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운동 계기로
상투적 시각 버리고
성문제 인식 돌아봐야

현재 나는 헐리우드가 위치한 LA지역에 머물고 있다. 헐리우드 불러바드를 지나갈 때, 나는 각별한 관심을 갖고 한국에서 한참 진행 중인 미투운동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바로 미투 운동의 발화지점이기 때문이다. 미투의 파급으로 한때 사회 유명 인사들의 허상과 급격한 실추가 드러나고, 비극적인 자살까지 이어졌다. 이 문제를 담론의 토픽으로 떠올리는 일마저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다.

당연히 이들의 범법행위이거나 성범죄행위는 처벌되어야하고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켜 마땅하지만 미투를 주제 삼아 발설하는 일이 자기 제한을 받는다면 문제이다. 그리고 이제 미투의 문제는 한 걸음씩 더 진화되고 있다. ‘미투플레인’이라는 남성위주의 일방적 설명[Me Too Mansplain]으로 피해 여성의 입지를 다시 제 자리로 돌리는 제3차적 피해의 가능성까지 대두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미투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을 불편해하는 것은 물론 아예 입을 닫을 수도 있다. 바람직스런 일이 아니다.

오래 전 보스턴 칼리지에서 일어난 사건이 떠오른다. 페미니즘 강의 교수를 대학이 임용하기를 거절하자 남녀학생 공동으로 강의 개설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임용되자 이번에는 이 페미니즘 강의에 남성학생의 수강신청을 거절했다. 메리 데일리(Mary Daly)라는 신학교수에 관한 일이었지만 당시 상당한 파문을 일으켰다. 여성신학을 주도한 그녀는 소위 여성의 입지가 ‘머리나 논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온 몸’의 차원임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여성의 몸의 경험은 남성이 도대체 공유할 수 없다고 하여, 남성의 강의 참여를 거부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서 벌어지는 사건과도 일면 닮아있다. 미투의 진화된 모습인 2차, 3차적인 피해를 지적한 미투플레인의 항의 뒤에도 분명 이 여성성의 ‘온 몸’의 경험이 개입되어 있다. 몸이 겪는 사건을 말로 설명하고 해석해 버릴 때 다시 남성 주도의 것으로 복원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번지는 미투 운동의 전개 상황 역시 남성 위주의 ‘말 많음’과 ‘말로 때우는’ 그런 사건으로 치닫기 쉽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남성이 아닌가! 바람직스럽기는 우리 모두가 ‘몸으로 참여하는’ 상황이었으면 한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오히려 이 운동이 자칫 남녀 양성의 대결로 치닫게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성문제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하고, 솔직하게도 만든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우리가 성문제를 어떻게 처리해 왔는지를 솔직히 되돌아 봐도 좋을 듯하다. 태어나기를 ‘남성 혹은 여성으로 태어나서’라든가, ‘우리 사회의 관행이니까’라는 상투적인 시각은 버리고 말이다.

이제 ‘이 문제를 어느 방향으로 전개시켜야 바람직한가’라는 새로운 물음이 제기된다. 성추행이라는 폭력의 문제가 어느 정도 수습되면, 미투 운동이 보다 폭넓은 문제와 연결되기를 바란다. 이 문제는 중요하다. 우리 모두가 성에 갇혀 있고 또 성을 통해 태어나기 때문이다. 여성·남성이라는 존재양태의 문제로 논의의 지평을 넓혀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 때, 필수적인 것은 솔직하고 개방적인 태도이다. 더 이상 우리의 존재 조건이 처한 현실을 또 하나의 배제된 성(性)을 주장하는 것으로 나타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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