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에 등불이 되어 준 초발심(263호)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정토회 내의 환경단체인 <에코붓다>의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2001년 9·11사건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JTS카불지원팀장’으로 4년간 국제개발구호활동을 펼쳤고, 한국으로 돌아와 정토회 지원 단체인 ‘평화재단’에서 5년간 활동했다. 현재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국민농업포럼 이사, 녹색교육센터 이사 등을 맡고 있다.

 

불교를 접한 기이한 인연

내가 처음 불교를 접한 것은 정말 기이한 인연(奇緣)이었다. 나는 학생운동으로 1984년도에 7~8개월 정도 수배 중이었다. 당시 정말 힘겹게 도피생활을 하다가 한 후배로부터 절 생활을 소개 받았다. 처음에는 산속 아늑한 곳에서 도인처럼 유유자적하면서 지낼 것이라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나는 사실 중ㆍ고등학교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고, 여러 임원을 두루 역임한 이른바 ‘교회오빠’의 전형이었다. 대학에 들어와 교회 다니길 그만두었지만, 야학하면서 건물을 빌리기 위해 교회를 다녀야 했고, 군대에서는 신학잡지들을 꽤 열심히 참독하고 있어 기독교사상이나 문화에 대해서는 두루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더욱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에서 새롭게 배울게 없으며, 그저 사회운동을 위한 외피로서만이 유용할 뿐 아닌가 하는 오만한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소개 받은 사찰이 알고 보니 내가 상상한 산중에 깊이 있는 아름다운 절이 아니라 봉천동의 주택가에 있는 절이었다. 대단히 실망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절에는 절하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고 하여 기도를 하고 있어야 한다고 해서 어리버리한 생각으로 승낙하고 말았다. 내 인생을 바꾼 결정 중에 이 순간이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 시작한 결정이었다.

그 절은 새벽과 사시, 오후, 저녁에 4분 정근을 하고 능엄주를 하는 절이었다. 나는 꼼짝없이 한 번에 3~400배 절을 하여 하루에 약 1000배를 넘게 절을 하게 되었다. 멋모르고 시작된 기도 도중에 후회막급 했지만, 당시 도피생활에 지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시에 그곳은 정토회를 함께 만든 법륜 스님(당시 최석호 법사)을 위시한 나와 같은 활동을 하는 동년배의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불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기도하면서 법륜 스님에게는 법문을 간간히 들으면서 감동했지만 종교자체에 대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고 시답지 않게 생각했던 나에겐 그저 별 무관심한 내용이었다.

 

해인사 3,000배의 인연과보

그러던 중 함께 하던 도반들이 해인사로 청소년수련대회를 간다고 해서 따라갔다. 700여 명의 중ㆍ고등학생들이 참여한 수련대회였는데 사전교사 연수말미에 담당교사가 부족하다고 나에게 고 2~3학년 담임을 맡아달라고 했다.

이것도 내 삶의 선택지를 굳건히 하는 결정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수련 마지막 날 3,000배 기도를 하는 시간이었는데, 불교에 목숨 걸 생각도 없었지만 담임이라는 책임감으로 할 수 없이 흉내 정도를 내다 포기하고 들어가 자려고 할 때마다 법륜 스님이 분심을 유발하는 이상한(?) 법문으로 포기하지 못하게 만드는 바람에 결국 7시간에 걸쳐 기도를 끝냈다. 나는 속은 듯 억울한 마음이었는데 잠은 안 재우고 다시 어느 암자에 올라간다고 해서 결국 할 수 없이 따라 올라갔다. 한 암자에 왠 노스님이 나오셔서 법문을 하시는 것을 보고 나는 아랑곳없다는 듯 끝의 절 기둥에 의지하여 주저앉아 잠을 잤다. 알고 보니 그 노스님이 성철 스님이었던 것이다.

이후 이들과 헤어져 다시 수배생활을 하다가 구속되어 1년 여 수감생활을 하다가 1985년에 나왔다. 불교인연은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몇 개월 뒤 우연히 거리에서 당시 함께했던 박수일 보수법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이 또 세 번째 인연이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법륜 스님을 비롯한 도반들은 큰 마음을 내서 봉천동 절에서 나와 비원 앞에 5평 남짓한 좁은 댄스홀을 빌려 법당을 만들어 다양한 불교교육과 사회활동에 매진하고 있었다.

1년 전에 어깨 넘어 법문을 듣고 예사롭지 않았던 감동을 품고 있었던 터였는데, 마침 대학생들의 수련과 책 만드는 일을 거들어달라는 제안을 받자 나는 그때부터 내 힘으로 불교공부를 하고 싶은 발심이 생겨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 대학생들에게 하는 불교 강의를 통해, 그리고 <실천적 불교사상>을 외부인의 시각으로 수정하고 교열하면서 많은 토론을 하게 되었고 나 또한 큰 불교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후 <반야심경>, <금강경>을 공부하고 불교공부를 하면서 큰 사상적인 충격을 받게 되었고, 불교 가르침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하면서 관념적 오만함에 넘쳤던 나에게, 나의 신념을 다시 근본부터 돌아보게 만들었고 한편으로 자신을 내던지고 사회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던지며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금강경>은 ‘던지겠다는 그 생각마저 끊어야 진정한 운동가가 된다.’는 큰 가르침을 주었다. 이뿐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고 운동적 고뇌를 깊이 하는 시간이었으며, 삶의 큰 동력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법륜 스님을 위시한 도반들의 팀원도 아주 좋았다. 저마다 자기 신념과 주장성이 강한 사람들이어서 항상 치열한 논쟁을 해야 했는데, 스님은 이 대책 없는 애물단지들을 정말 잘 통합하는 능력과 지혜가 있었던 분이었다. 결국 3년 정도 활동을 하면서 이 정도의 도반들이라면 평생을 함께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본격적으로 불교공부를 하고 수행과 삶을 함께 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88년 시작한 정토회에 함께한 도반들

정토회 법사단과 지역 순회활동 중에.

1988년 정토회를 공식적으로 출범하면서 나는 한국불교사회교육원의 실무책임을 맡아 불교청년들을 모아 불교와 사회활동을 해왔다. 그러다 1990년 사회주의 붕괴 이후 급격한 국제사회의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는 3년간 활동을 중단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선지식을 찾기도 하고 자연과학철학과 동양학, 생태주의, 협동조합, 대안공동체 등을 탐구하면서 폐문정진(閉門精進)의 시간을 가졌다.

그 이후 1993년부터 정토회는 ‘개인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를 동시에 실행’ 하는 취지로 1만 일 결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1980년대 종단개혁에 참여해 오면서 결사 이후 종단변화와 더불어 한켠에서 불교적수행과 삶을 올곧게 세우며 대안적 삶, 사회적 실천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대로 사는 수행공동체의 모델을 만들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1만 일이면 30년이다. 그러나 그것을 매 1천 일 단위로 나누어 매 1천 일(3년) 마다 ‘첫마음 제로포인트(Zero Point)’에서 모든 활동과 직책을 재검토하여 활동과 인력을 변경한다. 또 1천 일을 다시 1백 일 단위로 결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전부 모여, 매일 아침 5시에 기도명상하는 수행과 매일 1천원 보시하는 생활, 의식적인 봉사활동을 전개하는 신행을 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한다. 그리고 정토회는 100여 명(서울 40명ㆍ문경 60명)이 함께 수행하면서 실천하며 사는 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동안 나는 환경운동을 중심으로 사회활동을 해왔고, 2000년에는 정토회 보직순환의 원칙에 따라 공양주 생활을 하다가, 2001년 내부의 개발구호단체인 한국JTS의 일원으로 전쟁이 끝난 아프가니스탄에 4년간 긴급구호와 마을개발활동을 했으며, 돌아와 5년여 남북문제의 해결을 위한 평화재단에서 활동했다. 그래서 나에겐 환경·국제개발·통일·공동체 등의 키워드가 중요한 관심영역이다.

나의 초발심을 도와주는 것은 50%는 도반의 힘이다. 그리고 40%는 매 100일마다 있는 100일기도 회향식 및 입재식이다. 그리고 나의 의지가 10% 정도 될까? 도반과 공동체가 항상 풀어진 매듭을 조여 주며 나의 삶을 원점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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