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인문학/ 정상교 박사의 ‘용수보살의 空과 과학의 논리’

우주 끝까지 도망친다해도
자신의 업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를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에 담긴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실제 일부 종교는 과학적인 논리 또는 상식과 배치되는 교리를 가르치기도 합니다.

불자들이라고 다르진 않습니다. 불교를 비과학적인 종교라고 알고 있는 불자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불교를 깊이 공부한 사람, 특히 불교학자와 물리학자들은 불교가 세상 유일의 과학적인 종교라고 입을 모읍니다.

불교 교리는 참으로 방대합니다. 이 중에서 ‘공(空)’은 용수(龍樹, 150? ~ 250?)보살이 체계화한 대승불교의 핵심 이론입니다. 용수의 ‘공’과 첨단 과학 분야 중 ‘양자역학’을 주제로 불교가 얼마나 과학적인 종교인지를 살펴보는 강연이 6월 26일 분당 대광사에서 열렸습니다.

여러분은 ‘불교’하면 어떤 단어가 떠오르나요? 한 단어로 표현해봅시다. 마음, 자비, 윤회, 공(空) 등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중에서 ‘공’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공(空) 사상은 부처님의 여러 가르침 중에서 대승불교의 핵심 단어입니다. 특히 <반야심경>은 공사상을 중점적으로 설한 경전입니다. 우리는 법회 때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있지만, 과연 공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저는 추상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사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깊은 수행을 통해 체득한 진리이다 보니 현실세계의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공사상을 현대과학을 통해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반복되는 윤회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보편적으로 겪는 괴로움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生老病死]은 그 어떤 생명도 거부하지 못하는 보편적 진리입니다. 죽음은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큰 고통을 안겨주고, 병은 ‘나’의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런 현상들이 ‘나’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생로병사가 끊임없이 반복된다며 윤회(輪廻)를 설하셨습니다. 물론 기존 인도의 사상에 깔린 윤회관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여러 경전에서 수없이 설하신 걸 살펴보면 우리가 생로병사를 반복하며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일관되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교도지만 죽음을 체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윤회를 믿느냐’라는 질문에 답변을 주저하곤 합니다. 그저 ‘전설의 고향’ 정도의 옛이야기로만 받아들이는 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위[因]에 대한 결과[果]는 생사(生死)를 넘어서도 반드시 자신이 짊어져야 하고, 우주 끝까지 도망쳐도 자신이 행한 업(業, karma)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윤회’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수행해서 성불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단순히 결정론적 또는 운명론적 사고가 아닙니다. 서울대 의대 정현채 교수는 “오랜 임상 경험상 사람이 죽은 뒤 자신의 전생 행위에 의해 어떤 에너지체로 변하는 것 같다”고 했고, “윤회는 오히려 서구에서 더 발전된 학문”이라고까지 말합니다.

空, 망상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
우리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 때문에 행위[業]를 하게 됩니다. 이런 행위에 따른 업력(業力)이 바로 현재의 우리 자신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바로 공(空)의 획득입니다. 공성을 체득하면 애착이 사라지고, 나쁜 업을 짓지 않게 됩니다. 업보가 생기지 않으므로 윤회를 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공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즉 여실지견(如實知見)이 있어야 얻어지는 경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여(如)’란 ‘~와 같이’, ‘있는 그대로의’라는 의미입니다. 우주만물의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지혜, 이것이 ‘여실지견’입니다. 어려운가요? 저는 여실지견의 다른 말을 비틀즈가 노래한 ‘Let it be(순리대로, 있는 그대로)’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은 우리의 망상이 개입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모든 존재는 조건과 환경이 만나 의존하여 생겨날 뿐, 변하지 않는 독립된 본질이 따로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연기(緣起)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용수보살은 ‘공이란 바로 연기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천태종역대조사전’에 모셔진 용수보살 존상. ⓒ천태종

여기까지가 대략적으로 말씀드린 공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추상적인 개념이어서 잘 와 닿지 않을 겁니다. 그럼 이제 과학 개념을 빌려서 공의 의미를 설명해보겠습니다. 바로 ‘양자역학’입니다. 양자역학은 원자(原子)안의 전자(電子)처럼 아주 작은 미세 물질의 운동을 연구하는 첨단 물리학 분야입니다. 20세기 첨단 문명의 기반이 되었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실생활과도 직결되는 분야이기도 합니다.

空의 논리, 미시 세계와 일치
20세기 초 ‘전자’라고 하는 미세한 대상을 연구하던 과학자들은 놀라운 실험 결과를 발견합니다. 뉴턴이 확립한 이른바 고전 물리학에서 우주의 모든 존재는 내가 그 존재를 인식하건 안하건 ‘원래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내 인식과 상관없이 그 존재가 거기 있기에 내가 돌아봤을 때 그 존재가 내게 인식된다고 알고 있었죠. 현재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사물들이 대표적입니다.

탁자 위에 한 자루의 볼펜이 있습니다. 이 볼펜은 내가 보건 안보건 상관없이 탁자 위에 있기에 내가 볼 때도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미시(微示)세계에서는 놀랍게도,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게 그 볼펜은 내가 봤기 때문에 거기 있는 것이지, 원래 볼펜이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에 보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그 볼펜을 보기 전에는 볼펜이 아니라 볼펜이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한, 한마디로 여러 가지 가능성이 ‘중첩’된 존재라는 겁니다. 불교적으로 말하자면, 그야말로 ‘공’으로 존재하는 거죠.

이런 실험결과가 자꾸 나오다보니 당대 최고 과학자였던 아인슈타인(1879~1955)은 “그럼 저 달은 내가 저 달을 봤기 때문에 저기 있는 건가? 신(神)은 주사위 놀이(확률 게임) 같은 건 하지 않아!”라고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고 하죠. 즉, ‘본다’는 관찰 작용이 어떤 존재를 창조해 낸다는 해석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의 대부였던 닐스 보어(1885~1962) 등의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과 대립하며 자신들만의 양자역학 이론인 ‘코펜하겐 해석’을 구축해 나갑니다.

결국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모두 사망한 후, 존 스튜어트 벨(1928~1990)이라는 불세출의 물리학자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주장이 틀리고, 닐스 보어의 학설이 옳았다는 게 증명됩니다. 즉, 이 세상의 존재들은 아인슈타인이나 현재 우리의 상식과 달리 ‘원래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보기(인식, 관찰) 전까지는 ‘공’한 상태로 있는 것이고, 우리가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존재한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서로 ‘보았기 때문’에 이 모습으로 있는 것이고, 보기 전까지는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겁니다. 몰라서 모르는 게 아니라 원래 뭔지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에 모르는 겁니다.

‘實相은 無相’ 가르침도 ‘空相’
물론 양자역학의 해석이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원래 그렇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연기법에 의해 일시적으로 거짓처럼, 환상처럼 생겨날 뿐이며 그래서 일체 존재는 그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형상일 뿐’이라는 불교 유식학파의 주장과 완전히 같은지는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니라 확답을 내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종교 중에서 불교만이 양자역학의 세계관과 아주 유사한 주장을 이미 2600년 전부터 가르쳐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천태종 중창조 상월원각대조사님의 법어는 ‘실상(實相)은 무상(無相)이요’라고 시작됩니다. 즉, 이 우주의 진실한 모습은 무상(無相), 즉 공상(空相)이라는 말씀입니다. <반야심경>의 공과 양자역학의 ‘중첩’과 대조사님의 말씀은 모두 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왜 불교는 이처럼 사물의 본질을 바라보는데 있어 현대 과학과 상통하는 면이 많을까요? 불교가 다른 종교나 사상들과 비교되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론만 장황한 게 아니라 2600년 전 붓다가 경험하고 가르쳐준, 그래서 수많은 조사 스님들이 역시 경험해서 누구나 체득할 수 있는 ‘수행의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수행을 하면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라는 우리의 감각기관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계발되고, 이 청정해진 육근(六根)은 우주를 그야말로 여실히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 경지에 이르렀던 역대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의 가르침이 현대 과학의 결론과 다를 수는 없겠지요.

불교는 신들이 뭘 만들어냈다는 유치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관음수행을 비롯한 모든 기도는 공성의 획득과 윤회를 벗어나기 위함이지만, 기도는 필수적으로 선한 업을 쌓게 하므로 현세에서 큰 복덕도 안겨줄 것입니다. 수행을 통해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불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상교 박사는 금강대 불교학과를 졸업했다. 일본 동경대 대학원에서 불교학 석사학위와 논문 ‘중관학파에 의한 푸드갈라설 비판’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4년 출간한 저서 <도쿄대학 불교학과>가 ‘올해의 불서’에 선정됐다. 현재 BBS 불교방송에 출연중이며, 여러 불교교양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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