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등과 연등축제의 유래

현우경 ‘빈자일등'에서 유래

축제 형태 연등회 일제 때 단순행렬 변질

풍년제와 융화 시행… 고려 때 정착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전국이 지혜의 빛으로 환해졌다. 산사에서 도시의 대로변까지 오색의 연등이 걸려 부처님오신날을 알리고 있다.

등은 향과 함께 부처님전에 올리는 중요 공양물 중에 하나다. 향이 자신의 몸을 태워 세상에 자비의 향기를 퍼뜨린다면 등은 어둠을 물리쳐 밝음을 가져온다. 그래서 향은 자비를, 등은 지혜를 상징한다.

그럼, 이 등을 처음 밝힌 때는 언제 일까? 또 지금처럼 공장에서 만들어져 나온 철골이나 연잎등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불교에서 ‘등'을 이야기 하면 현우경에 나오는 ‘가난한 여인의 등 공양(빈자일등-貧者一燈)'에서 찾을 수 있다. 부처님이 영취산에 계실 때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지극한 정성과 발원으로 밝힌 등불이 밤이 깊도록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을 본 부처님께서 ‘이 여인은 등불공양의 공덕으로 성불할 것이며 수미등광여래라 불릴 것이다'라고 수기를 주었다.

이 일화 속엔 사밧띠(舍衛城)의 파세나디왕이 석달동안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옷·음식·침구·약 등을 공양하고 수만 개의 등불을 켜 연등회(燃燈會)를 열었다는 기록도 함께 나온다.

경전속의 등 역사가 이렇다면 우리나라 연등행사의 역사는 어떨까?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보면 연등회는 신라 진흥왕 12년(551) 팔관회와 더불어 국가적 행사로 열렸으며, 연등행사가 기존 풍년제와 융화돼 매년 정월 15일에 열렸다고 기록돼있다.

이런 연등행사는 고려시대에 와서 성행했다. 연등회는 팔관회와 함께 고려의 2대 명절로 정착했다. 주관처로 연등도감을 두었으며, 음력 정월 보름에 국왕과 온 백성이 풍년을 기원하면서 궁궐부터 시골까지 갖가지 화려한 연등을 밝혔다.

특히 《고려사》에 보면 고려 23대 고종32년(1245년) 최충헌의 아들 최이가 연등행사 날짜를 초파일로 옮겼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현재 연등행사의 유래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억불과 배불로 불교가 핍박받던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가 중심의 행사는 중지됐다. 하지만 대도시 상인들을 중심으로 민간에서는 지속됐다.

전통등연구원 백창기 대표는 “조선시대 말 경제가 혼란해 지면서 연등행사는 거의 자취를 감춘 것으로 보인다”며 “불가에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해 최근에 이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백 대표는 “일제시대에 일본불교가 들어오면서 축제가 아닌 행렬식 단순행사로 변질됐다”며 “다양한 사료를 통해 연등축제와 등을 복원하고 있지만 남아 있는 자료가 부족해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해방 이후에는 조계사에서 출발해 종로4가 - 을지로 - 시청앞 - 안국동을 돌아 조계사로 돌아오는 제등행렬을 했다. 동국대학교도 조계사까지 자체적으로 제등행렬을 했다. 부처님오신날이 공휴일로 제정된 이듬해인 1976년 여의도 광장으로 출발지를 옮겼으며 1996년부터 현재 출발지인 동대문운동장으로 옮겨왔다. 더불어 ‘연등축제'라는 명칭도 이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

■ 연등의 변천사

▲북한에서 발행한 ≪조선의 민속≫에 나오는 전통등 도판.

대나무 종이燈에 다산·건강 기원 왜색·팔각·연꽃등 거쳐 전통등 활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홍석모, 1849년)》를 보면 연등행사에 사용된 등의 종류는 40여 종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시대 운종가(현 종로)의 등 파는 집은 오색찬란함과 기이함을 자랑했다. 이 등을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등을 사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도 하고 집 앞에 대를 세워 달기도 했다.

하지만 운종가에서 파는 등은 가격이 비싸 대다수 서민들은 가정에서 등을 가족 수 만큼 만들어 달았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 씨가 많거나 알이 많은 석류등, 수박등, 마늘등 등을 달았고, 무병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거북등, 학등 등을 달았다. 그밖에도 잉어나 호랑이, 표범 등 각종 동물이나 사물, 글씨, 과일, 꽃, 어류 등의 모양을 본 딴 등을 달았다. 또 영등이라는 것이 있는데 등 안쪽에 호랑이, 이리, 사슴, 노루 등의 모양으로 자른 종이를 끼워 넣어 등 안에서 회전하게 함으로써 등에서 비추이는 그림자를 감상하기도 했다. 이 등은 회전등, 주마등이라고 한다. 등의 재료로는 주로 종이가 쓰였으나 비단이나 헝겊을 사용하기도 했다.

1968년 법주사와 신흥사 등에서 수행했다는 파라미타청소년협회장 도후 스님(당시 세납 19세)은 “당시는 전구가 보편화 되지 않아서 양초를 사용했고 철골이나 연잎 등도 지금처럼 보편화되질 않았다”며 “요즘 나오는 음료수 병 같은 것에 지금의 연잎 크기만 한 종이를 여러 장 댄 다음 실로 꽁꽁 묶고 가운데 병 넓이만큼 구멍이 뚫린 판자(누름판)로 위에서 아래로 눌러 내면 지금의 연잎 같은 종이들이 만들어진다”면서 그걸 지금의 연잎 말듯 말아서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스님은 “등살도 대나무를 이용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처럼 각진 연등이 아니라 곡선형 연등이 만들어 졌다”며 “초로 등을 밝혔기 때문에 법당 내부에는 화재를 대비해 등을 잘 안 달고 주로 법당 앞마당에 달았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 지금처럼 거리 곳곳에 등이 걸린 것도 얼마 않았고, 그 당시에만 해도 사찰 인근에만 조금 달았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는 전문기 씨(60, 서울 이문동)는 “지금처럼 오랫동안 등을 안 달고 부처님오신날에 맞춰 1~2일정도만 걸곤 했는데 법당 내부에 등을 달 경우 신도들이 기도하며 불이 안 나게 지키곤 했다”며 “물고기 모양의 등이나 수박등 등은 스님들이 만들었고 주로 법당 앞을 장엄했다”고 설명했다.

초파일이 다가오면 신도들이 사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울력하는 모습도 예전과 다른 풍경. 전문기 씨는 “지금처럼 신도들이 함께 울력을 한 것도 몇 년 안됐고 사중에서 자체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부처님오신날과 같이 큰 행사가 열릴 땐 인건비를 주고 인부를 부리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1960년대 까지 해인사 등 경상도 지역에서 등을 만들던 김영달옹(1960년대 말 돌아가심). 사진=전통등연구원 제공조선시대와 일제시대를 거쳐 소멸해 가던 다양한 등들은 사찰과 1960년대 말 사망한 김영달 씨 등 몇몇 장인에 의해 명맥이 유지됐다.

특히 김영달 옹이 그려놓은 ‘무격행차도',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의 민속》 등에 나온 등의 그림과 종류 등도 중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현재 사찰에서 많이 사용하는 등은 야외의 경우 비가와도 젖지 않고 보관이 편리한 비닐주름등이 주로 쓰이고, 법당에는 연꽃등, 팔각등 등이 주로 쓰이고 있다.

10여 년 전까지도 사용되다 최근 점차 사라져가고 있는 왜색등(위·아래에 검은 틀이 있고 동그란 등)의 경우 언제부터 사용이 시작됐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단지 일본불교가 들어온 일제시대 때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연꽃등의 경우는 영산재의 지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전통등연구원과 봉축위원회가 주최하는 전통등강습회를 통해 전통등 제작법이 많이 보급돼 다양한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수영야류. 사진=전통등연구원 제공

















▲1979년 와우정사에서 개최한 만등불사-전통등 복원. 사진=전통등연구원 제공



▲김영달 옹이 그렸다는 '무격행차도'. 사진=전통등연구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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