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 나는 국토순례(267호)

월출산 구정봉 아래 약 500m 지점의 큰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국보 제144호)은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초기에 조성됐다. 월출산 삼층석탑에서 바라 본 마애여래좌상은 근엄하면서도 자비로운 모습으로 사바세계를 바라보고 있다.

천태의 향기 간직한 강진
佛法에 몸 내어 준 월출산

고려 천태종의 고승 원묘국사(圓妙國師) 요세(了世, 1163∼1245) 스님이 백련사(白蓮寺)에서 천태법화사상을 기반으로 신앙결사인 백련결사를 일으킨 전남 강진. 고려청자와 동백꽃, 다산 정약용 선생 유배지인 강진은 구름 사이로 수줍은 듯 살포시 얼굴을 내미는 청초한 달이 뜨는 월출산(月出山)을 품고, 월출산은 불법(佛法)을 전하는 도량에 자신의 몸을 내주었다. 그래서 더욱 성스럽고 아름다운 곳이다.

불교ㆍ유교에 깃든 강진의 정신

강진군 대구면 저두리와 가우도를 연결하는 출렁다리. 배를 타지 않고 걸어서 섬을 둘러볼 수 있다.

문화유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보고 듣고 기록했던 열정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 뜨거움이 식지 않았지만, 공부만 하던 시절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당시 우리나라 전역에 불교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어 전국을 돌아다녔고, 기자생활을 시작한 후로도 가보지 못했던 곳을 두루 다닐 수 있었다. 여러 곳을 다니다보면 “다시 한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 있기 마련이다. 강진은 바로 그런 곳이다.

기억 속 강진은 백련사와 무위사(無爲寺), 월남사지(月南寺址)와 다산초당(茶山草堂), 김영랑(金永郎) 생가 그리고 월출산 등으로만 존재했다. 취재 준비를 하면서 강진에는 그간 알지 못했던 불교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로 찾아 온 아들을 가우도에서 만났다. 이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 가우도 해변에 설치돼 있다.

강진은 불교문화와 유교문화 등 다양한 한국의 전통문화를 품고 있다. 만덕산(萬德山) 백련사를 중창, 백련결사를 통해 고려 천태종의 수행종풍을 드날린 원묘국사 요세 스님,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년 천주교도 탄압 사건)에 연루돼 강진으로 유배를 온 정약용 선생과 백련사 주지 혜장(惠藏, 1772∼1811) 스님의 교류 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백련사는 신라시대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가 만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조선시대 효령대군이 동생 충녕대군(세종대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하다가 8년 간 머문 유서 깊은 도량이기도 하다. 백련사는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51호)과 야생차로도 이름나 있다. 만덕산은 야생차가 많이 자생한다고 해서 ‘다산(茶山)’으로 불렸는데, 훗날 정약용 선생이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고 전한다.

정약용 선생이 10년 간 머물며 고을의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해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한 다산초당(茶山草堂). 정약용 선생과 혜장선사는 1km 남짓한 산길로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며 6년 간 교류했다.

다산수련원에서 출발해 조금 올라가면 빽빽한 두충나무숲을 마주한다. 이 소박하고 고요한 오솔길을 지나 산길을 오르면 다산초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약용 선생은 10년 간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머물며 고을의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해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다. 다산초당에는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하는 ‘정석(丁石)’ 바위, 찻물을 뜨던 약수인 약천(藥泉),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茶竈), 정약용 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운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유적들은 다산초당과 함께 ‘정다산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사적 제107호로 지정됐다.

강진 대구면 앞바다 뒤쪽의 산 아래로 떨어지는 붉은 해가 하늘과 바다를 짙게 물들이고, 하루를 마감한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고갯길은 울창한 숲이다. 바람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오가며 내는 소리, 온갖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며 오르막 내리막길을 번갈아 걷다 보면 어느 새 백련사에 닿는다. 백련사의 야생차밭과 울울창창한 동백나무숲은 200여 년 전에도 그 자리에 있었을 터.

세납 34살의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와 강진으로 유배 온 10살 연상의 정약용 선생은 1805년 봄, 첫 만남 이후 1811년 가을 혜장선사가 입적할 때까지 6년 간 교류했다. 두 선지식은 1km 남짓 거리의 산길을 오가며 유학을 논하고, 불교를 논하고, 인생을 논하며 차담을 나눴다. 정약용 선생은 혜장선사와의 인연에 대해 “삼경에 비가 내려 나뭇잎 때리더니 / 숲을 뚫고 횃불이 하나 왔다오. / 혜장과는 참으로 연분이 있는지 / 절간 문을 밤 깊도록 열어 놓았다네.”라고 읊었다.

그리고 혜장선사의 비명(碑銘)에 “〈논어〉 또는 율려(律呂) · 성리(性理)의 깊은 뜻을 잘 알고 있어 유학의 대가나 다름없었다. 그는 특히 〈수능엄경(首楞嚴經)〉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가장 잘하였다.”고 썼다. 두 현자의 인연은 혜장선사 사후에도 이어진 셈이다.

신라시대 원효국사가 창건한 무위사 경내에서 바라 본 일주문과 주변 풍경이 한가롭다.
무위사 삼층석탑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이다.
보물 제507호로 지정된 선각대사 형미 스님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비다. 고려 정종 원년(946)에 건립했다.
백련사는 신라시대 무염국사(無染國師, 801∼888)가 만덕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사찰이다. 고려 천태종의 수행종풍을 드날린 원묘국사 요세 스님이 백련결사를 일으킨 도량이다.
고려청자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고려시대 사당리 41호 청자 가마터다. 퇴적층에서 순청자와 상감청자가 출토됐다.
강진 사문안 석조상은 월남사지로 들어가는 사문안골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높이 122cm, 폭 55cm, 두께 28cm의 석조상 사면에는 스님상과 귀면 등 13개의 상이 조각돼 있다.
전라남도 시도기념물 제125호인 월남사지는 고려 진각국사(眞覺國師)가 창건했다고 전한다. 전탑(塼塔) 양식의 3층 석탑(보물 제298호), 절터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는 진각국사비가 남아있다.
강진군 칠량면 송정리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군으로, 모두 25기다.

 깊은 불교 인연 간직한 월출산

만덕산과 함께 불연이 깊은 산이 바로 월출산이다. 전남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에 걸쳐 있는 월출산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라고 읊조릴 만큼 ‘그림 같은 달’이 떠오르는 산으로 유명하다.

월출산은 이름 그대로 달이 뜨는 산이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월출산 위로 살포시 얼굴을 내민 초승달의 모습에 뭇 사람들의 감성이 깊고 깊어진다.

이 월출산 자락에는 영암 도갑사(道岬寺)와 용암사지(龍岩寺址), 강진 무위사와 월남사지를 비롯한 많은 불교유적들이 곳곳에 숨 쉬고 있다. 월출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월남마을에서 걸어 오르면 가장 먼저 월남사지를 만난다. 월남사지는 고려시대에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17세기 중반에 이미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전탑(塼塔) 양식의 3층 석탑(보물 제298호)과 각종 유구가 남아 있다. 현재 사지 발굴과 삼층석탑 해체 · 보수를 진행하고 있는데, 작업이 완료되면 월남사지의 사역과 규모가 보다 명확하게 밝혀질 것이다. 절터에서 약 150m 떨어진 곳에는 진각국사비가 비각 안에 자리하고 있다. 비문은 당대의 문인이자 명문장가인 이규보가 썼다.

월출산 삼층석탑을 누가 언제 조성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자연석 위에 우뚝 솟은 모습에서 석공의 불심이 느껴진다.
보물 제1283호 용암사지 삼층석탑은 고려시대 탑이다. 월출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이 무문관에서 정진하는 수행승을 닮았다.
월출산 삼층석탑을 누가 언제 조성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자연석 위에 우뚝 솟은 모습에서 석공의 불심이 느껴진다.

월남사지와 관련된 유물이 강진군 작천면(鵲川面) 갈동리(葛洞里)에도 전한다. ‘강진 사문(寺門)안 석조상’이다. 이 석조상은 월남사지로 들어가는 사문안골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높이 122cm, 폭 55cm, 두께 28cm의 자연석으로 깎아 만든 석조상의 사면에는 스님상과 귀면 등 13개의 상이 조각돼 있다. 석상의 대좌에는 8판 연화문이 새겨져 있어 이 석조상이 불교와 민간신앙이 결합된 문화유산일 것으로 추정한다.

진각국사비를 지나면 월출산 품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월출산은 신라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고려시대에는 월생산(月生山)으로 불렸다. 월출산의 여러 봉우리 중 구정봉(九井峯, 743m) 아래에는 국보 제144호 마애여래좌상, 용암사지, 보물 제1283호 용암사지 삼층석탑, 월출산 삼층석탑 등이 있는데, 월출산에 부처님 인연이 깊게 깃들어 있음을 일러주고 있다.

월출산 삼층석탑은 마애여래좌상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다. 만약 월출산 삼층석탑에 오지 않았더라면 바위에서 몸을 드러내 세상을 굽어보는 마애여래좌상의 거룩한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근엄한 표정으로 중생세계를 살피는 부처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낸 석공의 솜씨와 지극한 불심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자연석 위에 대충 올려놓은 듯한 이 탑을 누가, 언제 조성했고, 어느 사찰의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신심 있는 불자든 등산객이든 힘들게 이곳을 찾아온다고 해도 탑의 유래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지만, 결코 헛된 걸음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탑 또한 멀리서 바라보면 거대한 바위들이 고개를 숙이고 예경하는 형상이어서 선조들의 혜안에 탄복하게 된다.

월출산 삼층석탑에서 마애여래좌상으로 가는 길은 오르막의 연속이다. 긴 오르막 끝에 다다른 마애여래좌상에서 아래로 200m 가량 가면 용암사지와 보물 1283호 삼층석탑이 세월의 무상함을 즐기는 듯 고즈넉하게 앉아 있다. 이곳을 아는 이도 그리 많지 않고, 안다고 해도 가기 힘든 곳이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이 세 곳의 불교유적을 찾아 참배하고, 신심을 다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구정봉과 월출산 제1봉인 천황봉 중간의 바람재에 이르면 강진과 영암군이 좌우로 펼쳐진다. 사람은 이 산을 오고 가는 일이 힘겹지만, 바람은 거침없이 오고 간다. 마애불과 탑을 조성한 이들, 사찰에서 가족과 나라를 위해 기도했을 수많은 불자들도 이 바람재에서 땀을 닦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들의 불심은 세월을 뛰어넘어 청량한 바람으로 다가와 “굳건한 불심은 세세생생 흔들리지 않는다.”는 말없는 가르침 한 마디를 전하고 떠난다.

불자이자 시인인 민박집 주인장이 “월출산 마애불은 꼭 보고 가야한다.”고 적극 권유하지 않았다면 굳이 고행길을 자처하지는 않았을 터. 그의 말에 “불자들에게 월출산의 불교유적을 알려 달라.”는 메시지가 들어있음을 느꼈다. 이 또한 인연임을 깨닫고 바람재를 떠나 월남마을로 향하는 바람에 감사의 마음을 실어 보냈다.

월출산 입구에는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원효대사가 ‘관음사’란 이름으로 창건한 무위사가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밋밋하지만 오래돼 보이는 전각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 세종 12년(1430)에 지은 극락보전(국보 제13호)이다. 이 극락보전 내부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특히 아미타여래삼존벽화는 국보 제313호 지정됐을 만큼 가치가 크다. 조선 성종 7년(1476)에 화원(畵員) 해련(海連) 스님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는 이 벽화는 고려시대의 특징과 조선 초기 불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어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다. 경내에는 통일신라 말 고려시대 초의 고승인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스님의 비인 선각대사탑비(보물 제507호)와 삼층석탑(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등의 문화재가 불자들을 반긴다.

‘담’을 남긴 하멜, ‘모란’ 피운 김영랑

네덜란드 사람인 하멜은 7년 동안 전라병영성 인근 초가집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네덜란드식 담을 쌓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때 쌓은 담이 ‘하멜 돌담길’, 즉 한마을 돌담길이다.

강진에는 타 지역에는 없는 독특한 유적이 있다. 일명 ‘하멜 돌담길’이다. 공식 명칭은 ‘강진 한골목 옛 담장’(등록문화재 제264호).

네덜란드 사람인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은 상선을 타고 가다가 태풍 때문에 제주도에 표류했다. 이때 제주목사에게 붙잡힌 뒤 1656년 강진으로 유배, 전라병영성(全羅兵營城)에 소속됐다. 1660년에 전라병영에 부임한 절도사 구문치는 하멜 일행에게 집과 텃밭을 내주었고, 하멜은 7년 동안 전라병영성 인근 초가집에 머물면서 동네 사람들에게 네덜란드식 담을 쌓는 방법을 일러주었다. 그때 쌓은 담이 ‘하멜 돌담길’이다.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걸어 다니면 옛 정취와 함께 이국적인 모습의 돌담을 감상할 수 있다. 맞은편의 전라병영성도 둘러볼만 하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서정시인이자 항일 민족지사 영랑 김윤식 선생이 태어나고 46년 간 살았던 집이다.

강진에서 빼먹지 말고 가봐야 하는 곳이 ‘영랑생가’(중요민속자료 제252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정시인이자 항일 민족지사였던 김윤식(金允植, 1903~1950) 선생이 태어나 46년 간 살았던 곳이다. 영랑(永郞)은 그의 호다. 김윤식 선생의 대표적인 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하략)’

강진군은 이 지역 출신인 영랑의 문학정신과 삶을 후손들이 엿볼 수 있도록 생가를 정비하고, 생가 위쪽에는 모란과 대나무를 식재해 놓았다. 강진군에는 정약용 선생이 유배됐을 때 머물렀던 주막집인 사의재(四宜齋)도 복원돼 있는데, 다산은 유배를 왔을 때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4년 동안 사의재에 머물며 제자들을 교육했다. 그리고 유배지로 찾아 온 어린 아들과 상봉했던 가우도에는 그 장면을 표현한 미술작품이 해안가에 설치돼 있다.

이밖에 강진에는 보물 제1841호 강진 고성사(高聲寺) 청동보살좌상, 보물 제1843호 강진 정수사(淨水寺) 석가여래삼불좌상,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강진 옥련사(玉蓮寺) 목조여래좌상,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7호 강진 월남리 마애여래불두상 등 불교문화재도 곳곳에 남아있다.

아울러 이순신(1545∼1598) 장군과 그의 휘하에서 활약한 김억추(金億秋, 1548∼1618)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인 금강사(錦江祠, 전라남도 기념물 제91호), 고려청자를 굽던 가마터인 삼흥리(三興里) 도요지(전라남도 기념물 제81호), 송정리(松汀里) 지석묘군(支石墓群, 전라남도 기념물 제66호), 강진향교(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15호)도 남아 있어 강진의 문화와 정신을 후세에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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