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 259호

한분순 시인이 故 정완영 선생에게
뜨겁던 ‘시조 사랑’ 잊지 않겠습니다

뒷모습도 고우셨던 정완영 선생님께

이것은 부치지 않은 연서와 같습니다. 문학소녀가 온 힘을 다하여 쓴 연애편지처럼 정성스럽지만 왠지 부끄러워 전하지 않았던 심정입니다. 정완영 선생님을 이제는 뵐 수 없으나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던 경의를 이 수줍은 지면에서나마 적어 보려 합니다. 좋은 문장에서는 그 글자가 향기를 낸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필력은 우아한 잔향으로 감돌며 모두의 시심을 여전히 북돋워 주십니다. 하늘 한 자락을 이불처럼 덮고 창작의 여정을 걷는 이들에게 선생님이 내려다보시는 온기가 있어 내내 버틸 수 있는 듯합니다.

정갈한 신앙처럼 지켜 오신 시심, 오롯이 품으셨던 시조 사랑, 넘보지 못할 시력(詩歷) 60년, 그러한 선생님을 받드는 마음은 넘치나 그 속내를 옮기기에는 저의 글이 얕아 머뭇거리다 떨림을 다독이며 편지를 적어 봅니다. 선생님이 계시는 천상에도 우체통이 있기를 바라며 마음의 사서함에 이 편지를 다소곳이 놓아둡니다.

계절의 탄식 같은 찬바람이 불고 나니, 어느덧 맨몸으로 떨고 있는 나뭇가지들이 눈에 사뭇 밟힙니다. 선생님, 삶은 짧고 외로운 길, 혼자 가는 길이라 하셨지요. 한숨처럼 부딪혀 오는 싸늘한 바람 속에서, 누구나 어쩔 수 없이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쓸쓸한 명제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아마도, 고독을 오래된 연인처럼 품기에는 저의 시심이 선생님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그래도 길이 없는 곳에 글이 있어, 이렇듯 선생님께 편지를 띄우는 지금이 은총처럼 여겨집니다.

커피를 앞에 두면 눈물 익는 냄새가 나는 듯한 이 가을에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 있었던 다방이 떠오릅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되었던 귀한 인연의 시작은 1970년대 초였습니다. 제가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문학에 대한 패기가 넘쳤을 즈음 선생님의 명작들을 접하면서 겸손함을 배웠습니다. ‘저물 듯 오시는 이’라는 저의 작품은 그러한 발상의 전환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큰 호평을 받았던 까닭도 그렇듯 연마된 시심을 익혔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해연다방’, 당시 선생님이 서재처럼 또는 작업실처럼 삼으시던 아름다운 공간이었지요. 마침 제가 근무하던 신문사 옆이라 자주 들를 수 있었습니다. 여러 장르의 문인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러 몰려들기도 했지요. 문학적 활기로 왁자했던 그곳을 추억하면 저는 애틋하고도 뭉클한 마음이 됩니다.

자애로운 표정, 담담한 미소, 참다운 선비의 정취, 그러한 면모가 선생님을 뵈었던 첫날의 느낌이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시인 초년생이던 저도 많은 분을 알게 되었고, 신문사에 출근해 있다가 선생님이 들르는 시간엔 해연다방으로 나가고는 했습니다.

문학을 말씀하시던 해박함, 그리고 완벽한 필력이라 칭송되는 선생님의 천의무봉(天衣無縫) 작품들은 제게 한없는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작품의 첫 행은 하늘이 내린다고 얘기되는데 그렇듯 놀라우며 고마운 문학적 순간이 선생님과의 첫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마시던, 아침 해를 닮았던 모닝커피도 생각납니다. 감미롭고 짙은 커피에 달걀노른자 한 알 띄워 내오던 것이 당시 유행하였지요. 하루를 열며 열정을 품고 정갈히 나타난 새벽 태양처럼 맑은 노른자가 떠 있던 커피, 그 한 잔의 감성을 마시며 선생님과 아침을 열었던 추억은 아직도 은은한 시심이 됩니다.

커피가 영혼을 깨우고 감성을 고취하듯 선생님은 우리 문학의 카페인처럼 작품의 흔적마다 생기와 그윽한 시심을 더하셨습니다. 저도 마음을 기울여 끓여 낸 밀크커피 한 모금 만큼의 달콤한 서정을 건넬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렇게 다듬은 글로 다시 선생님께 편지 드리겠습니다. 선생님의 사서함에는 늘 축복이 가득할 것입니다. 이제 나뭇잎이 날리겠지요. 그 갈색의 수려한 움직임을 선생님이 보내신 포근한 답장이라 여기겠습니다.

 

한분순

197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등단했다. 서울신문과 세계일보 등에서 기자로 활동했으며 <실내악을 위한 주제> 등 많은 시집과 <언젠가의 연애편지> 등 시화집을 냈다. 대한민국문학상을 비롯 다수의 상을 받았고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시인협회 이사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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