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함께 읽는 부처님 말씀 (262호)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경험한다는 것이고,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살아 있기에 우리는 경험을 하고, 경험한 내용을 재우쳐 압니다. 생명이 없는 돌과 물과 구름과 바람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경험을 하지 못하고, 생명이 있긴 하지만 인식 능력이 사람 차원에 미치지 못하는 동물들은 경험을 하기는 하지만 경험한 내용을 재우쳐 알지 못합니다.

다시,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중생(衆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중생이라는 글자를 풀면 무리지어 사는 생명체라는 뜻이 됩니다. 모든 생명체는 무리를 지어 삽니다. 심지어는 나무와 풀들조차도, 동물들조차도 무리를 지어 삽니다.

무리를 지어 산다는 것은 남들과 관계를 맺으며 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와 관계를 맺으며 사는 걸까요. 가장 먼저 사람은 어머니·아버지와 관계를 맺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음으로써 삶이 시작되며, 부모와 자식 간은 맨 처음 형성되는 인간관계입니다.

오래 전, 큰아들이 어렸을 때 일일교사로 초등학생들을 한 시간 가르쳐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아이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써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생명’, 또는 ‘목숨’이라고 적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열 살밖에 안되는 아이들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 그냥 생명이 아니라 경험을 인식할 줄 아는 높은 차원의 생명으로 지금 살아 있습니다. 비록 언젠가는 소멸해버릴 테지만 오히려 결국에는 소멸해버릴 것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가 생명으로 살아 있다는 사실이 더욱 소중하다고 저는 느낍니다.

이렇듯 소중한 생명은 누가 준 것일까요. 두말할 것도 없이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은 부모님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공부하다보면 내가 생명을 갖게 된 것은 전생의 업 때문이라는 법문을 듣게 됩니다. 많은 불교 스승들이 부모님의 몸을 빌어서 전생의 내 업력에 의해 내가 태어났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지만 당연하게도 나 혼자 힘만으로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인연(因緣)에 의해 내가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인연은 인(因)이라는 말과 연(緣)이라는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인은 주된 원인을 의미하고, 연은 주된 원인을 돕는 보조적인 원인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곡식의 씨앗은 인이고, 곡식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땅·물·거름 등은 연입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볼 때 나의 업은 나의 생명을 잉태한 인이고, 부모님은 그 생명을 있게 하신 연입니다.

씨앗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땅과 물과 거름이 없으면 싹을 틔우지도 자라지도 열매를 맺지도 못합니다. 이렇듯 아무리 좋은 인이라 할지라도 그를 도와주는 좋은 연이 함께함으로써만 훌륭한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서 부모님이라는 연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먼저이자 가장 귀중한 연입니다.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한 생명이 나에게 있게 한 것은 나 자신의 업력을 제하면 오직 부모님뿐이고, 따라서 부모님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하신 고맙고도 고마운 분입니다.

마치 어머니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목숨 바쳐 사랑하듯

- 〈자비경〉 중에서

 

그렇습니다. 어머니는, 그리고 아버지는 목숨을 바쳐 자식인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부모은중경〉은 그런 부모님의 은혜를 다음 열 가지로 설하고 있습니다.

 

① 가슴에 품고 지켜주신 은혜(懷耽守護恩)

② 출산의 두려움을 받아들이신 은혜(臨産受苦恩)

③ 자식 얻은 기쁨으로 걱정을 잊으신 은혜(生子忘憂恩)

④ 좋은 것을 가려 먹여주신 은혜(咽苦吐甘恩)

⑤ 진자리 마른자리를 가려 뉘신 은혜(廻乾就濕恩)

⑥ 온몸으로 젖 먹여서 기르신 은혜(乳哺養育思)

⑦ 온갖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洗濁不淨恩)

⑧ 먼 길 떠난 자식 걱정해주신 은혜(遠行憶念恩)

⑨ 자식을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신 은혜(爲造惡業恩)

⑩ 끝까지 사랑하고 또 사랑하신 은혜(究意憐愍恩)

 

이 십대은(十大恩)을 우리말로 간결하게 풀어서 양주동 선생이 ‘어머니 은혜’라는 노랫말을 지었고, 그 노랫말에 이홍렬 선생이 곡을 붙였습니다. 어버이날이 오면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가 이 노래를 부릅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 모든 사람들은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가슴으로부터 목울대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게 하는 데에는 ‘어머니’라는 한 마디 말로 충분합니다. 이 말 한 마디가 지닌 감동의 무게, 진실의 무게는 세상 누구에게나, 세상 어느 곳에서나 결정적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언제까지나 부모님과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나이가 드는 동안 사람은 부모 아닌 새로운 연을 만나게 됩니다. 그 연이 형제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애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 연에는 형제·친구가 아닌 경쟁자, 애인이 아닌 적이나 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해와 사랑, 배려와 친절로만 맺어지지는 않습니다. 이해받고 싶지만 오해를 받고, 사랑받고 싶은데 미움을 받으며, 배려 받고 싶지만 무시 받고, 친절한 응접을 받고 싶지만 사납게 배척당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 사람살이입니다.

그런 상황을 당하면 우리는 상처를 받습니다. 가슴은 쓰리고, 마음은 아픕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반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꾹 눌러 참아야만 하는 때도 많습니다. 상처받을 때마다 화를 내고 반격한다면 그의 삶은 폐허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상처를 입고도 꾹 눌러 참곤 합니다.

그러나 참음이 최종적인 답은 아닙니다. 억울함을 참기만 하면 마음속에 쌓여 마음병이 됩니다. 그러니 어찌할까요. 그렇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어머니(아버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나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줄 사람인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나의 하소연을 들어주시고, 내 아픔에 공감해주시고, 살갑게 위로해주십니다. 그럼으로써 나의 마음병은 낳게 되며, 나는 건강한 마음으로 새로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존심 때문에, 또는 걱정을 끼칠까 두려워서 나의 마음병을 부모님께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부모님 또한 같은 이유 때문에 자식에게 자신의 마음병을 고백하지 못하실 때가 많습니다. 더 나쁜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부모다운 사랑을 베풀지 않는 사람도 있고,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자식다운 효도를 바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겹으로 된 황금 팔찌는 소리를 내고,

두 사람이 함께 있으면 다툼이 일어난다.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분쟁을 미리감치 알아,

그대여, 무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 〈숫타니파타〉 중에서

 

그렇습니다. 설사 가족일지라도 사람 사이가 항상 좋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혼자서 가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가족을 버리고 출가를 하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아니면 숲속에 들어가 일체의 인간 관계를 끊고 살아가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혼자서 간다는 것은 나 자신의 본마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꿔 말해서 우리는 남들과 좋은 관계를 맺기에 앞서 나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마음을 잘 다루고, 보살피고, 격려하고, 가꿔야만 합니다. 탐진치를 덜어내어 무탐·무진·무치의 방향으로, 일체의 근심걱정이 붙지 않는 깨달음의 방향, 불성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베풀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고,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볼 줄 아는 불제자가 되는 것, 그것이 나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훌륭한 불제자는 그런 수행을 통해 마음이 너그러워진 상태로 가족에게 다가갑니다. 부모님께 다가가 당신의 아픔에 귀 기울여 드리고, 아내(남편)와 자식에게 다가가 그들의 아픔에 귀 기울여 줍니다. 더 나아가 형제에게, 친구에게, 가능하다면 불편한 관계인 사람에게도 다가갑니다. 이렇듯 자신을 먼저 너그럽게 변화시킨 다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연(緣)에게 다가가 그를 이해하고 격려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불법을 소중히 여기고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고귀한 불제자입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