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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시인, 고은산문 밖의 선지식을 찾아서 (265호)
  • 글·이윤수 방송작가 / 사진·박재완
  • 승인 2017.05.2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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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은 후백제를 평정한 뒤 잠시 수원의 한 산에 머물었다. 그때 산 정상에서 광채가 솟아오름을 본 왕건은 이 산을 두고 ‘한줄기 빛이 솟아 깨달음을 얻게 한 산[光敎山]’이라 했다. 수원의 진산 광교산은 그렇게 이름을 얻었다. 광교산은 고려 말까지 불교의 성지였다. 무려 여든아홉 곳의 절과 암자가 있었다. 이곳은 신라의 최치원이 머물렀다는 기록이 전하고 기개와 도량이 크고 깊었다는 현오국사와 보조국사 지눌의 수제자인 진감국사 혜심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광교산에 고은 시인이 산다. 몇 해 전, 30여 년간 지내온 안성시대를 마감하고 수원시대를 열면서 시인은 ‘아침에 출항하는 어부처럼 우렁찬 꿈에 부풀어 있다’고 노래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가득한 광교산 중턱, 창작의 산실에서 시를 빚는 고은 시인을 만났다.

1933년 전북 군산에서 났다. 12년동안 불가의 승려로 수행했으며 1958년 시 ‘폐결핵’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서사시 〈백두산〉 7권, 전작시 〈만인보〉 30권을 비롯, 시·소설·평론·에세이 등 150여 권의 저서를 펴냈으며, 20여 개 국가에서 해외판이 출판되었다. 〈고은시전집〉, 〈고은전집〉이 출간되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한국민예총 초대회장 등을 지내고, 미국 하버드 대학 옌칭연구소 초빙교수, 버클리대 동양학부 초빙교수, 서울대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겨레말남북공동편찬위원회 이사장이다.

시는 심장의 뉴스, 염통에서 나오는 새 소식이다

이 땅에서 고은 시인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설령 시인의 시집을 펼쳐 읽은 적이 없다손 치더라도, 가을에 편지를 쓰게 만드는 최양숙의 노래 ‘가을편지’, 양희은이 부른 ‘세노야’, ‘작은 배가 있었네~’로 시작하는 조동진의 ‘작은 배’ 등 만인이 즐겨 부르던 이들 노래가사가 모두 고은시인의 작품이다. 오래전, 노래시를 빚어내며 대중적인 교감을 이뤄왔던 시인이다.

1953. 통영에서

1990년대 시인의 책날개엔 이렇게 심플하게 소개되고 있다.

‘1933년 전북 군산생. 1958년 문단에 나온 이래 시집, 소설집, 평론집 등 1백여 권의 저술 간행’

그런데 지난해 10월에 간행된 그의 시집 ‘초혼’ 날개에 실린 시인 소개는 더 간결하다.

‘시인생활 58년, 시집 여럿’.

시인이 접한 첫 시는 중1 교과서에 실린 이육사 시인의 〈광야〉였다.

“시 ‘광야’엔 어린 가슴이 감당못할 ‘광야’라는 무한 공간이, ‘천고(千古)’라는 무한 시간이, ‘초인’이라는 무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감히 시인을 꿈꿀 수 없었죠. 그 뒤 중학4학년 어느 날 길에서 ‘한하운 시초’를 주웠어요. 밤새 읽다 울면서 시인이 되길 맹세했죠.”

기실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선생의 꿈은 화가였다. 일찍이 외삼촌의 서가에서 고흐의 그림을 본 뒤 ‘충격’에 휩싸인 뒤 그는 책상위에 ‘고흐 아니면 無다’란 쪽지를 붙여놓았다. 미술부 학생으로 교내 공모전에서 1등을 수상할 정도로 두각을 보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폐허의 공간에선 화가도, 시인도 꿈꿀 수 없었다.

1961. 승려 시절 제주도에서 시인 구상과 함께.

시상이 머릿속에, 몸속에 가득 차 있어 늘 출렁거리고 파도친다

고은태라는 본명에서 끝 글자 ‘태’자를 떼어내고 62년째 필명 고은으로 산다. 승려시절 불교신문을 창간, 초대 주필이 되어 신문작업 중에 지면공백을 메우기 위해 시문 등을 썼다. 그 중 한 편이 시 〈폐결핵〉이다. 이 작품을 친구가 문단에 투고하면서 등단했다. 단 한 번의 추천으로 시인이 된 ‘파격적인’ 데뷔였다.

시인은 지금도 읽어야 할 책 목록을 깨알같이 적어서 들고 다니며, 쉬지 않고 책을 구한다. 이렇게 구해 읽은 책이 한 달이면 50여 권에 달한다. 그의 서재가 작은 도서관 규모의 서가를 갖추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강의할 때면 청중의 규모와 상관없이 시인은 또 깨알 같은 메모를 챙긴다. 언제 어느 때라도 찬란한 언어의 향연을 펼쳐놓는 언어의 마술사이자 동서고금을 넘나들고, 인문학에서 천체물리학까지 오가며 우주 삼천대천세계를 논하는 천재 시인이건만 그의 메모준비는 놀랍도록 세심하다.

시인은 글쓰기를 쉴 땐 책을 읽고, 책읽기를 쉴 땐 글을 쓴다. 직관의 시어로 간결명료한 선시를 쓸 때도 있고, 원고지 130장에 달하는 장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시를 쓰지만 소설도 쓴다. 평론도 하고, 평전도 쓰고, 에세이도 쓴다. 그리하여 지난 59년 동안 시인은 150여 권이 넘는 작품집을 펴냈다.

금지된 번역이 풀린 1990년대 이후 전 세계 30여 나라에서 50여 권의 책을 번역, 출간했다. 1996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국제시인대회 이후로 세계의 문학인들이 먼 길 마다않고 고은 시인을 찾아오고, 시인은 내 집 삼아 세계를 돌며 파란 눈의 독자 앞에서 시를 낭독하고 강연하는 일이 많아졌다. 해외의 시인들과는 격의 없는 우정을 나누고 있으니, 진정한 우리 문학의 세계화란 이런 모습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고은 시인의 인터넷 누리집에 실린 ‘먼 옛날 세습 방랑시인으로 출생, 한때 디오니소스의 친구’였다는 전생의 연보가 예사롭지 않다. 어느 때엔 아기무당이었고, 술집 주모였으며, 행상이었고, 목동이었고, 피리를 잘 부는 화전민에, 일자무식 나무꾼, 그리고 스승에게 전수받은 적이 없는 승려[無師僧], 술 좋아한 귀머거리 머슴이었다니……. 족히 그러고도 남았을 듯하여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974. 제1회 한국문학작가상 시상식을 마치고 동료들과 함께. 왼쪽부터 신경림, 이호철, 고은, 백낙청, 박태순, 황석영.
1990. 4. 18. 동국대에서 '4ㆍ18기념' 강연 당시 김대중 부부 등과 함께.

 다 깨달으면 뭐가 재밌겠어?

전쟁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크나큰 트라우마다. 부상이나 신체적인 장애 그 이상으로 정신적인 상처는 극심한 후유증으로 이어진다. 고은 시인도 너무 일찍 생사문제에 직면했다. 초토화된 폐허에 널브러진 주검들에 대한 죄의식으로 견딜 수 없었던 10대 때, 시인은 마치 쇠붙이가 자석에 이끌리듯 ‘섬광을 뿜어대는’ 혜초 스님과 인연이 되었다. 1951년 군산 동국사로 출가, 세간의 이름을 버리고 중장(中藏) 스님이 되었다.

동서양 철학을 두루 꿰고 있던 혜초 스님과 함께한 두타행의 길은 ‘배가 고파도, 날이 추워도 우렁찬 환희심’에 젖어 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1953년 겨울, 혜초는 가사가 든 바랑을 전해주면서 자신의 은사인 효봉을 찾아가라고 했다. 눈보라 속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길을 떠났고, 물처럼, 구름처럼 국토를 두루 만행했다. 1955년이 돼서야 통영의 효봉 큰스님을 찾아뵙고 일초(一超)라는 법명을 새로이 받았다. 일초는 시인이 ‘단박에 깨달아 부처의 경지에 들어간다[一超直入如來地]’에서 나온 말이다. 자애롭고 엄중한 효봉 스승은 일초더러 ‘문자놀이 그만하고 화두를 들라’했다.

“효봉 스님을 만나 선수행을 하면서 정신적 외상은 치유됐어요. 스님은 제자의 생일을 챙겨 떡을 해주실 만큼 자상한 분이셨죠. 시계가 귀하던 시절, 갖고 계시던 회중시계를 제게 전해주기도 하셨죠. 그때 자신의 한 부분을 양도한다는 의미를 직감했어요. 한번은 쌀 씻을 때, 몇 톨의 쌀을 흘리는 걸 보시더니 그 자리에서 ‘내가 이런 도둑놈을 상좌로 키웠다’며 대성통곡을 하셨죠. 이후로 지금껏 밥알 한 톨 남기지 않습니다.”

불교계에 큰 소임을 맡은 효봉 큰스님을 따라 상경했다. 그사이 첫 시집 ‘불나비’가 인쇄 도중에 전소되는 어이없는 사건이 있었다. 1960년에 새로 쓴 시를 모아 다시 첫 시집 ‘피안감성’을 출간한다. 시인 일초 스님의 불교 강연은 유명했다. 스님의 강연은 도심극장에서 펼쳐졌다. 리싸이틀 무대를 갖는 가수와 견줄만한 인기였던 것이다. 객석은 상실의 시대에 귀를 활짝 열어 놓는 준걸한 젊은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 무렵 가사장삼을 수하고 선남선녀의 혼례식 주례만 100번 넘게 맡기도 했다. 이런 인기를 틈타 가짜 고은이 전국 각지에 출몰해 각종 사건사고를 일으켰고, 시인은 경찰과 합동으로 가짜 고은을 체포하고 훈방하기도 했다.

한반도를 강타했던 태풍 ‘사라호’가 가야산을 훑고 간 직후였던 1959년엔 해인사에 입방해 3년 가까이 선방에서 용맹정진 했다. 4.19혁명의 시기를 틈타 대처승들이 해인사로 몰려왔다. 주지와 권속들이 한순간에 절을 버리고 떠난 뒤였다. 일초 스님은 남은 수좌들을 모아 ‘절 사수’를 선언하고 선정농성에 들어갔다. 술 취한 깡패들이 난입하면서 스님은 구광루 돌계단 밑까지 질질 끌려내려가는 폭력을 견뎌야 했다.

그러나 그가 누구던가. 머리가 깨져 피범벅이 되고, 가사도 엉망으로 찢겼지만 그 와중에도 해인사 주지 직인을 손에서 놓질 않았다. 도리어 호통을 쳐서 그네들을 돌려보냈다. 산중회의가 소집되었다. 당연지사 해인사를 이끌어갈 주지로 일초 스님이 뽑혔다. 세속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눈빛 형형하던 그 시절의 별명은 ‘예쁜 스님’이었다. 지금도 가야산 해인사를 떠올리면, 고막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그의 귓가에 홍제암의 ‘세상 떠날 것 같은 굉음’의 물소리가 가득하다.

강화도 전등사 주지시절, 불립문자의 선수행자로서 수행의 길을 가야 할지, 중생과 더불어 시를 써야 할지 갈등이 컸다. 마니산에 올라 별을 보며 하염없이 묻고, 하염없이 울다가 하산을 했다. 그길로 일간지에 환속선언을 발표하고 절을 떠난다.

일초 스님에서 다시 고은 시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언어도단, 절언, 묵언정진의 경지로 살아가던 선수행 시절을 통해 스님은 선시적인 체험을 했을 것이다. 중장과 일초로, 신심 하나 들고 치열하게 정진하며 살았던 12년 출세간의 세월은, 시인의 생애 속에서 피가 되고 골수를 이루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허무의 바다에서 화엄의 세상으로

1989. 남북작가회담사건으로 네 번째로 수감되다.

고은 시인은 환속 이후 또다시 허무주의에 젖어 불면증으로 고생했고, 끝없는 자살 유혹에 시달렸다. 이미 군산에서 두 차례의 자살이 미수에 그친 바 있고, 제주도행 야간 여객선에서 투신자살하려 했으나, 아름다운 별에 취해 술 마시고 잠들면서 그마저도 미수에 그쳤다. 한 시절 머문 적이 있는 삼각산 일선사의 인적이 없는 골짜기에서 완벽한 자살을 시도했건만 그날따라 난데없는 예비군 훈련이 이뤄지면서 시인은 극적으로 다시 살아났다.

“지금도 먼저 떠난 이들에게 빚을 지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날 한때 절망을 벗 삼아 ‘야차처럼 밤거리를 휘저으며’ 몽롱한 의식으로 술에 의지해 살았죠. 70년 11월 어느 날, 무교동 술집에서 통금을 넘긴 채 만취해 잠들었다가 새벽에 굴러다니던 신문을 통해 전태일 열사의 소식을 접했어요.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분신했다는 기사가 나를 일으켜 세운 겁니다.”

개인적 죽음에 함몰돼 있던 시인이 사회적인 죽음을 돌아보는 계기였다. 고은시인은 작가의 사회적 역사적 책무를 절감, 역사의 현장으로 나섰다. 1970년대 이래 무수한 젊은이들의 분신자결 현장을 찾아가 50여 편이 넘는 조시를 지었으며 눈물어린 추도시를 낭독했다.

유신체제 선포에서부터 80년의 봄이나 6월 항쟁 당시 고은 시인은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한 중심에서 단체를 이끌었다. 그 바람에 탄압을 받았고, 수배와 구속의 시간을 오갔다. 박정희 정권 때 고문으로 한쪽 고막을 잃어야 했고,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론 모진 고문을 견뎌야 했다.

“당시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은 마치 관속에 들어있는 것처럼 빛이라곤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었죠. 그곳에서 내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면 할아버지며 고모 등 가족 이야기에서부터 평범한 이웃들의 삶을 그려내야겠다는 꿈을 꿉니다. 그 꿈은 살아야겠다는 힘이 되기도 했죠. 21일의 단식투쟁 끝에 국어사전을 공부할 자유를 얻었고, 달달 외운 국어사전의 단어들은 ‘만인보’ 작업의 바탕이 돼 줬습니다.”

1986년에 선보인 〈만인보〉는 2010년에 30권으로 완간되기에 이른다. 모두 4001편에 걸쳐 이름 없는 무수한 이웃들의 다채로운 삶에 숨결을 불어넣은 연작시다. 〈만인보〉는 ‘시로 쓴 민족의 호적부’로 불리기도 하고, ‘20세기 세계문학사상 가장 비범한 기획’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프랑스 박사학위 논문 중엔 〈만인보〉 연구가 있고, 스웨덴에선 〈만인보〉가 현대의 고전으로 선정돼 청소년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민족에게 통일은 미래의 문화적 고향으로 가는 일’이라는 사명감으로 남북한 국어학자들이 함께하는 ‘겨레말 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의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의 언어통일을 위해 민족공통어사전을 만드는 사업이 진행 중이다. 어느덧 국내에는 ‘고은학회’가 창립되고 ‘고은문화재단’이 세워졌다.

1998. 백두산 천지에 올라.

상처와 동행하고 상처 입은 이들과 동행하는 존재가 시인

일본 제국주의의 핍박과 가난, 전쟁과 분단, 그리고 독재의 암울한 터널을 건너오는 동안 시인의 삶은 절망과 트라우마, 투쟁과 투옥, 고문으로 점철됐다. 그런 중에도 시인은 시 외의 세상 밖으로 이탈하지 않았다. 한 생애 치열하게 역사의 새벽을 깨우고 미래를 노래해 왔다.

‘내가 죽고 나서 몇 년 뒤 누군가가 내 무덤을 파헤쳐본다면 거기에도 내 뼈 대신 내가 그 무덤의 어둠 속에서 쓴 시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살지 않는 미래까지도 내 시의 현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고 보면 고은 시인의 이름 앞에 붙는 참여시인이니, 민족시인이니, 저항시인 같은 수식어들은 거대한 산맥인 고은 시인을 수식하는 일부분일 따름이다. 고은은 무엇에도 얽매일 수 없는 ‘그냥’ 시인이다. 사회와 역사를 온전히 바라보기, 힘없는 이웃들의 삶을 기록하기,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하기, 불의를 정의로 되돌려놓기……. 천생 시인이란 이런 모습이 아니랴.

독일어판 첫 시집을 간행한 주어캄프출판사 주최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고은 시인의 밤'에서.
2000. 8. 유엔총회의장에서 유엔 평화정상회의 개막식 축시 '평화의 노래'를 낭송.

고은 시인이 1970년대 기독교회관에서 목사님들 틈새에서 불교인으론 홀로 민주화를 외치던 시절이나, 서슬 퍼런 독재시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선봉에 선 전사일 때나, 세계 유수의 공연장에서 낮고 묵직한 음성으로 울림 가득한 시낭송을 할 때나, 시외버스를 타고 남부터미널에 내릴 때거나, 한여름 밀짚모자를 쓰거나 한겨울 중절모 차림일때도 이토록 당당하고 멋진 시인과 한 시대를 살아갈 수 있음이 고맙다. 예의 통찰력과 사유 속에 창작 열기를 분출하는 샘물 같은 시인이라 고맙고,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시대에 길을 물을 수 있는 스승이어서 고맙다. 변함없이 허리 꼿꼿이 세우고 걸으면서 흔들림 없는 목청으로 아닌 것을 아니라고 꾸짖을 수 있는 80대 시인의 건강도 더없이 고맙고 고마운 일이다.

글·이윤수 방송작가 / 사진·박재완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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