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에 담긴 불교이야기(264호)

걸림 없이 자유자재한 깨달음의 경지
‘소요’의 세계

한가롭게 마음 편히 여기저기 거니는 것을 소요(逍遙)라 한다. 예부터 모든 시인이나 수행자들은 걸림 없이 자유자재한 이 ‘소요’의 세계를 곧 깨달음의 경지로 삼았다.

삼각산에서 동북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동두천에 이르면 500여 미터 높이로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바위 성벽을 이루는 곳이 있다. 바로 소요산(逍遙山)이다. 진달래·단풍·두견 등이 우거지고 여러 개의 폭포가 흘러, 경기도의 소금강(小金剛)이라 불리는 이 산은 일찍이 원효대사와 의상대사, 그리고 매월당 김시습 등 수많은 불가의 선지식들이 소요의 자취를 남긴 곳이다.

 

이 산에서 수행에 전념하고 있는 원효 스님에게 어느 날 한 아름다운 여인이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

“스님, 저는 나물을 캐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날이 저물었으니 부디 하룻밤만 묵게 해 주십시오.”

원효 스님은 이를 허락했고, 그날 밤 그녀는 추위를 견딜 수 없다며 몸을 비벼달라고 청하기도 하고, 계곡에서는 물속에 따라 들어오기도 한다. 원효 스님은 이런 유혹을 이겨내며 그녀를 꾸짖었다.

“너는 나를 유혹해서 어쩌자는 거냐?”

“제가 스님을 유혹했습니까? 스님이 저를 색안으로 보셨지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원효 스님은 큰 방망이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깨달음을 얻는다. 그 사이 여인은 슬며시 웃으면서 곧 하늘로 올라 자취를 감춘다. 스님은 그 여인이 바로 관세음보살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욱더 수행에 힘을 쏟아 자재무애(自在無)한 수행을 쌓으니 후일 사람들은 그 암자를 자재암이라고 하였다. 서기 645년(신라 선덕여왕 14)의 일이었다.

한편, 원효 스님과 하룻밤의 사랑으로 아기 설총을 낳아 고이고이 기르고 있던 요석공주(瑤石公主)는 원효 스님이 경기도 동두천 소요산에 초막을 짓고 수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서라벌을 떠나 자재암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암자 근처에서 초막을 짓고 설총을 기르며 살았는데, 별궁지가 있는 그곳을 지금도 ‘공주봉’이라 부른다.

 

그리고 800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매월당으로 불린 김시습, 설잠(雪岑) 스님이 이 산을 찾는다. 설잠 스님은 21세 때인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고 3일간 통곡하며 보던 책들을 모아 불사른 뒤 스스로 머리를 깎고 속세를 등졌던 생육신의 한 사람이다.

29세인 1463년(세조 9)경에는 호남지방을 유람하여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엮었다. 그 해 가을 서울에 책을 구하러 갔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세조의 불경언해사업(佛經諺解事業)에 참가하여, 〈묘법연화경〉의 교정(校正)일을 맡아 내불당에 거처한 일이 있었고, 1465년(세조 11)에는 원각사 낙성식에 참석하여 찬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31살부터 설잠 스님은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 용장사(茸長寺)를 짓고 칩거한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집 〈금오신화〉와 집구시(集句詩)인 ‘산거백영(山居百詠)’ 등을 집필하였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시만 해도 2,200여 편으로 역사상 최대의 규모이다. 이외에도 설잠 스님은 〈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讚)〉,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 〈대화엄법계도서(大華嚴法界圖序)〉 등의 저명한 불서를 남겨 불씨가 꺼져가던 조선불교에 새로운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37살이 되는 1471년(성종2년)부터 설잠 스님은 서울로 올라와 10여 년을 보낸다. 그 당시 성동(城東) 폭천정사(瀑泉精舍), 수락산 수락정사(水落精舍), 춘천 청평사(淸平寺) 등에 머무르며 소요하던 스님이 가장 즐겨 찾던 곳이 바로 소요산이다. 그가 남긴 수많은 이 지역의 시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리하여 산의 이름이 소요산이 되었다고 하는 설에 제법 귀 기울여진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4년, 소요산(逍遙山) 자재암(自在庵)에서 〈금강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 언해본〉이 발견되어 보물 1211호로 지정되었다. 1464년(세조 10)에 발간된 이 금싸라기 같은 귀중본이 한국전쟁 때 불에 타 폐허가 된 이 사찰에 어떻게 남아있었을까? 혹시 설잠 스님이 언해본 불사를 하다가 얻은 이 경전을 남긴 것은 아닐까하는 미련도 든다.

정작 그가 몸을 맡긴 곳은 자연이요, 선문(禪門)이었다. 그러나 선문은 이단이요 시작(詩作)은 한갓 여기(餘技)로만 생각하던 그때의 현실에서 보면, 그가 행한 선문에 몸을 던진 것이나 시를 지음에 집착한 것도 이미 당시 사회의 상도가 아니었다.

설잠 스님이 임종 직전에 지은 ‘아생(我生)’이란 시에는 그의 자재무애한 경지가 엿보인다. 시 중 말미 부분이다.

백년 뒤 나의 무덤에 표할 적에
꿈속에서 죽은 늙은이라 써 주게.
행여 내 마음 아는 이 있다면
천년 뒤에는 속마음도 알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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