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로 읽는다 '나무' 259호

세계의 중심에 우뚝한 나무

부안 내소사 할아버지 당산나무 ⓒ금강신문

동제(洞祭)를 지낼 때면 마을을 지키는 나무에 금줄이 감긴다. 마을마다 공동체의 상징인 거목이 있게 마련이고 이를 당산나무ㆍ서낭나무ㆍ동구나무 등이라 부른다. 평시에는 그 아래 주민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고 나그네가 잠시 쉬어가기도 하지만, 제를 지낼 때면 왼새끼로 꼰 금줄을 감아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 년 내내 금줄을 감아 신목(神木)임을 나타내기도 하고, 마을 입구만이 아니라 산기슭에 자리한 경우도 많다.

당산나무는 대개 입지 좋은 곳에 집들이 하나둘 들어서 마을을 이룰 때 심은 것으로, 누적된 시간과 엄청난 크기만으로도 외경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마을마다 나무를 둘러싼 전설과 영험을 한두 개쯤 간직하고 있게 마련이다. 변고가 있을 때면 밤새 휘파람소리나 징소리를 내며 나무가 울어 마을의 운명을 예고하는가 하면, 도둑이 물건을 훔쳐 밤새 달아났으나 당산나무 아래를 계속 맴돌도록 영험을 발휘하기도 한다.

공동체에서 섬기는 이러한 성스러운 나무는 그 마을의 표상이요, 하늘과 땅을 잇는 우주의 중심축이 된다. 나무뿐만 아니라 크게는 산에서부터, 돌탑ㆍ솟대ㆍ장승ㆍ서낭대ㆍ볏가릿대와 같은 일련의 입간(立竿) 구조물은 하늘을 향해 솟은 수직성이 신앙의 핵심을 이룬다. 인간의 기원을 올리고 신의 뜻이 내려오는 매개로 여긴다는 점에서 이들 모두는 일종의 신간(神竿)이자 세계의 중심축인 우주목(宇宙木)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나무는 지상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생명력을 지녔기에, 우주나무의 상징성은 범세계적이다. 한국인 모두가 공유하는 우주목이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단수(神檀樹)라면, 마을마다 공동체마다 각자 또 다른 우주목을 지닌 채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세계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에 둔 가상의 수미산은 우주목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의 중앙탑은 수미산을 상징하며, 티베트에서는 불복장(佛腹藏)을 할 때 불상 내부에 긴 나무막대를 정수리까지 이르도록 세우고 경전을 감아 수미산으로 여긴다.

이처럼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대한 산에서부터 생명력을 상징하는 나무, 작은 솟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중심축을 설정하고 천지인(天地人)의 우주관 속에서 스스로를 인식해 왔다. 그렇기에 우주목은 곧 현재의 ‘나’를 중심으로 한 나무이다. 세상에 태어나 ‘나’로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누구든 자신만의 한 그루 우주목을 부여받았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길 위의 나무, 나무 아래의 붓다

네팔 룸비니 무우수와 구룡못 ⓒ금강신문

붓다는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고,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들었다. 그 나무는 모두 길 위의 나무요, 숲속의 나무들이었다.

성도와 열반의 장소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난 장소 또한 편안한 궁궐의 요람이 아니라 룸비니동산의 무우수(無憂樹) 아래였다는 점은 상징성이 크다. 태자로서 안락한 삶을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택한 붓다의 일생은 탄생에서부터 출가ㆍ성도를 거쳐 열반에 이르기까지 길 위의 삶이었던 것이다.

길이 곧 삶이 된 자에게는 나무가 안식처요, 사색과 성찰의 장이다. 길 떠난 나그네에게 나무만큼 큰 위안을 주는 것이 없듯이 나무는 늘 길과 함께 하면서 길 자체를 상징하고, 구도자의 삶을 상징한다. 묵묵히 제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길 위에 서서 자신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그늘을 내어주고 버팀목이 되어준다. 따라서 맨발의 성자들의 삶은 나무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태자 시절, 싯다르타는 파종에 앞서 치르는 농경제에 참석해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헐벗고 초췌한 농부가 진흙투성이 얼굴로 힘겹게 일하는 모습, 헐떡거리며 일하던 소가 채찍을 맞고 살이 터져 피가 흐르는 모습, 쟁기질로 흙이 뒤집힌 곳에 벌레들이 나오자 새가 달려들어 쪼아 먹는 모습…. 이를 본 싯다르타는 ‘중생이란 참으로 불쌍하구나. 서로를 잡아먹고 먹히는구나’라고 탄식하며 행사장을 빠져나와 잠부나무 아래 앉아 깊은 사색에 빠졌다.

싯다르타가 선정에 들자, 다른 나무는 그늘이 해를 따라 옮겨갔으나 잠부나무의 그늘만은 이동하지 않은 채 그를 가려주었다. 이에 태자를 찾던 정반왕은 나무 아래 가부좌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경건하여 자신도 모르게 엎드려 절을 올리고 말았다. 잠부나무의 이적은 붓다의 신성성을 드러내는 상징적 일화이자, 수행자와 함께하는 나무의 상징성 또한 함께 나타내 주고 있다.

평생을 한곳에 머무르지 않고 유행(遊行)하였던 붓다는 삶 자체가 행동이요, 실천이었다. 길을 걸으며 갖가지 상황을 만날 때마다 질문과 답변으로 가르침을 주었고, 많은 이들이 모이면 들판에서 야단법석을 펼쳤으며, 길 위의 나무 아래 누워 열반함으로써 발의 의미를 생생히 일깨워 준 삶이었다. 참된 수행자의 종교적 삶은 나무 아래의 붓다처럼, 길 위의 나무처럼 사색과 실천의 이미지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생명의 나무, 공생의 숲

안동 만송정 송림 ⓒ박재완

‘생명의 나무’는 우주목의 의미를 공유하면서 범세계적 상징성을 지닌다. 오행사상에서 해가 뜨는 동쪽을 나무[木]의 기운으로 나타내듯이, 땅에 깊이 뿌리내리고 무성한 가지에 잎과 열매를 피워내는 나무의 상징성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의 나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존재에게 생명의 탄생과 영속과 번영을 주는 성스러운 신목(神木)이다.

기독교에서는 에덴의 동산에 생명나무가 있어 그 실과와 잎으로 최초의 존재들이 삶을 영속해 나가는 근원이 되게 하였고,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명의 나무〉를 그려 많은 이들에게 신화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이 그림은 하늘과 땅과 지하를 연결하는 고대신화에 뿌리를 두고, 소용돌이치는 나뭇가지들로 생명의 영속성을 상징하며 인간의 종교적 심성에 깊이 다가갔다.

그런가하면 라오스의 ‘왓 씨엥통’ 사원은 외벽에 모자이크로 새긴 거대한 ‘생명의 나무’로도 유명하다. 나무 아래에는 사람과 여러 동물이 어우러지고, 아름다운 몸체에서 뻗어나간 가지마다 꽃과 잎이 피어나 온갖 새들과 원숭이가 가지 사이로 뛰노는 모습을 담았다. 생명의 나무는 그렇게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나무는 모여서 숲이 된다. 한 그루 한 그루가 함께 공생의 숲을 이룸으로써 궁극의 선(善)을 보여준다. 특정종교의 신자가 아니더라도, 세계의 중심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대한 인드라망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깨우쳤다면 그는 이미 지극한 종교인이다. 종교란 특별한 그 무엇이기 전에 인간의 행복을 가장 우위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무의 종교성은 모든 개개인이 우주목이라는 사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데서 찾아야 할 법하다. 그리고 세상에 하나뿐인 나무들이 모여 공생의 숲을 이루듯 우리 모두가 연기(緣起)의 숲에서 살아간다는 진리를 체득케 하는 것, 이것이 나무가 지닌 궁극의 종교성이 아닐까.

구미래

불교민속으로 문학박사를 취득했다. 동방문화대학원대 학술연구교수, 중앙대 외래교수, 조계종 총무원 성보보존위원, 한국불교민속학회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존엄한 죽음의 문화사>(모시는사람들, 2015), <한국불교의 일생의례>(민족사, 2012), <한국인의 죽음과 사십구재>(민속원, 200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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