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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法話 속으로 56. 정수 스님 이야기

거지 여인에 승복 벗어주고 벌거숭이 돼

포항으로 가려다가 언뜻 들른 경주, 서라벌. 이곳도 이제는 가을의 초입입니다. 언제나 갈까했던 삼복염천도 계절의 변화 앞에는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가히 절기의 여왕이랄 수 있는 9월엔 너무도 잘 알려졌지만, 또한 너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서라벌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 합니다.

“내가 오길 잘했지. 만약 그 나이 어린 사미승이 왔더라면 이 눈 속에 큰일 날 뻔 했지.”

한껏 허리를 굽히고 바삐 걷던 노스님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거센 눈보라가 스님의 얼굴을 때렸습니다. 쩔렁거리던 주장자 소리도 멈추고 사위는 쥐죽은듯이 고요했습니다. 다만 어둠 속에 눈발이 희끗희끗 날릴 뿐. 더욱이 황룡사로 가는 길은 아직 초저녁인데도 인적이 끊어져 있었습니다. 군데군데 인가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노스님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폐허가 된 세속, 그는 그 옛날 두고 온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출가했다고 하나 어느 한시도 그들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그 광경을 보지 않기 위해 수없이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겼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가지지 마라
미운 사람도 가지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그러니까 지금의 피폐된 세상의 혼란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층이 잘못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라 애장왕이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숙부 언승이 섭정의 난을 일으킨 뒤 인심이 흉흉해지고 밤이면 도적떼들이 횡행하였던 것입니다. 노스님은 삼랑사 주지 스님이 자고 떠나라고 잡을 때 그곳에서 그냥 묵을 걸 잘못했다고 후회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노스님의 발길에 뭔가 뭉클한 느낌으로 차이는 게 있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검은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노스님이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고양이는 음산한 소리로 울어댔습니다. 노스님이 일어서자 고양이가 스님 뒤를 따라왔습니다. 노스님은 주장자로 고양이를 쫓았으나 고양이는 달아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노스님은 고양이가 따라 오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거센 눈보라가 얼굴을 때리며 길이 험해지자 스님은 입 속으로 염불을 외우며 발목을 넘는 눈길을 걸어갔습니다. 고양이를 품속에 안은 채. 그렇게 천엄사에 가까이 왔을 때였습니다. 바람결에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품에 안은 고양이 소린가 싶어 귀를 기울였으나 아기 울음소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괴이한 일이로구나. 이 눈 속에 아기 울음소리라니?”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인가라곤 보이질 않았습니다. 노스님은 주장자에 몸을 의지하고 서서 다시 귀를 기울였으나 찬바람만이 귓전을 때릴 뿐이었습니다. 그 눈발 속에 멀리 천엄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스님이 막 천엄사 담을 끼고 돌아 대문 앞으로 지나려는데 절 처마 밑에서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탈진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노스님은 얼른 고양이를 던지듯 내려놓고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금방 해산을 했는지 흰 눈을 붉게 물들인 채 실신한 여인이 아기의 탯줄을 쥐고 있었습니다.

노스님은 황급하게 아기의 탯줄을 끊고는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그러나 거센 바람소리와 눈보라 때문인지 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당황한 노스님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며 꽝꽝 난폭스럽게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그러던 스님은 갑자기 돌아서서 아기를 안았습니다. 여인의 엷은 치마에 감긴 아이의 살은 얼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아기를 품에 안은 노스님은 아기의 언 몸을 문지르며 염불을 외우고, 때때로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세찬 눈보라가 다른 소리들은 모두 막은 까닭이었습니다.

스님은 다시 여인 쪽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여보시오. 정신을 차려요.”

노스님은 허리를 굽혀 여인을 흔들었으나 말은커녕 신음소리도 없었습니다. 발가벗은 여인에게선 피비린내가 진동하였습니다. 노스님은 얼어붙은 여인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이 출가 사문이란 것도 잊은 채 오직 꺼져가는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염불을 하면서 여인의 전신을 주물렀습니다. 노스님은 여인의 코와 이마, 그리고 뺨을 문지르며 자신의 입김을 계속 불어 넣었습니다. 아기는 그의 품속에서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두루마기를 벗어 아기를 감싸고 여인의 옆에 눕혔습니다. 이런 위급한 순간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엄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습니다. 절에서 잘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은 스님은 피로를 느꼈습니다. 노스님이 잠시 손길을 멈춘 사이, 여인의 몸이 갑자기 차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노스님은 더 빨리 염불을 외웠습니다. 염불이 빨라지자 다시 손놀림도 빨라졌습니다. 팔목이 시큰하게 아려왔지요. 노스님은 손을 눈 속에 묻었다가 꺼냈습니다. 한결 시원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노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긴 하품을 했습니다. 나른하게 졸음이 밀려왔습니다. 순간 노스님은 다시 정신을 차렸습니다. 여기서 자신이 무너지면 두 명의 생명이 꺼져버린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지요. 노스님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습니다. 그는 본래 수행자의 자신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여인의 풍만한 가슴을 의식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습니다. 거지 여인이었습니다. 악취가 그의 코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노스님의 머리에 한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노스님은 재빨리 일어서서 거침없이 바지와 저고리를 벗어 여인에게 입혔습니다. 노스님은 벌거숭이가 되었습니다. 벌거벗은 스님은 주장자를 짚고 일어서려다 다시 한 번 여인을 내려다봤습니다. 체내에 온기가 도는지 여인은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며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노스님은 다시 여인의 몸을 비비기 시작했습니다. 여인의 온몸에 따스한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비로소 여인이 눈을 가늘게 떴습니다. 노스님은 여인의 뺨을 세게 때렸습니다. 비명과 함께 여인이 깨어났습니다. 그녀는 환히 웃고 있는 노스님의 얼굴을 올려 보았습니다.

“보살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스님께서 저를… 스님 아기는 어떻게…….”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끝을 맺지 못했습니다.

“아기는 잘 자고 있어요. 헌데 어인 일로 이 산골까지…….”

“아기 낳을 곳이 없어 천엄사를 찾아오다 그만 스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없습니다. 살아났으니 다행이지요. 자 그럼 난 가 봐야겠습니다. 아이 추워.”

“스님, 옷을 입고 가셔야지요. 눈 속에 어찌하시려고 그냥 가세요?”

“아니오, 난 살 만큼 살았지요. 아기나 잘 보살피시오. 관세음보살.”

노스님은 벌거벗은 채 염불을 외우며 다시 황룡사로 향했습니다.

살을 에는 눈보라 속을 걸어 노스님이 황룡사에 이르렀을 때 스님은 혼수상태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절 문을 두들기려고 팔을 들었으나 팔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노스님은 그 자리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안간힘을 쓰며 다시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천근이었습니다.

그 때 고양이가 쓰러진 노스님 품속을 파고들었습니다. 노스님은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놓더니 엉금엉금 기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가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일주문을 돌아 헛간으로 찾아든 노스님은 거적을 몸에 감고 고양이와 함께 누웠습니다. 고양이 체온이 노스님의 몸을 녹였습니다. 노스님은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날이 밝자 벌거벗은 노스님의 이야기는 서라벌 장안에 퍼졌습니다. 애장왕이 노스님을 궁내로 맞아 국사로 봉하니, 이 노스님이 바로 정수 국사입니다. 훗날 사람들은 노스님을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으로 믿었습니다.

벌거벗은 정수 스님, 기실 지금도 이 정수 스님 못지않은 많은 스님들이 이 나라에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푸르고 푸르른 가을 하늘 아래의 서라벌은 벌써 황금 들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를 품에 안은 채.

우봉규/작가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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