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이 있는 여행지 (255호) 경주 야경여행

문무대왕릉

경북 경주. 그곳에는 기원전 57년에 시작되어 992년 동안 이어진 신라의 모습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길을 걸으며 마주하는 거대한 고분, 불교의 시대를 증명하는 불교건축과 들판에 남아있는 절터의 밑그림, 숲마다 남아있는 불상과 석탑, 문명의 증거, 전설의 공간, 모두 그 시대의 모습이며 흔적이다. 천 년이라는 세월이 한순간처럼 펼쳐져 있는 곳, 경주. 그곳에 가면 천 년 전의 천 년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천 년의 풍경 중에는 밤하늘의 별처럼, 지상에서 빛나는 밤 풍경들이 있다. 그 밤 풍경들 속에는 또 다른 ‘지금’과 ‘여기’가 있다. 시간을 초월해 나를 느껴보는 맛! 경주 야경여행의 별이다.

감은사지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
이번 야경여행의 출발은 양북면 봉길리에 있는 문무대왕릉이다.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야경은 아니지만 야경여행의 출발지로 제격이다. 일출로 유명한 곳이지만 일몰의 풍경도 좋다. 일몰의 풍경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감포 앞바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는 시간, 봉길리 해수욕장이 들어선 해안에 서면 하늘과 바다는 시시각각 서산에서 보내오는 명명불가의 빛깔로 물들어간다. 바다 앞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바위섬 대왕암이 보인다. 백제, 고구려와 함께 했던 삼국의 시대를 마감하고 통일신라를 열었던 신라의 제 30대 왕 문무왕의 수중릉인 문무대왕릉이다.

바다의 끝에서 밀려온 파도가 육지 끝에 남은 자갈을 굴려 올린다. 자갈 구르는 소리가 파도와 함께 다시 바다로 밀려가면 대왕암에 빼곡히 앉았던 갈매기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른다. 새들의 몸짓으로 하늘의 모습은 바뀌고 천 년의 시간을 선명하게 붙들고 있는 대왕의 거처는 아득한 그날처럼 어둠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파도소리, 자갈 구르는 소리, 일몰의 빛깔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바다, 갈매기들의 날갯짓. 문무대왕릉이다.

태양의 빛깔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때, 문무대왕릉에서 길 하나를 건너 서산을 바라보면 같은 양북면(용당리)의 감은사지가 보인다. 문무대왕릉에서 약 1km 거리다. 어두워진 산기슭에서 감은사지 삼층석탑(국보 제112호) 2기가 환하게 빛나고 있다. 사찰과 함께 서있는 석탑의 느낌과 절터에 홀로 남은 석탑의 느낌은 많이 다르다. 사찰과 함께 서 있는 석탑이 그 시대성을 잃고 서있다면 사지의 석탑은 과거의 시간을 그대로 표시하고 있는 듯하다.

석탑으로 다가가는 길. 밤하늘에는 별들이 나타나고, 논두렁에서는 개구리들이 울어댄다. 문무대왕릉에서 지척에 있는 감은사지는 그 거리만큼 문무왕과 무관하지 않다. 감은사지터는 동해에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이 길을 통해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문무왕은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이곳에 절을 짓기 시작했고 아들인 신문왕이 완성했다. 어둠이 절터의 밑그림마저 지우고 하늘 아래 두 개의 석탑만이 남으면 석탑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은 어느 시대의 하늘이며, 그 안에서 빛나는 별들은 어느 시대의 것인지 알 수 없다.

대릉원

대릉원, 동궁과 월지, 첨성대
다음은 반경 약 1.5km 안에 모여 있는 대릉원과 동궁과 월지(안압지), 첨성대를 둘러보는 여행이다. 하지만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에 이어 그곳을 모두 돌아보는 것은 무리다. 시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여유 있는 여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감은사지에서 대릉원까지는 약 30km 거리다. 따로 날을 잡아 돌아보는 것이 좋다.

경주의 대표적인 풍경 중의 하나는 거대한 고분이다. 황남동에 자리한 대릉원은 천마총과 미추왕릉 등 신라의 왕, 귀족의 고분 23기가 모여 있는 곳이다. 관람은 오후 9시까지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대릉원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서 대릉원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분과 고분 사이로 어둠과 가로등 불빛이 섞이면서 시절도 그 옛날을 섞기 시작한다. 천 년 전에 흙에 누운 그들 곁으로 천 년 후의 사람들이 걸어간다. 삶과 죽음의 자리도 섞여간다.

대릉원을 나와 동궁과 월지로 간다. 그 중간에 첨성대가 있지만 첨성대를 나중에 보는 것이 좋다. 동궁과 월지 역시 관람시간이 오후 10시까지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첨성대는 관람 제한 시간이 없다.

감은사지

경주 야경여행에서 풍경만 놓고 보면 인왕동의 동궁과 월지가 하이라이트다. 비주얼이 그야말로 ‘야경’이다. 화려하고 풍성하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부터 가족 단위, 연인, 외국 관광객 등 다양한 관람객들로 불야성이다. 조명을 받아 화려하게 변신한 연못의 나무들과 전각이 다시 연못 속에서 일렁인다.

동궁과 월지는 월성의 한 쪽으로 동궁은 임해전으로 추측되는 전각 터 일대를 이르며 그에 딸린 연못이 월지다. 달이 비치는 연못이란 뜻의 월지는 안압지로 불리던 곳으로 최근에 이름을 고쳐 부르고 있다. 동궁은 외교를 위한 잔치가 열리던 곳이다. 파티의 장소였다. 천 년 후에 누군가 또 글을 쓴다면, 천 년 전에 파티가 열렸던 곳이라고 쓸 것 같다.

동궁을 나와 길 하나를 건너 대릉원 쪽으로 약 500m 정도를 걸으면 첨성대다.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포토존, 첨성대가 조명을 받으며 환하게 서있다. 동궁과 월지처럼 사람들로 불야성을 이루는 곳은 아니지만, 가는 밤이 아쉬워 모여든 관람객들이 첨성대를 배경으로 다시 또 추억 만들기에 바쁘다. 별을 보던 곳, 하늘을 보던 곳이다. 아름다웠던 곳이다. 첨성대 위로 어둠이 짙어간다. 별은 많지 않다. 첨성대 위에 하늘을 올려놓고 별을 본다. 첨성대의 높이만큼 별은 가까워지고 별을 보는 시간만큼 천년은 또 멀어져 간다.

경주는 높은 건물을 제한하고 있어 야경이 다른 지역의 밤풍경과는 다르다. 경주의 야경은 단순히 화려한 불빛들에 의한 야경이 아니라 유구한 시간이 머금고 있는 흔적들이 발휘하는 존재감이다. 이 밖에도 경주에는 세월의 흔적만으로도 충분히 빛날 수 있는 밤풍경들이 구석구석에서 빛나고 있다.

박재완 여행작가

박재완

서울예술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고, 현대불교신문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2008년과 2010년 한국불교기자상(사진영상 보도부문)을 수상했다. 2012년 <에세이스트>에 수필로 등단했고, 2016년 5월 산문집 <산사로 가는 길-연암서가>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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