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 (265호)

김영재
1974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히말라야 짐꾼>, <화답>, <홍어>, <화엄동백>, <겨울별사>, 여행 산문집 <외로우면 걸어라> 등. 중앙시조대상, 이호우시조문학상, 고산문학대상, 가람문학대상 등 수상. 현 도서출판 책만드는집 대표, 계간 <좋은시조> 발행인.

 

카투만두, 포카라, 마차푸차레, 안나푸르나, 그리고 당신 할리씨! 모두들 잘 계시나요!

2014년 포카라에서 할리씨 일행을 만난 건 나에게 행운이었고 나의 삶의 커다란 발자국을 찍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생애 최초로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위해 인천 공항에서 7시간을 비행하여 카투만두에 도착했습니다. 이어서 네팔의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40여 분 포카라로 향했지요.

네팔에 처음 간 나로서는 카투만두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가슴이 잔뜩 부풀어 있었지요.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순간이었지요. 외국인 비자 발급으로 2시간을 질질 끄는 공항 직원들의 행태에 짜증이 엄청 났습니다. 나는 길게 늘어선 줄에서 기다리며 대한민국 말로 항의하며 통과했던 기억이 납니다. 공항청사 밖으로 나가는 순간 예감은 했지만 눈을 못 뜰 정도의 혼탁한 공기는 한낮의 더위와 함께 한 순간이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공항청사 밖에서 기다리는 가이드를 겨우 만나 우리는 뛰고 또 뛰는 진풍경을 연출해야 했습니다. 왜냐구요? 포카라행 비행기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거든요. 4시간의 여유 있는 비행기 출발시간이 공항에서 입국수속으로 너무 지체하는 바람에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 비행기를 놓치면 40분에 갈 시간을 비좁은 봉고차에 끼어 타고 8시간을 가야 했기에 우리 일행은 사력을 다해 질주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떠나려는 비행기에 겨우 탑승해 포카라에 도착했을 때의 행복감이란 뭐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우리 일행은 해발 4.130m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를 향해 출발했지요.

그때 우리는 처음 만났고 생애 최초의 7박8일간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나마스떼!!”

(‘나는 당신 안의 신에게 절합니다. 나는 신이 당신에게 주신 재능에 경의를 표합니다.’ 라고 번역되는 뜻으로 인도와 네팔에서 주고받는 인사말.)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라 번잡한 포카라를 벗어나 너른 들판을 달렸지요. 넓은 평야를 지나자 산이 보였습니다. 차는 가파른 산길을 훠이훠이 휘돌아 걸어야 할 지점인 해발 1,770m 칸데에서 가쁜 숨을 멈췄습니다. 바라다 보이는 산자락에는 사람들이 깨알같이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잇길로 트인 등산로를 찾아 트래킹을 시작했지요.

집들은 돌담으로 둘러져 있었으며 사립문은 없고, 사립문 대신 우리나라 제주도처럼 기다란 나무 장대를 걸쳐 놓았습니다. 그 풍경이 나로서는 참 신기했고 친근감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나의 감정을 손짓으로 표현했더니 할리씨는 그저 웃기만 했지요. 물론 가이드가 통역해서 서로의 의사소통은 이뤄진 셈이었지만요. 그때 나는 문득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면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할리씨, 그런데 어찌합니까. 당신은 8일 동안 등산인 두 사람의 짐을 혼자 지고 오르고 있습니다. 덩치로 보면 당신의 몸 크기의 두 배입니다. 앞서 걷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며 나의 가슴이 짠하게 전율합니다. 고도는 점점 높아 갑니다. 해발 1,890m 오스트레일리안 캠프로 오르고 있습니다. 2시간째입니다. 오늘 걸어야 할 8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짐 진 노고가 어디 오늘 하루뿐이겠습니까. 앞으로 일주일이 더 남아 있습니다. 우리 일행의 짐뿐이겠습니까. 수많은 등산인의 짐을 지고 그 대가로 가족을 부양하겠지요. 그 일이 생업이고 살아가는 과정이고 히말라야와 함께 하는 날들의 연속이겠지요.

그 날 우리는 하루의 고달픔을 란드럭에서 쉬었지요. 그곳은 안나푸르나의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는 계곡인 모리콜라가 내려다보이는 마을이었지요. 그날 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지요. 나는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으며 쉽게 잠들 수도 없었지요. 할리, 당신은 아이가 다섯이고, 집을 떠나 히말라야에 들어오면 보통 7~8일 후에 집에 간다는 것, 그리고 얼마의 돈을 벌어서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것 등을 나에게 들려주었어요.

그렇게 동행한 우리들의 안나푸르나 등반은 나에게 즐거움과 경이로움으로, 때로는 고난으로 이어져 마무리 되었습니다. 나는 서울에 돌아와 수도승처럼 고산을 걸어가던 당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4,130m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지나 2011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 시 사망한 박영석· 신동민· 강기석 묘 앞에 섰습니다.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바람이 몹시 불어 그들의 영혼을 불러오는 듯 했습니다. 하산 길에 마차푸차레 롯지에서 하룻밤을 묵었지요. 돌아가는 길이라 마음도 몸도 시간도 여유가 조금 생겼어요. 목표를 찍고 돌아간다는 것, 곧 이별이 온다는 것, 그러나 이틀은 함께 더 있어야 했어요. 나는 떠났고 할리씨는 히말라야에서 오늘도 짐을 지고 걷고 있겠지요.

나의 네팔 친구 할리씨!

나는 이렇게 당신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당신과 함께 했던 7박8일의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내 생애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생각하며 시 한편을 썼습니다.

제 몸의 무게보다
큰 짐을 지고 가는

네팔 친구 할리는
아이가 다섯이다

하루에 일만 원 벌어
다섯 아이 지고 간다

- 김영재 시<히말라야 짐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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