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의 토굴살이(267호)

나는 더위를 피하려 하지 않고 더위와 더불어 산다. 물 흐르듯이 꽃 피듯이 더위를 도전적으로 해소시키려고 든다.

마당의 잔디와 언덕의 풀도 깎는다. 서재에서 반라(半裸)의 몸이 된 채 책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한다. 아침에는 자연바람 속에서 살고, 섭씨 30도 전후의 한 낮이 되면, 세수를 하고 물수건을 등에 얹기도 하고, 선풍기를 틀기도 하고, 냉방을 하기도 한다. 책 속, 글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더위가 느껴지지 않는다. 서재에서 지치면 마당으로 나간다. 마당으로 나갈 때는 날파리나 풀모기를 쫒기 위하여 부채를 들고 나간다. 내 부채 한쪽 면에는, 먹글씨로 ‘无心(무심)’이라고 쓰고 다른 한 편에는 ‘狂氣(광기)’라고 써놓았다. 무심은 하늘의 마음가지기이고 광기는 책 읽기와 글쓰기에 미쳐버리자는 것이다. 어떤 것을 이루려면 그것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미쳐버려야 하는 것이다.

‘無(무)’자는 ‘섶을 쌓아놓고 불을 질러 태우니 없어져 버린다’는 ‘없음’의 글자이지만, ‘无(무)’자는 ‘하늘天’자를 닮은 글자로서, 하늘의 텅 비어 있음과 같은 ‘없음’과 우주의 시원을 뜻하는 없음이란 글자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대흥사의 ‘극락전’을 ‘无量壽閣(무량수각)’이라고 썼다. ‘무량수’는 영원의 시간을 뜻한다.

내가 ‘무심(无心)’을 부채에 쓴 것은 텅 빈 하늘의 마음, 영원의 시간, 우주시원의 마음을 가지고 싶기 때문이다. 아니, 영원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다. 사실은 깨달음을 통해 거듭나고 싶은 것이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마음은 무심이다. 무심은 초월해버린다는 것이다. 금잔디와 늙은 감나무 잎사귀들에는 금빛 화살 같은 햇살이 작열한다.

감나무 그늘 속에 나무 평상 하나가 놓여 있다. 평상은 내가 사랑하는 종이다. 그놈의 등허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웃옷을 모두 벗어버리고, 바다를 건너고 들판을 휘질러온 푸른 바람과 푸른 그늘로 녹색목욕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시원한 목욕을 즐기면서 처마 끝의 풍경소리를 듣는다. 바람은 풍경에 달려 있는 양철 물고기를 희롱하고, 물고기는 몸부림치듯 풍경을 흔들어대고, 풍경은 자지러지는 소리를 낸다. 감나무와 호두나무에서는 매미들이 운다. 그것은 나를 스쳐 지나간 옛사랑 같은 귀 울음(耳鳴)이다. 뒷산에서는 뻐꾹새 소리, 꿩꿩 푸드득 하는 장끼 소리도 들린다. 그 소리들은 서재 속에서 생긴 나의 우울을 치유하는 신약이다.

나무로 만든 평상, 그것은 내 사랑하는 종이다. 감나무의 그늘 아래 앉은 채 거무튀튀하게 늙어가면서도, 자기 등허리가 토굴 주인 늙은이가 명상하는 자리라고 자부한다. 이놈은, 주인 늙은이가 남은 목숨을 도깨비한데 저당 잡히고, 모두 사버린, 연꽃 바다와 섬들과 하늘을 꼼꼼하게 살펴 두었다가, 서재에서 돋보기 너머로 글을 쓰다가 쉬러 나온 주인 늙은이에게 시시콜콜 보고한다.

당신이 서재에 계시는 동안 저 건너 바다에서 달려와 당신의 모래밭에서 부서진 파도는 팔만사천팔백 개, 심연에서 꼬물거린 키조개와 피고막과 새조개와 갯벌에 기어 다닌 송장게 · 칠게 · 도둑게들이 팔만사천구백 마리, 뛰어다닌 망둥어와 수면으로 뛰어올라 햇빛을 찬양하며 퍼덕거린 숭어와 농어와 도미 · 전어 · 멸치들이 팔천 억 마리, 바지락 캐는 아낙 고막 잡는 아낙들이 쉰다섯 사람, 정치망에서 고기잡이 하고, 통발로 낙지잡이 하는 어부들이 삼십 명, 그물 깁고 있는 어부가 세 사람, 고속으로 지나간 고깃배가 세 척, 청둥오리 200마리, 해오라기 스무 마리, 먹황새 열 한 마리, 검은 댕기 두루미 열 마리, 물떼새 스무 마리, 갈매기 백 열 두 마리……

그들에게서 받아야 하는, 당신의 하늘과 바다 사용료는 오늘도 모두 외상입니다.

주인 늙은이인 나는 ‘그래그래 알았다’ 하며 고개 끄덕거리고 ‘부지런히 사용하되 더럽히지만 말라고 해라’하고 명령하며 텅 빈 하늘을 쳐다본다. 흰 구름 한 장 무심히 흘러간다. 그래 그렇다. 나의 여름은 저 구름처럼 유유히 잘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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