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263호)

권갑하

시조시인. 계간 <나래시조> 편집주간. 문화컨텐츠학 박사. 농민신문사 출판국장 논설위원 등 역임. 중앙시조 신인상, 제30회 중앙시조대상 등 수상. <세한의 저녁>, <외등의 시간>, <아름다운 공존> 외 시집 다수 출간. 현재 도농협동연수원장.

저는 지금 생애 처음 꽃망울을 터트리는 어린 목련 앞에 서 있습니다. 남쪽의 꽃소식을 들은 지 한 달쯤 된듯하니 꽤나 늦은 꽃피움이지요. 해발 550m의 고지대이다 보니 나무들의 봄맞이도 이렇듯 시절 잊은 주인처럼 느긋하기만 합니다. 백두대간 하늘재 언덕바지에 덜렁 집 한 채를 지어놓고 한 편의 시를 퇴고하듯 조금씩 손질해 온 것이 벌써 여러 해입니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대책 없이 저지른 일이었구나 하는 자책이 들기도 하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렇게 생각한 대로 돌아가기만 하던가요.

그런 탓에 수난을 당하는 것은 나무들입니다. 해마다 자리를 옮기는 바람에 결국 몇 그루는 말라죽고 말았으니까요. 그 속에서도 다행히 한자리를 꿋꿋이 지켜오고 있는 나무가 바로 이 목련입니다. 이 목련 나무라하여 죽을 고비를 겪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닙니다. 첫해 지주대를 세우지 않아 바람에 뿌리가 심하게 흔들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이듬해 초여름에야 겨우 잎을 틔웠으니까요. 그렇게 목숨을 지켜온 목련이 오늘 생애 첫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옛 성현들은 혹한 속에 진향 향기를 발하는 고결한 성품으로 매화를 좋아했다지만 저는 목련을 최고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지간한 후각으로는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은은한 목련 향기는 매화와도 어깨를 겨눌 수 있는 고아한 선비의 기품을 지녔습니다. 순수의 빛깔과 넓고 부드러운 꽃잎, 은은한 암향은 목련을 ‘군자의 꽃’으로 부르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은은히 관조하면 꽃봉오리는 마치 두 손 모아 합장하는 듯한 모습을 지녀 함부로 범치 못할 성스러움까지 느껴집니다. 청초한 이미지는 청상을 고이 지킨 여인의 순결을 간직한 듯 하며 하늘로 솟구친 꽃봉오리는 시심 가득한 필봉을 빼닮았습니다.

어디 그 뿐이던가요. 활짝 벙근 목련은 하늘 연못에 고고히 핀 연꽃과도 같습니다. 진흙탕 세상 속에서 순수를 빚어 올리고 그윽한 향기로 속진의 때를 씻어주는 천상의 꽃이 바로 목련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는 목련의 모습이 조금 흉하지 않냐 하지만 저에겐 혼탁한 세상에서 고고히 진리를 찾고 순수를 꽃피워 올리기 위해 생애를 바친 어느 이름 없는 성현의 남루한 옷자락을 보는 것 같아 숭고하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모천(母川)을 향해 사력을 다해 거슬러 오르는 온몸 다 찢긴 연어의 장렬한 최후를 닮은 듯도 해 때론 온몸이 전율하기까지 합니다.

오늘따라 털이 복슬복슬한 목련 꽃봉오리가 쓰다듬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습니다. 오늘 하루는 온전히 이 첫 꽃피움을 맞는 어린 목련을 위해 소비하고 싶습니다. 사람의 눈길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하는 외진 산속에서 자라는 나무지만 그 길고 긴 외로움과 적막함을 이겨내고 오늘 하늘을 향해 꽃봉오리를 들어 올리는 모습은 참으로 대견스럽습니다. 누가 이토록 어린 나무에게 장엄한 감동을 가르쳐 준 것일까요.

더욱 눈물이 나는 것은 주중이 아닌 저와 함께 할 수 있는 주말을 맞아 벙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 혼자 피기란 목련도 외로웠던 모양입니다. 제가 올 수 없는 주중에 피었다 지고 말았다면 저 또한 오랜 슬픔으로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기쁨과 즐거움, 고통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사랑이야말로 진정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새삼 인연의 소중함이 가슴 가득 밀려오는군요.

“매일 아침 산책길에 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 가니 저도 이 집 주인입니다.”

산책을 나온 비구니 스님의 솔바람처럼 맑은 목소리가 고즈넉한 하늘재 아침의 작은 소란을 부드럽게 어루만져 줍니다.

“올해 처음으로 꽃을 피웠어요. 그것도 딱 한 송이를….”

마음과 달리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다 그만 싱거운 대답을 하고 맙니다.

“어떻게 이리 맑을 수가….”

화두처럼 한마디 던지시곤 스님은 이내 자리를 뜹니다. 깊은 산속에서 이제 막 첫 꽃망울을 터트린 한 송이의 하얀 목련. 그러고 보니 스님의 미소가 목련의 순수처럼 해맑습니다.

누구나 태어날 때는 저렇듯 순백하고 아침 이슬처럼 영롱한 빛깔로 반짝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면서 다양한 빛깔로 물이 들고 속진의 때가 묻기도 하지요. 어쩌면 삶이란 순수의 바탕에 때를 입히는 그런 업의 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갓 피어난 목련의 저 때 묻지 않은 빛깔처럼, 우리네 삶도 순수의 마음을 오래오래 간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은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 속에서 향기롭게 피어난다 했던가요. 언젠가 이 어린 목련도 수만 송이는 족히 달고도 끄떡 않는 거목으로 우뚝 자라겠지요. 인적 드문 하늘재 바람 찬 고갯마루에 어린 목련 한 그루 오늘 아침 환히 등불 밝힙니다. 어린 목련과 함께 할 하얀 달이 해맑은 스님의 얼굴로 중천에 환히 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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