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의 토굴살이 (266호)

옛날 한 힘센 남자가 서울로 무과(武科)를 보러갔다. 힘이 넘칠 뿐 아니라, 칼쓰기·창쓰기·말타기·수박치기 못하는 것이 없었고, 배포도 두둑했고, 용기와 의협심도 대단했고 세상을 뚫어보는 지혜와 인정도 남달랐다.

산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었고 배가 고팠다. 어디선가 불빛이 반짝거려, 하룻밤 묵어가자 하고 그 불빛을 찾아갔다. 거대한 기와집 솟을대문 앞에 이르렀다. 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남자는 대문을 두들기면서 “여봐라!”하고 소리쳤다. 한참 소리치며 기다렸을 때에야 문이 열렸다. 머리 길게 땋아 늘인 과년한 처녀가 초롱불을 들고 나와 깊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집에서는 묵어가실 수 없습니다. 빨리 재를 넘어 다른 인가를 찾아가십시오.”

남자는 지쳐 있었고 밤길도 험했으므로 더 길을 갈 수 없었다. 기어이 묵어가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고 억지를 썼다. 처녀가 말했다.

“우리 집에서 묵게 되면 손님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어서 가십시오.”

남자가 따져 물었다.

“무엇이 위태롭다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보다시피 저는 힘이 장사이고 무술도 뛰어납니다. 두려울 것이 없으니 들어가서 하룻밤 신세 지고 가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처녀가 마지못해 남자를 안으로 들였다.

들어가 보니 어마어마한 부잣집이었다. 으리으리한 사간(四間) 겹집에 사랑채와 문간채가 있고, 큼지막한 장독대와 귀중한 살림살이를 저장하는 드넓은 광도 있었다. 한데 집안에는 처녀가 혼자 있을 뿐이었고 귀신날 것처럼 조용했다. 처녀는 말없이 저녁밥을 차려 주었다.

남자가 밥을 다 먹고 나자 처녀가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앉으면서 말했다.

“저의 집은 선조대대로 내려오는 양반 가문의 부자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에 오랍이 둘이나 되고 올케들도 둘이었으며, 문간채에 사는 두 쌍의 종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한밤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나타나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을 죽어가게 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오랍 올케들을 차례로 다 죽게 하고, 오늘은 마지막으로 제가 죽어가게 될 차례이옵니다. 아니, 손님이 오셨으므로 괴물은 저를 젖혀두고 낯선 손님을 먼저 죽게 할지도 모릅니다.”

남자는 그 괴물이 어떻게 생겼더냐고 물었다. 처녀가 대답했다.

“사람형상을 하고 있는데,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났고, 온몸에 털이 돋아 있고, 눈에서 이글이글 금빛 화광이 솟고, 걸으면 쩔그렁쩔그렁 쇳소리가 나고, 오래 묵혀둔 청동과 금과 은의 냄새가 납니다.”

남자는 처녀에게,

“오늘밤에는 아무 걱정 마시고 아가씨 방에 들어가 자리를 펴고 주무십시오.”하고 나서 몇 가지 조처를 했다.

돌로 된 절구통을 들어다가 마당 한가운데 놓고 끌과 망치로 밑구멍을 뚫었다. 숯을 그 안에 담고 불을 피웠다. 불 위에 잎담배 한 아름을 얹었다. 뒤란 대밭에서 대 한 그루를 베어다가 한 길 남짓한 대롱 하나를 만들었다. 그 대롱을 절구통 밑구멍에 끼웠다. 남자는 절구통 옆에 멍석을 깔고 목침을 베고 누워 대롱 끝을 뻐끔뻐끔 빨았다. 담배 연기가 마당 안에 퍼졌다.

자정이 되자 한 시꺼먼 괴물이 광 안쪽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걸어 나왔다. 잠시 마당 안을 둘러 살피던 괴물은 절구통 담배를 피우는 남자를 보고 소스라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남자는 의연하게 담배 연기만 빨아 뿜고 있다가 근엄하게 말했다.

“이리 요란스럽게 구는 그대는 어디 사는 누구인고!”

괴물이 한동안 남자의 얼굴을 살피다가 남자 머리맡으로 나아가 두 손을 짚고 엎드리면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저로 말할 것 같으면 광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하나의 정령이옵니다.”

남자가 말했다.

“광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정령이라니? 자세히 말해보아라.”

괴물이 말했다.

“이백 년 전에 이 집 선대의 한 어른이 중국, 여송(필리핀), 유구(오끼나와)지방과 무역을 크게 했는데, 은밀하게 금괴를 실어다가 광 바닥에 깊이 묻어놓았습니다. 저는 그 금괴의 넋이 변신한 정령이옵니다.”

남자가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껏 너는 이 집안의 많은 사람을 죽어가게 했단 말이냐?”

괴물이 말했다.

“저는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해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깊이 갇혀 있는 저를 꺼내다가 바람을 좀 쐬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려고 접근을 하곤 했는데, 제가 다가가기만 하면 그 사람이 기절초풍하여 죽어버리곤 했습니다.”

남자가 다짐을 받았다.

“진정 너의 말이 사실이렷다?”

괴물이 말했다.

“거짓말 아닌 사실이옵니다. 제발 한시라도 빨리 광 바닥을 석 자쯤 파헤치고 제가 바람을 좀 쐬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세상을 휘휘 돌아다니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좋은 일을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괴물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과거 보러 가던 남자는 처녀와 함께 촛불을 밝혀 들고 광으로 갔다. 괭이로 바닥을 파자 싯누런 금괴가 세 가마니나 모습을 드러냈다.

이튿날 처녀와 더불어 그것을 한양으로 싣고 간 남자는 임금에게 바치고, 그것을 얻게 된 내력을 말한 다음, 금괴의 넋이 바라는 뜻에 따라 환전하여 세상의 모든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기를 청했다.

 

돈은 흔히 칼에 비유된다. 예리하게 벼린 칼을 주방장이 손에 들면 좋은 요리를 하게 되지만, 강도가 손에 들면 도둑질을 하거나 살인을 하게 된다. 탐욕 많은 자가 반란을 꾀하여 칼을 손에 들면 세상을 피투성이로 만들어 놓는다.

돈은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좋은 데 쓰이지만, 음흉한 일을 꾸미려 하는 사람 손에 들어가면 세상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데에 쓰인다. 무식한데다 마음씨 곱지 않고 인정이 메마른 사람이 많이 가지고 있는 돈은 암세포처럼 세상을 병들게 하고 썩어가게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흘러야 한다. 물도 흘러야 하고 돈도 흘러야 한다. 그것은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부자들에게로 흘러가면 안 되고 아래쪽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흘러가야 한다.

돈은 가난한 자들에게로 흘러 잘 쓰이면 세상이 화평해지지만, 불량한 부자의 통장에 뭉쳐 쌓여 있으면 썩어 독(毒, 비자금)이 되는 것이고, 세상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요즘 경제가 얼어붙어 있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 일자리를 잃은 사람, 밥 한 끼 지어 먹을거리가 없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우리 선인들은 ‘십시일반(十匙一飯)’이란 말을 즐겨 사용했다. 열 숟가락을 떠 모아, 한 사람 몫의 밥을 만들곤 한 것이다.

모든 것을 나누어야 한다.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더불어 나누어야 한다. 기쁨을 나누면 온 세상이 더욱 기뻐지고, 슬픔과 괴로움을 모든 사람들이 나누면 그 슬픔과 괴로움이 소멸되고 대신 기쁨이 샘솟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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