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 손끝에서 피어나는 마음(255호)

하루에도 수십 건씩 문자를 주고받지만, 손으로 쓴 편지는 보내지도 받지도 않는 시대다. 그럴수록 손끝에서 묻어나는 편지글의 진심이 그립다.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은, 그것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고, 편지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 마음 속 한 곳에는 여전히 빨간 우체통이 있다.

학술원회원이며, 서울대 명예교수인 오세영 시인이 17년 전 유학 간 어린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따뜻한 부성애가 넘친다. 장장 6쪽에 달하는 손글씨 편지를 오세영 시인이 직접 내용을 간추려 주었다. 홍석군은 코네티컷주 하트 포드 인근에 있는 사립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위스컨신 메디슨에서 공부한 뒤 귀국하여 지금은 한국의 한 기업체에서 일하고 있다.

오세영 시인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사랑하는 홍석이 보아라.

벌써 봄이 되었구나. 지금 서울은 진달래, 개나리가 하나 둘씩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네가 어릴 때 엄마와 누나랑 하동 쌍계사의 벚꽃 구경을 갔던 일이 새삼 생각난다. 그 때 너는 초등학교 학생이었는데 지금은 대학생이 되는 문턱에 서 있으니 세월의 빠르기가 새삼 실감되는구나. 아빠도 그 때는 40대 초반으로 한창 젊었으나 지금은 환갑을 바라보게 되었다. 앞으로 3년만 되면 아빠는 환갑을 맞이하게 된단다.

네가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빠가 새삼 말하지 않더라도 이제는 어른이 되어 가는 네 자신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너의 재능과 지능을 사장시키고(죽이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중학교 때 아이큐검사(지능검사)에서 150점이 나왔던 네가 아니더냐.

아빠는 남다른 너의 능력과 총기를 믿고 있다. 너는 분명 다른 아이들보다 더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아이다. 그런데 학업 성적이나 평소의 행동에 그 결과가 나타나지를 않았다. 아빠는 그것이 네가 전혀 노력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너에게는 아예 노력하려는 의욕 그 자체가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했었다. 그리고 아빠는 그것이 네 성격과 한국의 나쁜 교육제도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서울대학교 교수이며, 한국에서 제일가는 학자를 꿈꾸는 아빠의 피를 받은 네가 그렇게 될 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봄방학 동안, 절(뉴저지 주에 있는 한국사찰)에 가 있느라 불편했을 줄 안다. 그러나 아빠는 그 정도의 일이 한 남자가 인생을 사는데 있어 별로 고생되는 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네가 만일 철이 있는 아이라면 절에 있는 동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으리라고 아빠는 생각한다. 우선 너는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깊은 사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삶에 대하여, 미래에 대하여 깊이 성찰하여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절은 바로 그와 같은 명상을 하는데 가장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원래 절은 그러한 목적으로 설립된 집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스님은 항상 속세를 벗어나 외딴 절에서 홀로 사색하고 수행하는 것을 즐겨한다.

홀로 있고 사색을 하면 자연 책을 가까이 하게 된다. 그리고 무슨 책이든 홀로 책을 읽는 습관을 기른다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매우 고귀한 일이다. 학교의 공부도 일차적으로 홀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펼쳐들고 읽는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절에 있는 동안 사색과 독서하는 일에 훈련이 되었다면 학교에 돌아온 후의 학습 태도도 많이 달라질 것이고 성적도 향상될 것이다.

또한 절에 있게 되면 규칙적인 생활과 인내심을 배우게 된다. 이 역시 학교 공부를 하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덕목들이다.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는 정돈되고 가라앉은 마음으로 홀로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인내심을 갖고 사색하며 책을 읽는 일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이와 같은 태도가 누구보다도 너에게 가장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 까닭에 아빠는 이와 같은 생활태도를 함양하는 데 있어서 그 어떤 곳보다 적합한 장소라 할 절에 네가 가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홍석아, 지난 여름, 너를 미국에 떠나보내면서 아빠는 올 한해가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누누이 되풀이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제는 아빠가 이를 다시 강조하지 않더라도 네 자신이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올해 토플 시험이나 SAT 시험 성적이 잘 나와야만 네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빠는 한국에 있고, 영어도 잘 못하며, 미국에 대한 정보도 접하기 힘드니까 이제 네가 대학입학에 관한 모든 문제를 진지하게 알아보고 상담하고 결정해야 된다.

홍석아. 아빠는 항상 너를 믿고 있다. 너의 재능과 지능이 우수한 것을 믿는다. 네가 철이 들어 그 잠재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뛰어난 인물이, 조국과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삶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예전이나 지금이나 굳게 믿고 있다. 그러한 믿음 때문에 아빠는 앞 뒤 가리지 않은 채 우리 가정의 분수에 맞지도 않는 너의 미국유학을 결행시키지 않았니? 문제는 너의 능력이나 재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가짐, 너의 인생태도에 있는 것이다. 아빠는 네가 하루빨리 철이 들어 네 인생관이, 네 마음가짐이 새롭게 확립되기만을 고대할 뿐이다.

1999년 3월 25일 서울에서 아빠가

오세영 시인이 아들에게 보낸 편지.
오세영 시인

오세영
1965년 <현대문학>에 ‘새벽’이, 1966년 ‘꽃 외’가 추천되고, 1968년 ‘잠깨는 추상’이 추천 완료되면서 등단하였다. <반란하는 빛> 등 수십 권의 시집과 산문집, 논문집 등을 냈다. 서울대 교수,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시인협회상, 녹원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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