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구석구석 불교문화재(264호)

법당에 들어가 절을 올리고 무릎을 꿇고 앉아 부처님을 올려보면, 부처님 머리 위에 지붕이 하나 보인다. 그 지붕은 오색찬란하여 마치 다른 세계를 보는 듯 느껴진다. 부처님이라 특별해서 집 안에 또 다른 집을 짓고 계신 걸까.

전각 안 또 다른 건축물 닫집의 의미

닫집은 전각 안 부처님이 계신 불단 위의 작은 집 모형을 말하며, ‘닫’은 ‘따로’, ‘별도로’라는 말로써 ‘따로 지어 놓은 집’이다. 닫집은 한자로는 당가(唐家)라고 하여 ‘당나라에서 수입한 집’이라는 뜻으로 고대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었다. 닫집은 별도의 건축물이며 불보살의 위덕을 나타내는 장엄구로 극락세계를 상징하여 내원궁(內院宮), 적멸궁(寂滅宮), 칠보궁(七寶宮), 만월궁(滿月宮) 등의 현판이 붙는다.

닫집의 시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는데 무더위와 햇볕을 피하고 왕이나 불보살의 머리 위를 보호함과 동시에, 귀인을 상징하여 권위를 나타내는 일산(日傘)이나 산개(傘蓋)에서 시작되어 점차 건축물의 형태로 변화·발전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것은 중국 돈황 벽화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다.

수산리 벽화고분 서벽 벽화, 5세기 후반. 나들이 할 때 태양을 가리기 위해 부인의 시중이 산개를 들고 있다. 산개는 오늘날의 우산의 형태로 귀족들이 사용하였다.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 “부처님이 도리천궁에서 미간의 백호광을 놓으니 그 빛이 칠보의 대개(大蓋)를 이루어 마야부인의 위를 덮었다.” 라고 하여 ‘대개’가 장막이나 덮개의 형태, 지금의 닫집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또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 “극락의 중앙에는 아미타불이 칠보로 장식된 연화대좌에 앉아 있고 그 위는 보개(寶蓋), 천개(天蓋)로 덮여 있다.”고 나와 있어, 장엄이라는 의미로 산개 혹은 보개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으나, 건축물의 형태인 닫집과는 엄연히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건축물의 형태로 불국토의 궁전 모습을 재현한 닫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고유의 양식이다.

닫집의 다양한 형태

강진 무위사 극락전, 국보 13호. 보개형 닫집으로 지붕 밑으로 아무런 구조물을 설치하지 않고 지붕을 천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닫집은 형태에 따라 보개형(寶蓋形), 운궁형(雲宮形), 보궁형(寶宮形)으로 나눈다. 보개형은 지붕을 천장 속으로 밀어 넣은 형태로 고려 말부터 조선 초의 전각에서 볼 수 있다. 보개형 닫집들은 시기상 고려시대 닫집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으며, 강진 무위사 극락전(1430년), 안동 봉정사 대웅전(15세기), 청양 장곡사 하대웅전, 문경 봉암사 극락전에서 볼 수 있다.

운궁형은 보개형의 닫집에 장식이 추가된 것으로, 천장 안에 설치하는 간결한 구조로 구름ㆍ용ㆍ봉ㆍ비천 등 길상적 의미를 가진 것들로 장식하여 구름 위 궁전을 만든다. 운궁형부터 조선시대 닫집의 전형적인 형태가 시작되었는데, 운궁형 중 일자형은 궁궐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서산 개심사 대웅전, 순천 송광사 국사전, 남양주 봉선사 금당, 안동 개목사 원통전, 순천 선암사 대웅전, 청도 운문사 비로전, 구례 천은사 극락보전, 경산 환성사 대웅전에서 볼 수 있다.

순천 선암사 대웅전, 보물 1311호. 운궁 정자형 닫지븡로 세 단으로 층을 내어 만들었는데 중앙부를 제일 높게 만들었다.

보궁형은 가장 많이 보이는 형태로 공포(包,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짜 맞추어 댄 부재들을 일컫는 말)를 짜 올려 천장과 별도로 설치하여 건물처럼 만든 화려한 형태로 독립된 집 모양을 하고 있다. 보궁형은 일자형ㆍ정자형ㆍ아자형ㆍ중아자형으로 나뉘며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아자형, 13세기), 안동 봉정사 극락전(일자형, 1210년)의 단아한 닫집에서 시작한다. 그리하여 완주 화암사 극락전(아자형, 1605년), 강화 전등사 대웅전(정자형, 1621년), 논산 쌍계사 대웅전(정자형, 1641년), 부산 범어사 대웅전(아자형, 1658년), 익산 숭림사 보광전(아자형, 1682년 중수), 여천 흥국사 대웅전(정자형, 1690년) 등의 점차 화려한 형태로 변하였다.

이러한 닫집들은 조선 후기가 되면서 형식화, 장식화의 경향이 강해지며, 닫집을 꾸미는 장식물 역시 질보다 양에 집중하며 조잡해진다. 특히 숭림사ㆍ쌍계사ㆍ전등사ㆍ범어사는 닫집 미학의 정수로 꼽히는 곳이니 꼭 한 번 가보면 좋을 것 같다.

닫집 미학의 정수, 논산 쌍계사

논산 쌍계사, 보물 408호. 보궁 정자형 닫집으로 극락세계에서 유유자적 노닐고 있는 극락조가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삼세불이 각각의 닫집을 가지고 있다.

논산 쌍계사는 고려 초기에 창건됐는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 아미타부처님, 약사부처님의 삼세불을 모시고 있다. 삼세불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조각승 원오(元悟) 스님의 현존 최초 작품으로 1605년(선조 38년)에 조성되었다. 원래 대웅전은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1738년(영조 14년) 재건하면서 단층으로 축소되었다. 즉 삼세불과 현재의 대웅전은 133년의 차이가 나는 셈이다.

대웅전은 보물 408호로 삼세불이 따로 각각의 보궁형 닫집을 가지고 있다. 닫집에는 중앙의 적멸위락(寂滅爲樂, 모든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는 괴로움이 없어 안락하다)의 열반에 드신 석가모니부처님은 적멸궁(寂滅宮), 좌측의 동방정유리국의 약사부처님이 상주하는 만월궁(滿月宮), 우측의 칠보로 장식된 서방정토에 계신 아미타불은 칠보궁(七寶宮)이라고 쓰인 현판이 붙어 있다. 즉, 닫집이 불국정토의 궁전을 상징하고 재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적멸궁은 만월궁ㆍ칠보궁과는 구분되게 장엄하였으며 적멸궁에는 석가모니부처님 탄생 설화와 관련 있는 아홉 마리의 용으로 장엄하였다. 그리고 대웅전 기둥 중 유난히 윤이 나는 기둥이 하나 있는데, 대웅전 기둥 가운데 유일하게 칡덩굴로 되어있다. 이 칡덩굴 기둥을 안고 소원을 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왕생하며 노인들은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완주 화암사 극락전 닫집 ⓒ문화재청

비천의 아름다움을 담은 화암사 닫집

완주 화암사는 신라시대의 고찰로 알려져 있는데 화암사 중수기에는 고려 1297년(충렬왕 23년)부터 1307년까지 사찰을 중창하였다고 나와 있다. 그중 극락전은 국보 316호로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05년(선조 38년)에 재건된 것으로, 전쟁이 끝난 후 이 산골에 아름다운 닫집을 조성한 것으로 보아 승병들의 집결지나 거대한 힘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하앙식(下昻式, 지붕과 기둥 사이에 끼운 기다란 나무 부재로 하앙의 길이만큼 처마를 길게 뺄 수 있는 백제 양식) 건축구조를 가지고 있어 그 의미가 특별하다.

화암사 극락전의 닫집은 화려하면서도 역동적이다. 특히 비천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비천뿐만 아니라 처마의 유려한 곡선과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것 같은 용의 조화가 살아있는 듯 느껴진다. 부처님 머리 위에서 누가 부처님을 해할까 여의주를 가진 황룡 한 마리가 무서운 기세로 꿈틀거리고 있고 그 사이 연꽃과 오색구름, 극락조가 노닐고 용 좌우로 한 쌍의 비천이 천의를 휘날리며 하늘에서 유희를 즐기고 있다. 제일 앞쪽에 섬세하게 묘사된 비천은 상서로운 극락세계에 들어온 듯한 느낌마저 주며 부처님의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닫집의 불국토를 장엄하는 상징물

닫집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용과 구름, 비천, 극락조, 연꽃이다. 이를 통해 불국토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연꽃은 봉오리 진 것, 약간 핀 것, 만개한 것이 섞여 누구나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상징한다. 용은 주로 구름과 같이 나타나며 불법을 수호하며 부처님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누군가가 부처님을 해하려고 한다면 당장이라도 으르렁거릴 기세로 정면을 향한 모습으로 한 마리만 조각한 것이 일반적이다.

비천과 구름은 이곳이 바로 천상의 극락정토임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상서로운 분위기를 더해 준다. 결국 이러한 모든 조각품들은 닫집이 있는 불전 건물이 곧 부처님의 세계인 불국정토이며 법당에 들어온 모든 불자들이 불국정토를 느끼고 부처님 곁에서 숨 쉬게 하기 위한 것이다.

닫집은 조선시대에 들어 유생들의 반발로 금기시 되거나 일부 지역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져 간소화되기도 하였으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지은 용주사와 같이 조선시대에도 아름답게 장엄한 닫집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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