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태종 개창 920주년 특집
중국 천태종의 개조(開祖) 천태 지자(天台智者, 538~597) 대사가 금릉(金陵) 와관사(瓦官寺)에서 처음으로 〈법화현의(法華玄義)〉를 개강한 것은 567년도의 일이다. 올해로부터 꼭 1,450년 전의 불사로서 천태종이 개창된 뜻 깊은 법회이다.
그리고 다시 530년이 지난 1097년, 의천 대각국사가 개성 국청사에서 해동천태종을 창종하며 법화삼매를 강설, 백두대간에 법화꽃을 피웠다. 이후 고려불교에서 3대 종단의 하나로 불타의 가르침을 두루 펼치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불교 탄압의 험난함 속에서 연명하여 오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950년, 삼매를 체인(體印)한 상월대조사의 현현으로 이 땅에는 다시 법화천태의 향기가 가득 퍼져나갔다. 대각국사 의천 스님과 상월 원각대조사의 자비 행각이 이룬 그 역사와, 인연의 복덕을 사진과 함께 살펴본다.
대각국사, 천태종을 세우시다
대각국사 의천 스님(1055~1101)은 고려 11대왕 문종의 넷째 왕자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후(煦)이고, 11세 때 스스로 원하여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스승으로 개경의 영통사(靈通寺)에서 출가하였다. 13세 때 국왕으로부터 우세승통(祐世僧通)의 호를 받았으며 경덕국사가 입적한 후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교학을 강론하였다.
이후 30세 무렵까지 의천 스님은 화엄교관을 비롯하여 대승과 소승의 삼장(三藏)은 물론 유학과 제자백가의 사상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영통사 대각국사비명(靈通寺大覺國師碑銘)’은 이런 의천 스님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그 탁월함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다.
현수 교관(賢首敎觀)으로부터 돈점(頓漸)과 대소승의 경률론에 따른 장소(章疏)에 이르기까지 탐색하 지 않음이 없었다. 또한 여력(餘力)으로 외학(外學)에 대해서도 견문이 넓고 깊어서 중니(仲尼)와 노담 (老聃)의 서적과 제자백가의 집록(集錄) 등 모든 사서(史書)까지도 일찍부터 그 정화(菁華)함을 완미 (玩味)하여 그 근저를 찾아냈으므로, 강론이 종횡으로 달리어 물 흐르듯이 끝이 없었다.
또한 의천 스님은 일찍부터 법화천태의 불법이 중요함을 깊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뒷날 송나라로 가기에 앞서 모후인 인예왕후(仁睿王后)와 후일 숙종이 된 친형 계림공(鷄林公)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태삼관(天台三觀)은 최상진승(最上眞乘)이나 이 땅에는 아직 종문(宗門)을 세우지 못했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기에 신이 은밀히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
이에 태후가 매우 기뻐하였고, 계림공 역시 천태를 외호(外護)할 것을 발원하였다.
오랫동안 구법의 외유(外遊)를 간절하게 원해온 의천 스님의 뜻은 당시의 국제사정 등으로 허락을 받지 못하였으나, 마침내 1085년 몰래 상선을 얻어 타고 송나라로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송에서 14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그는 화엄종·천태종·법상종·계율종·선종 등 여러 종파의 고승 등 50여 명을 만나고, 인도 출신 길상삼장(吉祥三藏)과 만나 산스크리트 불경에 대한 이해를 터득했다.
또 의천 스님은 항주 상천축사(上天竺寺)의 자변 종간 스님(慈辯 從諫)에게 천태종의 경론을 강설해 주도록 청하여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전해 받았는데, 종간 스님은 그 전법의 신표로 수로(手爐)와 여의(如意)를 전해주었다.
그러나 아들을 그리워한 모후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의천은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귀국하기 이전 국청사(國淸寺)가 있는 천태산에 올라 지자대사탑(智者大師塔)에 참배하고, 귀국하면 천태교를 일으킬 것을 발원한다.
의천은 머리를 숙이고 천태교주 지자 대사(智者大師)에게 아룁니다. 일찍이 듣건대 대사께서는 오 시팔교(五時八敎)로써 동쪽으로 유통된 부처님 일대의 가르침을 판석(判釋)하기를 극진히 하셨으 니, 후세에 불법을 배우는 이들이 이를 의지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우리나라에도 옛날 제관(諦觀) 스님이 계셔서 천태대사의 교관(敎觀)을 강의 하여 해외에까지 유통시켰으나 그 전습(傳習)이 끊어져 지금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불초한 이 의천이 분발하여 몸을 잊으며 스승을 찾고 도를 물었는바, 이제 이미 전당(錢塘)의 자 변(慈辯) 대사 강하(講下)에서 천태 대사의 교관(敎觀)을 이어받고 그 대략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의천은 이제 고국에 돌아가면 목숨 바쳐 대사께서 중생을 위해 베푸신 가르침을 선양하여, 노고의 덕에 보답코자 이에 서원합니다.
1086년 5월 20일, 의천 스님은 절강성 영파에서 그동안 수집한 불서 3,000여 권을 갖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리고 29일 고려 땅을 밟고, 왕의 허가를 받지 않고 몰래 송나라로 떠난 죄에 대해 어머니와 왕에게 벌을 요청한다. 그러나 형인 선종과 모후는 스님을 반겨 맞이하며 노고를 치하하였다.
그리하여 귀국한 그해, 의천 스님은 개경 흥왕사(興王寺)의 주지직을 맡고, 장경의 판각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였다. 이어 앞으로 간행할 〈고려교장(高麗敎藏)〉의 목록에 해당하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펴냈다. 그리고 1091년부터 그동안 자신이 국내는 물론 송나라·요나라·일본 등으로부터 구해 온 정장(正藏)에 대한 소(疏)·초(鈔) 등의 주석서 1,010부 4,857권을 조판 및 인행(印行)하였다.
이 〈고려교장〉은 3권은 경률론 삼장에 대한 연구와 주석의 장소(章疏)들만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동북아 각각의 현행(現行) 불교장소를 총망라한 방대한 규모와 종류, 정밀한 내용 검토와 분류 등 여러 측면에서 이같은 〈교장〉 간행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는 오직 고려에서, 그리고 의천이 처음 시도하고 완성해 낸 대불사였다.
〈교장〉의 간행 불사와 병행하여 의천 스님은 1089년, 모후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개경의 서쪽에 땅을 닦아 해동 국청사(國淸寺)를 건립코자 공사를 시작하니, 이것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천태종을 창종하기 위한 불사였다.
그러나 1092년 인예왕후가 세상을 떠남에 공사가 지체 되었고, 의천 스님은 해인사에 내려가 한동안 주석하였다. 다시 1094년 선종이 서거하고, 숙종이 왕위에 올라 불사를 계속함으로써 1097년 국청사가 완공되었다.
인예왕후의 뜻을 이어 절을 완공시킨 숙종은 의천 스님을 국청사의 주지로 임명하고, 친히 경찬도량(慶讚道場)을 베풀었다. 그리고 스님께 법을 설할 것을 청하니, 수천 명의 사부대중이 모인 법좌에서 의천은 회삼귀일(會三歸一)에 근거한 교관겸수(敎觀兼修)의 사상을 제창 강설하고, 마침내 천태법화의 대도량이 세워졌음을 선포하였다.
올해로부터 꼭 920년 전에 일어난 대역사였다. <고려사(高麗史)> 권90에서는 이를 “처음으로 천태종을 개창하여 국청사에 두었다.[始創天台宗置于國淸寺]”라고 기록하고 있다.
의천 스님은 천태종의 개창 선언문으로도 불리는 이날의 ‘계강사(啓講辭)’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멀리 생각하건대, 해동에 불법이 전래한 지 7백여 년에 비록 여러 종파가 다투어 연설하고 모든 교가 퍼졌지만, 다만 천태의 한 분야가 밝은 시대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우리 선비(先妣) 인예국모(仁睿國母)께서 여러 생을 두고 불법을 받들고 겁을 쌓는 행원의 인을 닦아, 정람(精藍)을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
(제가) 국청사에서 천축의 교관을 이어 받고 불롱산(佛隴山)과 고산(孤山)의 (지자대사) 탑묘에서 목숨이 다하도록 법등 전할 것을 정성으로 맹세하였더니, 이제 평생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 감격하고 경사롭습니다.
이후 숙종 4년(1099) 과거를 시행하는 식년(式年)에 제1회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였고, 2년 후 천태종 대선(大選)을 시행하였다. 이로부터 천태종은 국가 공인의 한 종파가 된다. 국청사를 천태종의 근본도량으로 하고 천태학을 강의하여 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구산선문이나 화엄종의 승려도 많았다.
그리하여 천태종은 근본도량인 국청사 외에도 전국에 6대본산(六大本山)을 두어 종풍을 크게 떨쳤다. 당시 불교는 선(禪)과 교(敎)가 서로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폐단을 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폐단을 타파하고 모든 불교가 대동단결하는 종합적이고 이론적인 체계를 수립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의 통일적 사상을 전개한 것이 천태종이었던 것이다.
1101년(숙종 6년) 의천 스님은 개경 총지사(摠持寺)에서 세수 47세, 법랍 3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숙종은 스님이 열반하기 이틀 전 국사(國師)로 책봉하고 ‘대각국사(大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린다.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 동쪽에 장례하였으며, 그 해에 개성 흥왕사(興王寺)에 ‘대각국사묘지명(大覺國師墓誌銘)’을 새겨 묻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1125년, 인종(仁宗)은 영통사에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증시대각국사비명(贈諡大覺國師碑銘)’을 세웠으며, 1131년에는 남숭산(南嵩山 : 金烏山) 선봉사에도 임존(林存)의 명문으로 ‘천태시조대각국사비(天台始祖大覺國師碑)’를 세워 대각국사의 뜻을 기렸다. 영통사 비문에서 김부식은 말하고 있다.
국사는 성인의 도를 갖고 태어나 배움에 뜻을 두고 세속의 영광에 조금도 미혹치 않았다.
도덕이 쇠퇴하고 학문이 황폐해가는 시대에 홀로 그런 세태를 거슬러 사신 분이다.
고려에서 피어난 천태법화의 꽃
신라 후기에 존재하였던 각 분야의 교학과 선법은 나말여초(羅末麗初)에 정리되어 5교9산(五敎九山)으로 통칭하였다. 그러나 대각국사가 천태종을 창설한 이후에는 5교 9산이 5교양종(五敎兩宗)으로 바뀌었다.
여기에서 양종이란 조계종과 천태종의 선종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에는 교종의 한 종파였던 천태종이 우리나라에서는 대각국사에 의해 선종에 가까운 종파로 성립된 것이다. 따라서 천태종은 중대사-삼중대사-선사-대선사로 이어지는 선종 교단의 승계를 지녔다.
대각국사는 교종과 선종을 융통하되 교종의 입장을 떠나지 아니하였고, 보조국사(普照國師)는 선의 입장에서 선·교의 일치(一致)를 제창함으로써, 이 두 사상이 양종의 대조적 선풍을 이루었다. 그래서 숙종은 1104년 6월에 대각국사의 제자들이 남숭산(南嵩山) 선봉사(僊鳳寺)에서 천태업(天台業)을 그대로 행하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면 대각국사 입멸 후, 그 문도들은 어떻게 사자상승(師資相承) 되었을까?
‘대각국사비’에는 국사의 법자(法子)가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에 법손(法孫)이라 할 수 있는 문하생이 기록되어 있다. 법자의 법명과 법계를 보면, 덕린(德麟; 大禪師), 익종(翼宗; 禪師), 경란(景蘭; 禪師), 연묘(連妙; 禪師)가 있고, 그 문손으로 모두 116명의 문하생이 있었다.
그중 익종 선사의 문하생 7명 중에 교웅 스님(敎雄, 1076 - 1142)은 숙종 6년(1101)에 천태종의 대선(大選) 승과(僧科)를 시행할 때 처음으로 최고 우수 성적으로 입문하여 대덕(大德) 법계를 받은 후 왕명으로 국청사의 복강사(覆講師)로 임명되었다. 복강사란 스승을 대신하여 반복하여 강의하는 강사를 말한다.
그리고 교웅 스님은 대각국사의 법통상승자(法統相承者)로서 천태종의 제2세가 되어 평생 동안 천태종의 종지 선양에 전력하다가 인종 13년(1135)에 국청사에서 대선사의 법계를 받고 묘응대선사(妙應大禪師)가 되었으며, 인종 20년(1142)에 입적하니 세수 67세였다.
천태종의 제3세 원각국사(圓覺國師, 1119 ~ 1174) 덕소(德素) 스님은 인종 6년(1128)에 대선에 합격하였으며, 의종 9년(1155)에 선사(禪師), 의종 18년(1164)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받고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덕소 스님은 국청사에서 천태교관을 선양하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으니, 그 문도가 1,2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원묘국사(圓妙國師, 1163 ~ 1245) 요세(了世) 스님은 1174년(명종 4) 합천 천락사(天樂寺)로 출가하여 균정(均定) 스님을 은사로 삼아 천태교관을 닦았으며, 1185년 승과에 합격하였다.
1216년(고종 3) 요세 스님과 제자들은 전라남도 강진의 최표(崔彪)·최홍(崔弘)·이인천(李仁闡) 등과 함께 만덕산(萬德山)에 800여 칸의 만덕사를 창건하여 이곳에서 천태종 중흥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규모를 확대하며 발전해 온 요세 스님의 결사운동은 1232년(고종 19) 4월 8일 공식적으로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설치하였고, 전통적인 법화삼매참법(法華三昧懺法)을 닦게 하였다. 이어 1236년(고종 23) 뒷날 백련사의 제4세 조사가 된 천척(天頙) 스님으로 하여금 ‘백련결사문(白蓮結社文)’을 찬술하여 공포하게 함으로써 백련결사의 출범을 정식으로 선언하였으니 백련결사운동의 구체적인 실천 내용은 천태지관(天台止觀)·법화삼매참(法華三昧懺)·정토왕생(淨土往生)이었다.
조선시대 천태종과 법화신앙
조선 왕조의 억불정책은 태종대인 1405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불교 종파는 고려 후기에 11종파가 존립하였는데, 조계종 ․ 천태종 ․ 화엄종 ․ 자은종 ․ 중신종 ․ 시흥종 ․ 총남종의 7종으로 축소하고, 전국의 사찰과 승려의 수, 사찰의 토지를 고려 말의 1/10 수준으로 대폭 축소시켰다.
그리고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7종을 다시 선교 양종으로 통합 축소하고 36본사만 인정하니, 이로 인하여 천태종의 공식적인 명칭은 사라지고 만다. 이후의 천태종 활동사항은 스님들 각각의 활동에서 미루어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행호(行乎) 스님은 1420년(세종 12) 7월부터 1436년(세종 18)까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지원을 받아 백련사의 중창을 시작하였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여 마치 백련결사 당시 지방의 향리층이 주도하여 운동에 참여한 것과 그 분위기가 비슷하였고, 불전과 승사는 태평시대의 옛 모습을 거의 다 되찾았다고 한다.
행호 스님은 세종에 의해 ‘판천태종사천태영수도대선사(判天台宗師天台領袖都大禪師)’라는 승계를 받고 1438년(세종 20) 7월 18일 선종의 총본산인 도회소 흥천사의 주지를 하였다. 그러므로 스님은 천태종과 조계종을 포함한 선종을 주도하는 위치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설잠(雪岑, 1435~1493) 스님의 속명은 김시습(金時習)이고, 호는 매월당(梅月堂) 등이다. 그는 박학다식한 재능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당대를 풍미했던 기행(奇行)으로 세간에 숱한 화제를 뿌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통한다.
그는 출가한 후 법화·화엄·선에 관한 다수의 불교저술을 남겼다. 그중 〈묘법연화경〉에 대한 찬문인 〈연경별찬(蓮經別讚)〉은 그의 천태학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를 볼 수 있는 저서로, 그가 조선 전기 법화 · 천태학에 이해가 깊은 고승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설잠 스님의 법화 ․ 천태에 관한 직접적인 저술은 〈연경별찬〉 1권에 그치고 있으나, 그의 저서 곳곳에서 〈법화경〉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문에서는 〈묘법연화경〉을 읽고 있는 승희도인(昇曦道人)의 모습을 노래하기도 하고, 때로는 천태산의 스님들을 흠모하고 천태산 풍경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는 1427년(세조 9)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내불당(內佛堂)에서 국역 〈묘법연화경〉을 교정하는데 초청받아 참여하였다. 이것은 그가 〈법화경〉에 깊은 식견을 가진 인물로 평가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월창거사(月窓居士) 김대현(金大鉉)은 불혹(不惑)의 나이에 〈능엄경〉을 읽고 불문에 귀의해서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그 뒤 1855년에 이르러서 〈선학입문〉의 서(序)를 지었으므로 그의 탄생은 적어도 1815년 이전이 된다. 그리고 임종에 이르러 자신이 지은 모든 책을 불태우고 1870년(고종 7)에 입적하였다. 그런데 다행히 월창거사가 지은 〈선학입문〉과 〈술몽쇄언(述夢瑣言)〉은 다른 이의 손에 필사되어 전해졌다.
〈선학입문〉은 중국 수나라 천태대사가 설한 〈석선바라밀차제법문(釋禪波羅蜜次第法門)〉 10권을 요약하여 3분의 1로 축소한 것이다. 따라서 다소 축약되었지만 내용은 역시 책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경(究竟)의 선(禪)바라밀에 들어가기 위한 입문서이다.
조선의 근대화는 1894년 갑오개혁으로 근대적 제도가 마련되면서 본격화되었다. 갑오개혁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2년간 3차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불교에 대해서는 1895년 승려의 도성출입을 허용한 것이 그 대표적 개혁정책이었다.
그런데 이 근세의 동향에서 그동안 흔적마저 묘연하던 천태종의 존재와 관련하여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 확인된다. 광무6년(1902) 국가가 사사(寺社)관리서를 설치하고 다시 불교의 행정적 관리에 나서기 시작한 ‘사사관리세칙(사찰령 36개조)’의 제1조가 천태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제1조에는 ‘돈(頓)ㆍ점(漸)ㆍ비밀(秘密)ㆍ부정(不定)ㆍ장(藏)ㆍ통(通)ㆍ별(別)ㆍ원(圓) 8교(敎)의 수기문(隨機門)을 선양하여 견성성불의 진리를 개시(開示)할 사(事)’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천태의 화의사교(化儀四敎)ㆍ화법사교(化法四敎)를 그대로 중생의 근기에 따른 방편문으로 선양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천태종의 핵심 교학이 국가법령의 첫 머리에 제시되고 있음은 그동안 임제선풍이 주류를 이루어 오는 가운데서도 여전히 천태교관과 함께 천태종의 영향력이 잠재해왔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원각대조사, 천태종을 중창하다
상월원각(上月圓覺) 대조사는 크게 뜻한 바가 있어 1944년 34세 때, 소백산 구봉팔문(九峰八門) 아래 연화지에 이르러 영기 어린 한 곳에 삼간 초암(草庵)을 얽고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5년여의 정진 끝에 드디어 공삼매(空三昧)를 체인(體印)하고 대도를 이루니, 1950년 대조사의 세수 40세 때의 일이다.
대도를 성취한 이후 이미 구인사(救仁寺)라 이름하고 있던 세 칸 초암을 근본도량으로 삼아 대조사는 구세제중의 교화를 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 같은 교화활동이 새로운 불교운동으로 확대되면서 마침내 천태종의 중창으로 이어진다.
상월 조사는 삼대지표를 가지고 1966년 8월 30일, 천태종 중창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67년 1월 24일, 문교부에 ‘천태종 대각불교 포교원’으로 등록하였다. 당시 정부는 ‘대한불교 조계종’ 이외에 신규 종단의 등록을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태종’으로 등록하지 못하고 포교원으로 등록하였다가, 1969년 12월 18일이 되어서야 마침내 ‘대한불교 천태종’으로 종단 등록을 신청할 수 있었다.
천태종은 1970년 1월 15일(음력 경술년 11월 28일) 정부로부터 종단을 인가받고 전문 17장으로 구성된 종헌 ․ 종법을 제정 선포하였다. 그 선언문에서는,
‘오랫동안 역사의 진토 속에 묻혔던 신성한 정신문화를 발굴하여 조국재건 민족중흥의 과업에 이바지하기를 약속하며 대한불교천태종을 재건하여 개권현실(開權顯實)의 최상종승(最上宗乘)으로써 불교의 대중화 생활화를 지향하며 이 종헌을 제정하여 선포한다.’
고 하였다. 그리고 대조사는 본래 서원했던 바 구세제중의 뜻을 더욱 굳게 하는 한편 장차 지향해갈 새 불교 운동의 이념을 세우게 된다. 회삼귀일(會三歸一)·삼제원융(三諦圓融)의 진리로써 구세제중을 위한 이념을 법화와 천태교의에서 도출하고 있는 것이다. 새 불교 운동 초기의 이 같은 이념은 뒤이어 ‘애국불교’·‘생활불교’·‘대중불교’의 3대 지표로서 정립되기에 이른다.
대조사는 1974년 4월 27일 열반하니, 세수 64세였다. 대조사는 열반하기 5개월 전인 1973년 11월 28일에 이미 열반을 예감하고 구인사 광명당에 모인 4,00명의 대중에게,
“내가 먼 곳으로 떠나가서 있더라도 퇴굴심을 내지 말고 스스로 항상 반성하여 마음자리를 바로 잡을 것이며 지금은 정히 말법시대라 믿음이 엷은 사람은 좋은 인연을 놓칠 것이요 믿음이 굳고 여일한 사람은 좋은 결실을 보리라”
라고 설하였다.
천태종은 제1대 종정 상월원각(上月圓覺) 대조사의 뜻을 이어받아 제2대 대충(大忠) 대종사가 1974년 종정에 취임하였다. 대충 대종사는 21세에 상월원각 대조사님을 은사로 소백산 구인사에서 출가득도 하였으며, 평생을 천태종의 눈부신 교세발전을 이룩하고 중생제도에 진력하다가 1993년 9월 3일 세수 69세, 법랍 48세로 열반에 들었다.
오늘날의 천태종은 제3대 도용(道勇) 대종사가 종단을 이끌고 있다. 대종사는 1977년 2월 남대충 2대 종정을 은사로 득도하여, 장좌불와(長坐不臥) 수행으로 대각을 성취하고, 1993년 종정으로 추대되었다.
해방 이후, 한국불교에 각 종파들이 신생(新生)하는 가운데 재창종이 된 천태종이 갖는 의미는 단순히 옛 전통의 계승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늘의 천태종은 다시 이 시대의 상황과 요구를 반영하여 또 다른 사상과 수행전통을 새롭게 확립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발전의 근원적 배경과 요인이 불교계 내외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가장 먼저 중창주 상월대조사의 법화(法化)와 유덕(遺德) 그리고 대조사에 대한 종도들의 절대적인 귀의를 들 수 있다.
한마디로 오늘의 천태종의 발전과 그 위상은 대조사의 탁월한 인격적 감화와 함께 천태교의에 입각한 종단 중창의 이념과 대조사의 새불교 운동에 대한 시대와 대중의 반향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