일지 모르고, 또 신이 없는 종교이지만 저는 인본주의를 종교로 봅니다. 인본주의는 인간은 성스러우며 모든 의미와 권한의 근원이 ‘인간(Humanity)’에 있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선악을 판단합니다.

지난 300~400년간 다양한 인본주의적 관점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이 성스러운 존재라는 점에는 모든 인본주의자들이 동의하지만, 유대교 · 개신교 등에서 ‘신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견이 있듯 인본주의 내에서도 ‘휴머니티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견이 있습니다.

과거 인류가 물려준 유산인 ‘창의성’을 뜻하는 ‘해골’을 들고, 끊임없이 생성되는 데이터(전광판)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그는 저서 〈사피엔스(Sapiens)〉에서 맹수의 먹잇감에 불과했던 인류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능력을 지님으로써 어떻게 만물의 주인이 되었는지를 밝히고, 저서 〈호모 데우스(Homo Deus)〉를 통해 신이 되어버린 인간은 ‘무한한 데이터야말로 무한한 믿음을 가져다 준다’는 새로운 종교 ‘데이터교(Dataism)’를 창시했다고 밝히고 있다.

자유주의적 인본주의(Liberal Humanism, 이하 자유주의)에 의하면 인간은 개인을 뜻하지만 사회주의적 인본주의자들은 인간 집단을 인간으로 여깁니다. 또, 나치와 같이 진화론에 의거한 인본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생물학적 종(種)입니다. 20세기는 이 세 가지 종류의 인본주의가 우열을 다투는 ‘인본주의 종교 전쟁’의 시대라고도 불립니다. 1989년부터는 자유주의가 주류가 되었는데요, 자유주의에 따르면 ‘인간’은 개인이므로 각각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인간성이라는 신성함을 지녔습니다.

자유주의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 개인의 온전한 개체성(Unity)입니다. 개인(Individual)의 문자그대로의 뜻은 ‘나눌 수 없음(부정 접두어미 in과 ‘나누다’인 Divide로 이루어짐)’입니다. 우리 개개인에 의미 · 권한 · 도덕성의 근원이 내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결정을 내리기 힘든 상황에서 자유주의는 주변의 소음에 귀 기울이지 말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가르칩니다.

둘째, 자율성입니다. 개인은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우리는 물론 선생님이나 텔레비전과 같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이러한 외부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우리 안에는 완전한 자유, 결정권, 자율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내 안의 자유로부터 우리가 크고 작은 결정을 도출해 내야 한다는 것이 두 번째 원칙입니다.

이스라엘 메실랏 시온에 있는 자택에서 인터뷰 중인 유발 노아 하라리. 그는 창의성과 독창성을 기리는 상인 폴론스키 상(Polonsky Prize)을 2009년과 2012년 두 차례나 수상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이 옳다면, 우리는 외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적어도 이론적으로 내가 외부의 그 어떤 존재나 시스템보다 나 자신을 더 잘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 입니다. 누군가, 또는 어떤 시스템이 나에 대해서 매일 24시간동안 정보를 수집해도 나에 대해 더 잘 알 수는 없다는 의미이지요. 예를 들어 친구가 놀려서 울고 있는 자녀에게 자유주의자 부모는 “오로지 너만 너의 참 모습을 알 수 있으니까 다른 아이들 이야기를 들을 필요 없어. 너 자신만이 너의 가치를 알고 있단다. 너의 가치는 네 안에서 비롯하는 거야.”라고 말하며 아이를 다독일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가 ‘자유(liberty)’인 이유입니다. 자유주의의 핵심 계명(誡命)은 우리 안에 내재된 신성하고 자율성을 가진 진정한 자아의 공간을 보호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권이 해야 하는 일이고요. 인권이 이 신성한 내적 공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유주의가 실제 우리의 일상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 몇가지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가령 누가 국무총리로서 적격자인지 결정할 때, 자유주의에 따르면 그 답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은 투표자입니다. 개인은 투표를 할 때 커튼이 쳐진 칸막이에 혼자 들어가서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결정을 내립니다.

자유주의 경제는 어떤가요? 원리는 같습니다. 이번에는 ‘소비자’가 정답을 제일 잘 아는 것이지요. 소비자는 항상 옳습니다. 자유주의 경제에서 아무도 소비자보다 더 높은 권한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전 세계 교수가 모여서 완벽한 자동차를 만들어도 소비자가 구매하지 않으면 이 차는 좋은 차가 아닙니다.

자유주의 미학은 어떤가요? 아름다움이란 무엇입니까? 예술이란 무엇인가요?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는 수 없이 많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미학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이 예술이라 생각하면 예술인 것입니다. 뒤샹(Marcel Duchamp)의 소변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뒤샹은 소변기를 미술관에 설치하고 ‘샘’이라 불렀습니다.

윤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중세시대에는 잘못을 저지르면 성직자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했고, 이야기를 들은 사제(司祭)는 “신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그 행동은 잘못되었다.”고 말해 주었을 것입니다. 현대에는 임상 심리학자가 비슷한 역할을 하는데요, 다만 임상 심리학자는 내담자에게 “정말 나쁜 일을 하셨네요. 당신은 악랄하군요. 그런 짓은 그만하세요.” 식의 말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럴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담자의 행동이 악하다고 생각해도 내담자가 스스로 그 결론에 도달하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교육관은 어떤가요? 자유주의적 교육관의 슬로건은 ‘스스로 생각하라.’ 입니다. 중세시대 교육의 주요 매체는 책이었고, 중세시대 교육은 책에 있는 해답을 암기하는 식이였습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교육관에 따르면 해답은 개인에 내재되어 있으므로 스스로 생각하는 방식을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메실랏 시온에 있는 자택에서 인터뷰 중인 유발 노아 하라리. 그는 창의성과 독창성을 기리는 상인 폴론스키 상(PolonskyPrize)을 2009년과 2012년 두 차례나 수상했다.

이와 같이 자유주의는 현재 지배적 사조입니다. 딱히 대안이 없기 때문에 자유주의가 지배적인 것입니다. 근본주의적 종교가 자유주의를 대체할 수 있을까요? 근본주의적 종교로는 미래 사회에 대처할 수가 없습니다. 21세기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가 대두되는데 근본주의적 종교에는 혁신적인 면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인공지능 · 영생에 대한 연구 등 새로운 기회가 찾아와도 기회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종교는 미래에 대처하는 방안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19세기로부터 교훈을 얻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을 믿는 많은 사람이 있어왔지요. 하지만 여전히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19세기 초,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를 겉도는 미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회주의자들이 성공을 거두었을까요? 어떻게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었을까요? 바로 사회주의자들이 기술에 관심이 있었고 기술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Karl H. Marx) · 엥겔스(Friedrich Engels) · 레닌(Vladimir Lenin)은 모두 현대식 공장 · 기차 · 증기 엔진 · 전기에 대해 배웠습니다. 누군가 레닌에게 공산주의를 알기 쉽게 정의해 달라고 했을 때 레닌은 “공산주의는 소비에트의 권력 더하기 나라 전체의 전화(電化) 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산업혁명이나 최신 기술 없이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도 없습니다. 사회적 의의를 따져보면 사회주의는 최초의 기술 종교(Techno-religion)입니다. 사회주의는 기술을 통해서 이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했고 세상을 제패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결국 자유주의에 그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현대상을 보면 자유주의를 대체할 만한 것은 없어 보이지만, 저는 과학과 기술의 변화 때문에 자유주의는 오래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의 삼대 원칙에서 보듯 자유주의 역시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주의는 개인에 신념을 갖지만 과학은 내면의 개체성 같은 것은 없으며 모든 동물은 그저 체제와 알고리즘의 집합체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2016년 서울 중구 동화빌딩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유발 하라리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다. 그가 ‘인류에 관한 간략한 역사’라는 주제로 진행한 무료 온라인강의는 전 세계에서 약 10만 명이 수강했다.

과학은 자율성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유 또한 없습니다. 만사는 결정론적 또는 우연적 사건일 뿐입니다. 여러 학제와 특히 과학과 기술분야에 따르면 외부의 시스템이 내가 내 자신을 아는 것 보다 훨씬 더 나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글은 내 이메일, 통화내역, 검색 기록 등을 읽고 기억함으로써 나를 훨씬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전자 기기와 구글을 연결할 때 생체인증을 통하기도 하는데, 이로서 구글은 내 유전정보를 수집합니다. 또, 각종 기기를 통해 혈압 등을 끊임없이 측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라서 정보 처리 능력과 방대한 통계 데이터를 가진 시스템은 나보다 나를 훨씬 더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자유주의의 시대는 곧 막을 내리고 기술 종교의 일종이 자유주의를 대체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기술 종교는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봄으로써가 아니라 외부의 시스템에 아주 중요한 결정을 위탁함으로써 우리의 욕망을 채워주겠노라 약속합니다. 이미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내 몸과 약, 삶과 죽음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외부 시스템에 의존합니다. 어떤 항암치료를 받아야 할지 결정할 때 내면의 소리를 듣기 위해 내 속에 내재된 오롯하고 자율성을 가진 공간을 돌아보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나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컴퓨터와 알고리즘에 가져다주고 결정은 컴퓨터와 알고리즘이 내립니다. 앞으로는 정치, 배우자 결정, 데이트 상대 등 삶의 더 많은 분야에서 관찰될 모습입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나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한탄합니다. 수많은 과거의 사건들을 다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구글은 오히려 나보다 나를 더 잘 압니다. 내 과거의 실패담과 불평 등을 기억하고 있고, 내 유전정보 · 심장 박동수 등도 저장해 놓았을 테니 데이터를 통해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겠지요. 내가 내면의 소리를 듣고 결정하는 것보다 외부 시스템과 기술이 나를 위해 훨씬 더 나은 결정과 선택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혜인

부산외국어고등학교, 서울교육대학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영어 · 교육학 · 한국불교를 공부했다. 2013년 초 인도에서 열린 샤카디타 세계불교여성대회에서 통 · 번역을 했던 것을 계기로 불교 번역에 입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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