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 문리보 시인이 아버지 문순태 소설가에게

유난히 무덥던 여름도 어느덧 끝자락을 보이는가 싶더니 드디어 물러가나 봅니다. 지난밤에는 제법 선선해진 바람을 타고 어디선가 훌쩍 나타나 베란다 타일바닥을 요리조리 뛰어다니는 귀뚜라미 한 마리를 발견했어요. 이 조그만 손님이 여름 내내 목이 쉬도록 울다 떠나간 풀벌레들의 빈자리를 슬그머니 차지하겠지요. 아버지, 저는 올 가을에도 밤마다 귀뚤귀뚤 귀뚜르르... 귀뚜라미가 부르는 노래 소리를 듣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어요.

아버지 계시는 생오지*는 다 잘 있는지요. 아버지 좋아하시는 그 구불구불 좁다란 생오지길을 따라 난 다랭이 논은 지금쯤 황금빛 물결을 넘보며 조금씩 물들어가고 있겠지요? 소나기 한바탕 시원하게 지나가고 나면 앞산 머리에 눈물 닦은 손수건처럼 곱게 내려앉던 산안개도 여전한지요. 매화나무, 배롱나무, 앵두나무, 벚나무, 오동나무, 배나무. 철쭉과 수국, 꽃잔디 그리고 금전초. 마루 밑에 숨어 피는 붉은 토끼 풀꽃이니 민들레들은요? 우리 누렁이랑 흰둥이는 밥 잘 먹고 집 잘 지키고 있나요? 전에 고친 지붕은 비가 오면 어디 다시 새지는 않나요? 기껏 걸쇠를 걸어 잠가도 후르르 제풀에 열려버리는 사립문은 손을 좀 보셨는지. 마당에 무성해졌을 잡풀더미는 또 어찌 헤치고 지나다니시는지요.

아버지, 저는 ‘생오지’를 떠나서야 비로소 ‘생오지’가 이렇듯 온전히 그리워지나 봅니다. 아버지를 뵙고 돌아올 때마다 그리움의 그늘이 더 진해지고 길어져요. ‘생오지’ 에서 미소 짓는 아버지 얼굴은 이 세상에서 제일 평화롭고 고요하기만 한데, 제 얕은 마음으로는 전보다 더 늘어난 아버지의 검버섯이, 더 가늘어진 발목이, 더 잦아지고 더 길어진 낮잠이 그리움의 목젖에 자꾸만 얹히고 걸립니다.

한 때는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아버지를 서울로 올라오시도록 하려고 골몰하던 때가 있었지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거나 몸이 편찮으시기라도 하면 이렇게 멀리 계시니 그때는 어쩌실 거냐고, 연세 들수록 자식들 가까이 계셔야 한다고, 설득도 해보고 읍소도 해 보았지요. 그러다 어느 날 느닷없이 마당 여기저기에 가져다놓은 열두 개의 커다란 마당바위와 “사람들 오다가다 들르면 고기도 구워먹고 놀다가라고 갖다 놨다”는 아버지의 천진한 얼굴을 보고서야 저는 알았지요. 제 시 ‘화석’에 묘사 된 노인처럼 아버지는 끝내 고향땅을 떠나지 않고 ‘생오지’에서 ‘화석’이 되고자 마음먹었다는 것을. 그것이 아버지의 염원(念願) 이고, 그곳이 아버지 문학의 원류(原流)라는 것을. 아버지에게 올라오시라고 조르는 대신 저는 이제 어쩌면 아버지가 지금모습 그대로 생오지를 꼿꼿하게 지켜주시기를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아버지가 그토록 꺾지 않는 그 고집만큼 제발 아프지도 마시고요.

아버지 기억나세요? 겨울방학이면 아버지 서재 난로 가에 우리 삼남매가 옹기종기 둘러앉아, 아버지가 구워주신 가래떡을 꿀에 찍어 먹으며 몇 날이고 세계문학전집을 읽곤 하던 것이 저는 지금도 문득 문득 생각이 나요. 아버지 서재는 그렇게 책과 더불어 뒹구는 우리들의 놀이터였고, 오래된 책 냄새와 아버지가 즐기시던 파이프담배 냄새와 잉크 냄새가 기막히게 버무려진 우리 아버지만의 냄새 폴폴 나는 아늑한 쉼터였고, 지적인 탐구의 공간이기도 했어요. 아마도 그 시절 아버지가 주셨던 작지만 옹골찬 불씨 하나가 제 가슴속에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다가, 이렇듯 문학에게로 다시 데려다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 돌아온 문학소녀는 지금 무한히 안온(安穩) 해요.

사랑하는 아버지…. 추석 전에 구절초 하얗게 피어나는 아버지의 꽃밭 생오지에 갈게요. 아버지 서재 창들을 활짝 열고 보얗게 쌓여있을 묵은 먼지도 털어내고, 벽을 어지럽게 차지하고 있을 신간 책들도 정리하고, 서늘한 가을 빛 머금은 국화차도 잘 우려서 올릴게요. 마당에 자란 풀은 제가 갈 때까지 뽑지 말고 꼭 그냥 두세요.

큰딸 리보 올림

✽생오지 - 전남 담양군 남면 만월리 생오지길 끝자락, 소설가 문순태 선생이 기거하는 곳.

문리보
2015 <유심>으로 등단.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을 졸업했으며 현재 (재)생오지문예창작촌 상임이사, 문학전문지 <창작촌>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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