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단상 (266호)

기자는 부산에서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 단골 소풍 장소이자 벗들과의 놀이터는 백양산(白陽山) 자락의 천년 고찰 선암사(仙巖寺) 옆에 있는 넓은 솔밭이었다. 그 솔밭에 들어서면 소나무가 뿜어내는 청아한 솔향기가 좋아 둥치를 껴안고 한참을 있을 정도로 소나무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이나 학원에서의 수업을 마치고 축 늘어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어두운 밤길을 비춰주던 희망의 도반은 달〔月〕이었다. 그리고 대학 시절을 포함해 약 10년간 경주에서 신라의 달을 보고 느끼고, 삼릉의 솔숲에서 아름드리 소나무를 만지고, 바람이 들려주는 솔가지의 노랫소리를 듣고, 뿜어내는 솔향기를 맡고 살았으니, 달과 소나무가 기자에게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되고도 남음이다. 그렇다보니 달과 소나무는 시나브로 몸과 마음에 스며들어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기억이자, 지친 심신을 달래주는 천연 피로회복제였다.

하지만 여유로울 법한 퇴근시간에도 지하철 도착을 알리는 신호음이 들리면 무의식적으로 뛰는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은 달은 커녕 여기저기 널린 소나무를 마음 놓고 바라볼 여유도, 고달픈 삶의 넋두리를 풀어놓을 시간도 빼앗아갔다. 먹고 사는 일에 몰입한 나머지 주위를 둘러볼 틈이 없었는지,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의 여유를 찾을 생각조차도 잊어버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각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생활패턴에 작은 변화를 준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 1박 2일 간 다녀 온 ‘솔향’의 고장 강릉 출장길이었다. 강릉에는 어디에나 소나무가 있고, 밤이 되면 은은한 달빛이 소나무를 비춘다. 소나무에 기대 앉아 달을 쳐다보고 있으니, 어릴 적 선암사 솔밭에서 친구들과 뛰어놀았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입가엔 작은 미소가 번졌다. 강릉에서 본 그 달과 소나무가 그간 잊고 살았던 삶의 여유를 되찾게 해준 존재였음을 깨달았다.

한국사람 중에 소나무를 싫어하는 이가 있을까. 소나무를 좋아하는 한 도반은 “소나무가 초콜릿 향을 뿜어내서 좋다.”고 했다. 사람마다 소나무에 대해 느끼는 감성은 다르지만, 소나무가 주는 삶의 여유는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이 아무리 바삐 돌아갈지라도 숨 돌릴 틈은 있다. 사람들이 달과 소나무를 보며 자신의 삶을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여유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뿌연 황사가 물러난 뒤에 술집이나 회사, 집안에만 있지 말고 잠시라도 맑게 갠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여러 형상으로 변신하는 달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어느 산이나, 공원과 정원, 길가에 있는 소나무와 마주 앉아 잠시 마음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자.

달은 달대로,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무언의 행복과 가르침을 줄 것이다. ‘달, 소나무’는 행복의 다른 이름이자, 내 안의 부처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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