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밖의 선지식을 찾아서 (262호)

따뜻한 눈길, 그리고 끝없는 관심으로
평생을 대중불사에 헌신하다

아나운서 이계진

이계진 거사는 1946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나왔다. 군복무중이던 1973년에 KBS 1기 아나운서 공채에 합격, 군복무를 마친 다음날부터 30년을 푸근한 방송 진행자로 대중 곁에 있었다. ‘11시에 만납시다’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 ‘연예가 중계’ ‘한밤의 TV연예’ ‘체험 삶의 현장’ ‘TV내무반 신고합니다’ 등이 이 거사가 진행한 대표 프로그램이다. 2004년부터 2010년까지는 17대·18대 국회의원으로 정치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 경기도 광주에서 밭을 일구며 산다. 예의 부지런함으로 소설 ‘솔베이지의 노래’를 비롯해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 ‘이계진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주말농부 이계진의 산촌일기’ 등의 수필집을 펴냈다.

4년째 국군FM에서 생방송을 진행 중인 이계진 거사를 만나러 용산으로 향했다. 우리가 만난 2층 찻집은 방송 틈틈이 비는 시간을 활용해 지난해에만 두 권의 책을 집필했다는, 이 거사의 창작 산실이었다.

이계진 거사는 20여 년을 방송국 아나운서로 근무했다. 이후 프리랜서 진행자로 활동한 뒤 2003년에 방송을 접었고, 한때 ‘의원님’으로 의정활동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사람들은 진행자·MC·사회자·방송인 등 그 모든 이름을 뒤로 한 채 이 거사를 ‘아나운서’라 부른다. 이계진 아나운서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이유는 그의 ‘반듯함’ 때문이리라. 포근한 음색. 아름다운 우리말을 온전히 구사하는 진행자가 이계진 아나운서 아니던가. 이 거사는 지금도 사전을 곁에 두고 우리말의 고저장단을 확인한다.

요즘은 국방FM(96.7㎒)에서 정책 시사프로그램 ‘국민과 함께 국군과 함께’(월-금 오후 4시~5시 40분, 토 오후 4시~6시)를 진행 중이다. 2013년 4월에 맡은 이 프로그램은 시시각각 변모하는 안보환경에서부터, 신세대 장병과 노병에 이르는 이들을 위한 정보까지 다양한 시사정보를 전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이 방송의 모토는 ‘인정이 배어있는, 사람냄새 나는 방송’이다. 목소리 높여가며 상대를 비하하고 공격하는 종편의 무수한 시사 프로그램과 차별화되는 한 중심에 이계진 아나운서가 있다. 출연자를 주인공으로 만들면서 노련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힘을 지닌 그이 덕에 이 방송을 들으며 감동과 여유를 누릴 수 있어 좋다는 청취자의 반응도 줄을 잇는다.

“방송은 늘 어렵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크죠.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길 들을 순 없으니까요. 방송 잘 듣고 있다는 인사를 종종 받으니, 그게 보람입니다.”

안하면 안했지, ‘대충’이란 그이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반듯하다’는 이미지는 이런 철저한 자기관리에서부터 나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애비는 돈 주고 돌을 샀다'고 모친께서 말씀하실 정도로 세상 물정 모르고 산 땅에서 농사 흉내낸 지도 스무 해가 넘었다. 농사 도반들과 함께.

대충이라곤 모르는 이계진 거사가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아니, 그이는 농사를 짓는다거나, 농부라는 표현이 걸맞지 않는다고 손사레를 친다. 그저 ‘농사를 흉내 낸다’고 말한다. 오직 땀 흘려 농사일로 사는 분들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는 게 이유다. 그러나 경운기로 밭을 갈고, 다목적 운반기로 수확한 감자와 산에서 정리한 땔감 따위를 싣고 다니고 있으니 기실 그의 일 양은 엄청나다. 자연히 농부로 사는 시간도 많다.

‘농사 흉내를 낸 지도’ 스무 해가 넘었다. 그의 모친께서 매일 돌을 골라내며 ‘애비는 돈 주고 돌을 샀다’고 했을 만큼 세상 물정 모르고 구한 땅이다. 법정 스님이 생전에 챙겨주셨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비롯해 타샤튜더의 〈타샤의 정원〉이나 헤르만 헤세의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같은 책들도 그가 산촌 행을 결행하는 데에 거름이 되어 주었다. 적막한 산골에 집을 짓고 가꾸다보니 이젠 뭐든 고칠 줄 아는 ‘맥가이버’로 통한다. 집 뒤 자그마한 산에게 ‘화계산’이라 작명도 했다. 공식지도에는 등장하지 않는 산 이름이다.

“아침에 6시 무렵에 일어납니다. 일하다 다칠까봐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뒤 따뜻한 물 한 잔을 마시고 일을 시작하죠. 노동이 아닌, 운동이 되게끔 신경을 씁니다. 한 동작을 오래 하지 않고 왼손 오른손 바꿔가며 일합니다. 또 20분 이상 길어지면 다른 걸로 바꿔하지요. 여름이면 오이섶 만들기에 풀베기 따위를 하고 가을이면 낙엽 쓸기도 큰 일거립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하느라 왔다갔다 하다보면 땀이 촉촉이 나요. 그렇게 아침운동을 한 뒤 식사하고, 차 한 잔 하곤 햇살이 더 뜨거워지기 전까지 다시 일을 하지요.”

1997년 이계진 거사의 경기도 광주 자택에서 법정 스님과 함께. 그 외 정채봉·윤청광 등 '맑고 향기롭게' 회원들이다.

농사일에도 그이는 ‘적절히’ 중도의 정신을 잘 활용하고 있었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즐기면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해마다 20여 가지의 농작물을 돌본다. 물론 다 잘 자라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지를 매만지면서 또, 쑥쑥 잘 자라는 작물을 통해서 그이는 매일 매일을 공부하며 산다.

오후가 되면 작업복에서 양복으로 갈아입고 산골을 나와 서울로 떠난다. 생방송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 8시 무렵이면 다시 농사일들을 한 바퀴 둘러본다. 즐기니까 가능한 일이다.

“밤에 누워있으면, 내일은 감자 캐야지, 며칠 뒤면 추워진다니 배추 덮어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행복해요. 힘든 건 사실이지만, 생명체를 다루는 일인 만큼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죠. 돈으로 치면 얼마 안 되지만, 내가 기른 생명에 대한 책임감, 연민… 그런게 있어요. 해야 할 일 다 해놓고, 밤에 차 한 잔 마실 때도 행복하고 좋아요. 사람 할 도리를 다 한 거 같아서죠. 그런 재미가 쏠쏠합니다.”

도심에서 30년을 살다가 오지의 산골 농부로 살다보니 ‘하나를 버려야 하나를 얻는다’는 진리도 익혔다. 그래서 퇴임 후에 귀향, 귀농하려는 이웃들에게 그이는 적극 권한다. 불편하고 어려운 점도 있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산다면 좋은 점이 더 많을 거라고. 하기사, 청산에 사는 복을 누리는데, 누군들 그이처럼 대자연 앞에 다 내려놓고 버리고 겸허해지지 않을 수 있으랴.

법정 스님이 생전에 챙겨주셨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은 그의 산촌행에 영향을 주었다. 미국 메사추세츠 월든 호숫가에서 아내와 함께.

어머니 등에 업혀 절에 다녔다. 원천석 선생의 묘소 옆에 있던 석경사라는 절이었다. 어머니 등에서 바라본 울긋불긋한 단청이 어린마음에 자극적이라 상당히 싫었던 기억이 잔상처럼 남아 있다. 치악산까지 교통이 불편하다 보니 자주 다니진 못했어도 한평생을 깊은 불심으로 사신 어머님을 보고 배우며 자랐다. 결혼하면서 신심 깊은 아내를 만났다. 아내를 따라 부처님의 좋은 말씀을 펼쳐 읽고, 스님들의 좋은 법문에 귀 기울이며 생활하게 됐다.

“천태종 스님이 주신 양장본 〈법화경〉은 매일 아침 일어나 삼배하고 읽었어요. 읽다가 일하러 가기도 하고, 한 장 한 장 시간 날 때마다 읽다 보니 세 번을 완독했지요. 〈열반경〉을 읽을 땐 열반 장면에서 하염없이 울었어요. 왜 그렇게 눈물이 쏟아지던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불교를 만난 건 참 다행스러워요. 특히 법정 스님과의 인연은 제 생애에 큰 행운이었죠. 저는 법정 스님의 책이 현대식 경전이라고 생각해요. 쉽게 풀어쓴 경전이죠. 대중적인 포교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우리 내외는 송광사 불일암에서 수계를 받았어요. 제겐 향적(香積)이란 법명을 주셨죠. 향기를 많이 쌓으라는 가르침으로 여기고 노력 중입니다.”

병상에서 장례 준비가 잘 되고 있는가를 물으셨던 스님, 평소 입던 무명옷에 관도 짜지 말고 즐겨 사용하던 대나무 평상 위에 몸을 올려 다비하라 하신 법정 스님이셨다. 그런 은사님을 통해 이계진 거사는 참으로 많은 걸 배우고 익혔다. 이젠 ‘그런대로 살다가 두려움 없이 간다’고 마음먹었다. 천 년 만 년 사는 세상이 아닐진대, 언제 세상 떠날지 모른다는 현실을 인식하면 더 열심히 살 수 있다고 여긴다. 적어도 사는 동안 이 거사는 아등바등 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여의도의 방송국에서 생활한 뒤, 여의도의 국회로 입성을 했으니, 이계진 거사는 여의도와는 남다른 인연을 지녔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재선되고, 그리고 사표를 낸 뒤 강원도지사에 도전했던 2010년까지 ‘국회의원’으로 살았다. 정치인으로 살았던 시간을 두고 이 거사는 ‘특이한 삶을 경험했던 시기’라고 표현한다.

“선거 유세 중이었는데 법정 스님께서 갑자기 사무실에 오셨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깜짝 놀랐죠. 그 와중에 기자들이 행여 볼까 봐 급히 가시게 했어요. 존경하는 스님을 지켜드리고 싶었어요. 유세 중에 스승을 파는 못난 제자가 되고 싶지 않았죠. 사무실에 오신 스님을 뵙는데 눈물이 어찌나 쏟아지던지, 스님 앞에서 막 울었습니다.

스님이 열반 하신 뒤에 법정 스님을 모시던 스님께 들은 얘긴데요. 선거기간 중에 법정 스님께서 영동 고속도로를 지나면서 창문을 열더니 ‘이계진이 당선돼라~’고 소리 치셨다고 해요. 어찌나 고마운지 눈시울이 뜨거워졌어요. 스님께선 그렇게 은근한 정을 지닌 분이셨어요.”

정치하는 동안 한시도 잊지 않았던 건, 부처님 법이었다.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적당히 잡아떼기도 해야 하는 게 ‘정치적’인 삶이겠지만, 이 거사는 “나를 아는 이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정치를 하자”는 발원을 했다. 발원을 하지 않았더라도 천상 ‘반듯함’으로 살아왔기에 삿된 길은 결단코 선택하지 않았으리라.

이계진 거사는 의정생활 중에 KBS 영구중립화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여긴다. 그러나 국어기본법과 한글날 국경일화 법안을 주도해서 통과시킨 건 보람으로 삼는다.

도지사 선거 개표 날, 더 이상 개표를 해도 이길 수 없겠다는 지점에서 이 거사는 춘천의 지지자들에게 인사를 한 뒤 원주로 내려왔다. 함께 고생한 이들에게 두루 인사를 마치곤, 곧바로 광주 집으로 향했다. 마침 4월 농사철이었다. 그날부터 경운기에 시동을 걸곤 밭을 갈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벽암록〉의 ‘득지본유 실지본무(得之本有 失之本無)’라는 한구절을 마음에 새겼다. ‘얻었다 한들 본래 있었던 것이며, 잃었다 한들 본래 없던 것’이라는 가르침에 의지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자신을 추스를 수 있었다.

이계진 거사에겐 특별한 경력이 하나 있다. 1990년에 출간한 수필집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이란 책으로 ‘베스트셀러’ 저자가 된 것이다. 이 책은 대형서점에서 한 달 넘도록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1993년까지 줄곧 꾸준히 잘 팔린 스테디셀러이기도 하다. 방송현장의 실수와 사건 사고를 이계진 아나운서답게 꼼꼼하게 정리한 이 책은 삶에 지친 이웃들에게 배꼽 빠지도록 큰 웃음을 선사하며 방송의 역할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는,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이계진 거사에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일상인 셈이다. 손주들을 보고 느끼면서 쓴 책이 ‘똥꼬 할아버지와 장미꽃 손자’이고, 잡지에 산골 생활을 연재한 뒤 ‘주말농부 이계진의 산촌일기’를 펴냈다. 이렇게 틈틈이 집필해서 쌓여가는 책이 10권을 넘었다.

지난해에는 늘 하염없는 사랑을 베풀어준 세분 아나운서 선배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책을 냈다. 이규항·이장우·김승한 아나운서는 선배지만, 이계진 거사에겐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교훈을 가르쳐준 스승이기도 했다.

“여든이 다 되신 분들이에요. 어느 날 약주 드시는데 쇠약해지신 데다가 좋은 말씀을 듣다보니, 생전에 이분들을 위해 헌정의 책을 내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세 분을 1년 1개월 동안 약주를 대접해가며 휴대전화 녹음기를 켜놓고 대화를 나눴죠. 어떻게 그분들이 초창기 아나운서로서 살아오셨는지, 생생한 역사를 선배 한 분과 정리했어요. 가족친지 모시고 여법한 출판기념회까지 해드렸지요.”

방송과 술과 함께한 낭만의 세월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을 두고 이계진 거사는 ‘그저 보은의 책’이라 했다. 존경하는 선배께 인간적인 도리를 했을 뿐이라고 겸양해 했지만, 세상에 이런 정성스러움으로 선배들에게 책을 헌정할 후배들이 얼마나 될까.

이 거사는 군대에서 에릭 시걸의 ‘러브스토리’를 읽고 충격을 받는다. 성이 문란하다고 알려진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순수한 사랑이야기가 사람들을 감동시켰을까 궁금했다. 혼란의 시대에 나도 이토록 아름다운 소설을 써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세월이 흐른 2003년에 마침내 소설 ‘솔베이지의 노래’로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다.

“2002년 봄에 불일암으로 법정 스님을 찾아뵈었어요. 제가 사랑에 관한 유치하고 통속적인 소설을 썼다고 전했더니, ‘처사가요?’라고 반응 하시더군요. 스님께선 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만 주십사 부탁을 드렸죠. 지필을 꺼내시더니 ‘사랑은 따뜻한 눈길, 그리고 끝없는 관심’이라고 쓰셨습니다.”

이계진 거사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미처 알지 못했던, 따사롭기 이를 데 없던 법정 스님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어쩌면 스님은 그렇게 따뜻한 눈길과 끝없는 관심으로 세상을 향해 부처님 가르침을 들려주셨던 분이 아니었던가. 그런 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가르침 받을 수 있었던 이계진 거사는 스스로의 말마따나 ‘복 많은’ 인물이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하면 이런 반듯한 유발상좌를 둔 법정 스님도 ‘행복한’ 분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이 거사는 스님의 말씀을 화두삼아 여러 달 걸려 퇴고한 끝에 2003년에 소설을 출간했다. 주위에 알린 일도 없는데 반응들이 몰려왔다. 평소 독서광인 단골 이발소의 직원은 “선생님 소설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보다 더 좋던데요.”라고 인사를 했다. 혹자는 흥미롭게 읽다보니 ‘조간신문이 마당에 투욱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라’고 했다. 이처럼 독자들이 밤을 지새며 읽는 소설을 발표했던 이계진 거사는 기회가 닿는다면 사회정의를 이야기하는 소설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가슴에 품은 뜻은 반듯하게 구현하고야 마는 그이인 만큼, 앞으로 또다른 소설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그이에게 버킷리스트를 물었다. 법정 스님의 정신을 전하는 모임을 갖고 싶다고 했다. 산골 집에서 시작할 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나무 그늘 아래에서 스님의 저서를 함께 읽고, 재능기부 형태로 관련자를 초대해서 담소도 나누고, 차분하게 스님의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하는 모임 말이다. 그 모임이 펼쳐지는 날이면, 후박나무 아래에서 책읽기를 즐기셨던 법정 스님께서도 살짝 들르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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