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칼럼(256호)

‘내가 진정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아버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 위한 삶? 어머니의 스케줄대로 움직이는 삶?’

오늘은 이웃 종교 이야기로 시작할까 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어때? 깡마른 몸에 헐겁게 내려뜨려진 옷자락.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비스듬히 고개 떨구고 있지. 그 표정은 어떤가. 운명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체념하고 있지만 결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억울해하지도 않는 표정이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개인적인 바람 같은 것은 하나도 품고 있지 않은, 하지만 서글픔이 가득 서려 있는 그 표정을 들여다보자면 가슴 한켠이 저릿해오지.

그렇다면 이제 붓다를 떠올려보자. 어떤 모습이 대번에 떠오르니? 눈을 반쯤 내리깔고 담담하게 정면을 향하고 있지. 그리고 무척 풍성한 몸매를 지니고 있어. 불상의 특징은 세상의 어떤 고민도 다 떨쳐 버린 듯 아주 편안하고 고요한 표정의 무척 정적인 느낌을 사람들에게 안겨준다는 것이지.

‘지금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든 난 그런 거 상관없어!’라는 듯한 붓다의 표정을 보자면, ‘아, 저 부처님은 어쩜 저리 평화롭지? 나도 얼른 저런 경지를 맛보고 싶어’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흥, 세상일은 나 몰라라 하고 계시는군. 어쩌면 저렇게 무사태평이실까’라며 반감을 품는 이도 있을 거야.

너흰 어떤 쪽이니?

청소년들에게 불상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지도 몰라.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는 젊다. 그는 영원히 젊은 예수, 청년 예수이기 때문에 인류의 가슴에 언제나 세상의 모순과 기득권의 횡포에 맞서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깊이 새겨져 있지.

그런데 불상은 연령대조차도 모호하지. 어쩌면 세상의 기득권을 다 누려 피둥피둥 살이 찐 노년층의 인상을 강하게 받을 수도 있어.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치열한 투쟁과는 상관없는 무색무취의 표정을 대하자면 젊은 붓다는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아.

과연 붓다에게도 반항이나 투쟁의 시기가 있기는 했을까? 설마 태어날 때부터 저런 덤덤한 표정을 띠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황금빛 불상에 숨겨진 붓다의 청소년 시절을 생각해보자.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붓다는 싯닷타(혹은 싯다르타)라는 이름의 왕자 출신이야. 얼핏 금수저라는 단어가 떠오르니? 그럴 수도 있겠지.

부왕은 늦게 얻은 아들 싯닷타에게 최상의 교육과 최고의 환락을 제공했지. 싯닷타는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부왕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어. 그는 틀림없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권력과 부를 맘껏 만끽하며 일생을 살 수 있었지.

하지만 싯닷타는 그 길이 과연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했어.

믿을 수 있겠니?

당연히 자신 앞에 주어지는 모든 권력과 명예와 부를 거머쥐지 않고, ‘과연 이것이 내 인생이어야 하는가’를 생각했다는 사실을 말이야. 여느 집안의 청소년들과 싯닷타의 처지는 사뭇 다르단다. 보통의 청소년들은 자기 한 사람의 인생만을 생각하면 됐겠지만 싯닷타에게는 부족과 가문과 나라의 운명이 다 걸려 있었어.

하지만 그는 생각했어.

싯닷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 그리고 그는 어른들이 내미는 삶의 계획표를 거부했지. 그건 어른의 삶이지 자신의 삶은 아니기 때문이었어.

아, 물론 청소년 시절에는 부모와 사회가 제공하는 모든 교육의 혜택을 다 누려야 마땅해. 일생을 살면서 지금 말고는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하지만 그분들이 제공하는 보살핌과 교육의 혜택을 다 받으면서도 마지막 선택은 자신에게 달렸다는 것을 잊으면 안 돼.

싯닷타는 최고의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지만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고, 그래서 왕위를 버리고 구도자의 길을 걸어갔어. 절에서 만나는 미묘한 미소 속에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강단 있는 청년 싯닷타가 숨어 있다. 우린 그것까지 읽어내야 해. 다음번에는 싯닷타가 평소 어떤 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는지 들려줄게.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