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270호)

눈 수북한 섬진강변에는
거침없어 까칠하고
걸림 없어 해맑은 칠순 시인이 산다
 

김용택 시인이 자신이 태어난 생가의 툇마루에 앉아 하얗게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다. 우측 붉은 벽돌건물이 문학관이다.

대전을 지나면서 흩날리기 시작한 눈발은 전북 임실이 가까워지자 더욱 거세졌다. 한적한 섬진강가 마을이 새하얗게 변하는 동안, 김용택시인문학관에서 ‘섬진강 시인’을 만났다. 그는 1982년 등단 후 열여섯 권의 시집을 펴냈다. 천진한 익살과 함께 농촌의 토속적 정서를 담아낸다는 세간의 평과 달리 처음 만난 칠순의 시인은 ‘까칠’했다.

어린 시절의 일화, 어떻게 초등학교 선생님이 됐고, 어떻게 시인의 길을 걷게 됐는지 따위를 물었더니 ‘맨날 듣는 질문을 또 하느냐?’며 타박이다. 그러면서 “인터뷰란 게 지금의 이야기를 해야지, 현재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해서 사람들에게 긴장감을 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목청을 높였다. 까칠함의 이면에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과 변화에 대한 갈망이 배어 있다.

문학관은 아담하다. 털목도리를 두른 김 시인.

‘운도 실력’이란 말이 있다. 운 좋은 사람의 공통점을 써놓은 어느 글에는 ‘뭐든 진득하게 하고, 과거와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게 특징’이라고 쓰여 있었다. 즉, 잘 될 때까지 지속해온 꾸준함이 ‘좋은 운’의 숨겨진 원인이란 말이다. 그런 점에서 김용택 시인은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어쩌다 선생님, 어쩌다 시인’

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집에서 오리를 키우다가 말아먹었을 무렵. 고등학교 동창이 초등교사 임용시험에 함께 응시해보자고 권했다. 부족한 교원의 충원을 위해 양성제도를 시행하던 시절, 접수를 마치고 수험표까지 가져온 친구 때문에 얼떨결에 시험을 치렀다. 친구는 떨어지고, 혼자 붙었다. 4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고향집 인근 초등학교로 부임했다. 40년 교직생활의 시작이었다.

교단에 서기 전까지 그는 문학서적을 접할 기회가 없었다. 초중고를 마칠 때까지 교과서 말고는 읽은 책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았던 시절, 외진 마을에 책을 갖고 있는 사람도, 읽을 만한 사람도 있을 리 만무했다. 그가 문학을 제대로 접한 건 모교 부임 후 교무실로 찾아온 월부 책장사 덕분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전집(7권)을 구입해 읽고 났더니 헤르만헤세 전집(5권)을 팔러 왔다. 앙드레지드 전집, 이어령 전집, 박목월 시전집, 한국사(영인본, 7권) 등을 할부로 구입해 차례대로 읽었다. 문학은 그가 이전까지 접해 본적 없는 새로운 세계였다. 푹 빠져들었다.

전주에 있는 헌책방에서 〈창작과 비평〉, 〈사상계〉 영인본을 구입해 지게에 져 나르기도 했고, 새 책을 자주 살 형편이 안 돼 서점에 서서 읽다가 직원이 의자를 갖다 준 일도 있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서울에 살던 동생을 통해 구해 읽었다. 그러는 사이 7~8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문학은 감성을 자극한다. 감성이 살아나면 자연스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역시 떠오르는 여러 상념들을 일기 쓰듯 적어나갔다. 5~6년 끄적댔는데 어느 순간 시를 쓰고 있었다. 10년이 지나서야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수준이 됐다. 이 무렵이 창작과 비평사의 21인 신작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를 통해 등단한 1982년이다.

그는 2000년대 초 전북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을 지낸 바 있다. 지난해 받은 감사패.

‘시를 체계적으로 배우진 않으셨겠네요?’하고 물었더니

“요즘은 시를 체계적으로 배운다고 말하지만, 시를 그렇게 배우면 기술은 쌓일지 몰라도 내공은 쌓이지 않아요.”

라고 대답했다. 정신적인 경험과 체험을 통해 글을 써나가는 힘을 길러야 하는데, 기술적으로 시를 쓰면 안 된다는 의미다. 우문에 현답, 섬세한 감성과 문학적 상상력이 어우러져야할시에 ‘체계적인 배움’을 언급했으니 양복저고리에 한복 바지의 조합을 물은 꼴이다. 그렇다면 시인들은 어떤 감성, 어떤 상상력으로 시를 쓸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시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에 실린 시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를 예로 들곤 합니다. 김남주 시인(金南柱, 1946~1994)이라고 계셨는데, 저하곤 형님동생하며 지냈어요. 당시 강변(마을 앞 섬진강)에 풀이 없었어요. 물이 순환이 잘 되어서 잔디와 자갈이 섞여 있었어요. 어느 오월, 형님이 왔다가 간 날 저녁에 달이 무척 훤한 거예요. 제가 전화를 걸어 ‘형, 달이 훤하게 잘 떴어요.’라고 했더니. ‘야 이놈아, 달떴다고 전화하는 놈은 내가 처음 봤다.’고 하는 거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詩想이 떠올라) ‘형, 끊어!’ 해놓고는 얼른 방에 들어와 이 시를 썼지요. 실제상황에 남주 형과는 상관없는 상상력을 보탠 거지요.”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이 밤 너무 신나고 근사해요
내 마음에도 생전 처음 보는
환한 달이 떠오르고
산 아래 작은 마을이 그려집니다.
간절한 이 그리움들을
사무쳐 오는 이 연정들을
달빛에 실어
당신께 보냅니다.
세상에
강변에 달빛이 곱다고
전화를 다 주시다니요
흐르는 물 어디쯤 눈부시게 부서지는 소리
문득 들려옵니다.

젊은 시절의 김용택 시인과 가족.당시 마을 앞 섬진강변은 모래가 고왔다.

“추억이 아니라 ‘지금’이 중요하죠!”

그는 ‘섬진강 시인’이란 별칭 외에 ‘농민문학가’라고도 불린다. 농촌의 토속적 정서를 서정적인 시어로 표현해왔으니 이리 불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하지만 그는 ‘싫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섬진강을 지키느라 애쓰셨다’는 말이다. 나는 절대 섬진강을 지킨 적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왜 ‘따스함’ 깃든 세간의 평을 불만스러워하는 걸까?

그의 대표작이자 연작시 ‘섬진강’에는 ‘치마폭에 쌓이는 눈물을 강물에 가져다 버리는 누이의 고단함’(섬진강 2), ‘돈 벌러 서울 갔다가 중동까지 다녀와서도 결국은 고향에 돌아온 친구’(섬진강 8), ‘강 건너 묵힌 밭을 안타까워하는 어머니’(섬진강 29) 등 서정적인 표현의 이면에 농민들의 한과 아픔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어쩌면 그의 시를 햇볕 잘 드는 양지쪽만 바라보는 편향된 시선이 불만의 원인이었을지 모르겠다. 문득 그의 시 한 구절, “농사꾼은 농사철에 죽지 않고, 일 다 해놓고 한가할 때 죽는다.”(시집 〈강 같은 세월〉)는 글귀가 애잔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그는 인터뷰 중 질문이 ‘시인 김용택’과 ‘그의 시 세계’ 등 과거에 쏠려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과거에 쓴) 시는 중요하지 않다. 현재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춰달란다. 칠순이 되어서도 시를 쓰고, 세상의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는 현재의 삶과 생각을 독자들에게 전해달라는 말이다. 본의 아니게 “어떻게 하면 70이 넘어서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란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서린 생가에는 ‘회문재’란 편액이 걸려 있다.

“저는 친구들이 별로 없는 편이예요. 하지만 초등학교 동창이든, 대학 교수든, 또 다른 퇴직한 사람들은 만나보면 대부분 지금의 삶이 없어요. 지나간 삶에 대해서만 얘기를 합니다. 최근에도 만났는데, 만날 때마다 했던 얘기를 똑같이 반복해서 해요. 질리잖아요?

우리들의 삶의 전반이 예전하고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게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해요. 70~80년대 살아온 방식 그대로 살면서, 말로만 ‘AI(인공지능) 시대’라고 합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이 경각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이런 문제를 정치·사회·언론에서 굉장히 집중적으로 다뤄줘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위해서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말고, 새로운 정보에 귀를 기울이고, 시대의 변화에 편승해 나가야 한다는 게 그의 대답이다. ‘나이 먹으면 추억을 먹고 산다’는 말을 그는 좋아하지 않는다.

“왜 추억을 먹고 살아요? ‘지금’을 먹고 살아야지.”

현실의 삶이 있어야 긴장감도 있고, 절박하고, 절실해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3포 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도 현실(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면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는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를 힘겹게 사는 건 옳지 않다면서 젊은이들도 현재를 행복하게 살면서 미래를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다. 흔히 요즘 젊은 세대는 120년을 산다고 말한다. 예전엔 퇴직하고 얼마 안 있으면 죽었지만, 앞으로는 60세에 퇴직을 해도 그만큼의 세월을 더 살게 된다는 의미가 포함된 말이다. 그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당부하는 이유는 조금 출발이 늦더라도 그런 일을 찾아 열심히 하다보면 잘하게 되고, 잘하는 일은 (퇴직 걱정 없이) 늙어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평생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며 산, 즐거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잘하게 된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한 조언이다. 하지만 덧붙여 이런 문제는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고, 특정 집단이 해결할 사안도 아니라며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국가가 나서 해결해야 할 문제죠. (젊은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디서 무엇을 하든 ‘노동에 대한 경제적인 존중과 대우’, ‘휴식의 보장’, 그리고 ‘인간적인 존중’을 받을 수 있도록 국가가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하면 존중받는 게 아니고, 어떤 일을 하든 경제적으로, 인간적으로 존중을 받는 사회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게 선진국이잖아요. 잘사는 나라들을 보면 어떻게든지 국가에서 제도를 통해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고 합니다. 목수는 목수일 하고, 변호사는 변호사일 하고, 의사는 의사의 일을 하면 되지, 직업에 위아래가 있어선 안 되는 거잖아요. 평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평등하단 건 힘든 일을 하면 그 만큼 더 경제적으로 대우를 받는 걸 의미합니다. 그게 선진국이잖아요. 이렇게 개혁하지 않으면 있는 사람은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어요.”

얘기를 나누고 있노라니 마치 노동운동가와 대화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동심 가득한 시인’과 같은 표현도 싫어할 것 같다고 묻자, “나는 그렇게 동심 있고, 순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단호히 선을 그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의 순수한 시인이 아니라고 말한 그는 오히려 ‘의식 있는 시인 같다’는 표현은 반겼다.

그렇다면 ‘시인 김용택’을 어떤 사람으로 정의하면 적당할까? 주저 없이 이렇게 답했다.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나름의 기준도 갖고 있고, 정치 · 경제 · 문화예술분야나 종교가 앞으로 어떻게 변해야 한다는 나름의 판단도 갖고 있는, 그런 사람이죠.”

항상 깨어 있고자 노력하는 사람

등단 후 35년, 그는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항상 깨어 있고자 쉼 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1980년대에는 그 시대에 맞는 시를 썼고, 지금은 ‘칠순이 된 김용택’의 생각을 시에 담아낸다. 그렇기 때문에 날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려 노력한다. 세상의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의식도 바꾸려고 애쓴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보수성향의 신문, 진보 성향의 신문을 고루 정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터넷언론의 주요 뉴스도 빼놓지 않는다. ‘받아들여야 바뀐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고 살아 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앞서 갈 수도 있고, 따라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시 세계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변화하는 세상을 잘 받아들여 새로운 세계에 동참하려면 고정된 관념을 지녀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세상을 나무에 비유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나무는 눈이 오면 눈을 그냥 받아들여요. 눈이 쌓인 나무가 되는 거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나무가 되지요, 그냥 나무가 아니라. 새가 앉으면 새가 앉은 나무가 되는 거죠. 새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주는 거죠. 불교적으로 말하면 경계 없이 산다고나 할까요?”

그럼, 세상이 바뀌고, 우리의 관념이 바뀌더라도 바뀌지 않는 것은 무얼까? 그는 주저 않고 ‘인간’이라고 대답했다.

“어머니가 늘 이렇게 말했어요. ‘사람이 그러면 못쓴다.’ 어머니는 학교를 안다녔지만 늘 ‘사람이 그러면 안 되제.’라고 하셨어요. ‘공부만 잘하면 뭣 하냐 사람이 돼야제.’ 그런 생각을 늘 갖고 살아요. 아이들한테도 그렇게 말해요. 인간의 도리, 인간이 지키고 살아야하는 것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죠.

모든 책속에는 이런 가르침이 들어있어요. 공부는 사람이 되어가는 방법입니다.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결국 사람이 되라는 거잖아요.”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쳤는데도 눈보라는 그칠 줄 몰랐다. 문학관을 나와 생가(生家) 툇마루에 앉아 야외사진 몇 장을 찍는데 어깨에 눈이 수북 쌓였다. 그의 집 마당에서 섬진강을 바라보면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보인다. 50여 년 전 그가 직접 심은 나무란다.

눈 구경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던 중에 사모님이 간식으로 고구마를 내왔다. “감사히 먹겠습니다.”며 받아들었다. 마을회관 앞에 주차해놓은, 눈 수북한 자동차에 올라 눈 덮인 섬진강을 거슬러 올랐다. ‘거침없어 까칠하고, 걸림이 없어 해맑은 칠순의 시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주머니에 넣은 고구마의 온기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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