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태종 교무부장 유정 스님
정법의 실종

▲천태종 교무부장 유정 스님4月은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달이다.

부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600여년전 진리의 등불로 우리 곁에 오셨다.

부처님 오신달을 맞아 이처럼 부처님을 앙모(仰慕)하는 이유는 그 분의 출신이나 육체의 위엄 때문은 아니다. 생사의 고통과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명쾌하게 밝혀주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우리를 부처님 곁으로 이끄는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흔히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말법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야말로 ‘중생들은 오탁에 깊이 물들고, 수행하는 이는 있으되 정법을 증득하는 이는 없다'는 말법의 시대상에 참으로 걸맞는 시기라 아니할 수 없다. 불자들은 바른 믿음을 잃고, 스님네들은 바른 행을 잃어가고 있다. 불교신행이 오직 현세와 내세의 기복(祈福)으로만 변해 가고 있다. 부처님의 바른 법이 실종 되고 있다는 방증(傍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대집경에서 “말법시대에는 수없이 많은 이들이 수행하나 깨달음을 이룬 이는 참으로 드물다. 정법을 철저히 따르고 행하는 자만이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 라고 말씀 하고 계시다.

지금 이 시대는 바른 수행과 행이 요구되는 시기다. 바른 법과 바른 수행만이 말법의 고해에 한척의 반야용선이 될 것이다.

이달은 부처님이 오신달이다. 부처님의 정법을 마음에 새기고, 관세음보살 염불로 마음에 한송이 연꽃을 피울 때이다.


■ 태고종 교류협력실장 법현 스님
“수행자 입만 무소유 꾸짖을 것”


석가모니 부처님이 우리나라에 오신다면 우리 한국의 불자(스님, 신도)들에게 이렇게 물을 것 같다. 한국의 불자들이 정말 불교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불교라는 이름을 가진 브라흐만교나 힌두교 아니면 기독교를 하는 것은 아니냐고. 또 불교를 한다면서 어찌 붓다의 가르침을 부정하며, 입으로 그것도 남에게만 무소유와 자비희사를 강조하느냐고.

수행자라는 이들은 선이나 교, 율, 염불 그 어느 것을 하든 변함없이 안 가져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덜 가져야 하고 그것도 안 되면 깨끗하게 가지고 깨끗하게 써야한다. 그것을 안 하고 못한다면 나의 제자가 아니라고 준엄하게 꾸짖으실 것이다.

또 불교를 한다면서 어찌 그리 영험이나 초월적인 힘에 기대는 모습만을 불자들에게 강조하며 스스로의 깨우침에는 소홀히 하느냐고 다그치실 것이다. 그리고 한국적 특성을 지닌 불교인지를 제대로 살피라 하실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지는 않는지, 그저 맹목적으로 중국과 일본의 불교를 따라가더니 요즘은 미얀마나 티베트의 불교를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라 하실 것이다. 그것도 제대로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흉내나 내는 것은 불교의 본질도 아니며, 우리불교가 가장 수승한 불교라는 검증되지 않은 오만에 빠지지 말라 하실 것이다.



■ 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 진관 스님
“입만 대승, 실제는 소승 흉내”


▲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 진관 스님이제는 한국불교가 표방하는 대승불교가 되기 위해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눈을 떠, 외국인노동자·도시빈민 등 소외계층에 관심 갖고 사회에 불교의 가르침을 전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 불교는 불·법·승 삼보의 성립과정에서 대승적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깨달음을 위한 자기 수행만을 강조하는 소승적 모습에 머물며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불교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은 불교란 틀에 갇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한국 불교는 입으로는 대승불교다 하면서 실제 행동은 소승불교를 흉내 낸 것이다.

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인 선(禪) 수행은 대승불교의 ‘공(空)'이라는 이상만 있을 뿐, 실제로는 자기 깨침만을 강조하는 소승불교에 머무르는 행위이다. ‘선'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는 잘하는데 그것을 사회에 실천할 방법에 대한 고민이 없어 사회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 사상이 이상을 벗어나 사회 현실에 접목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 제시가 필요하다.








■ 우희종 서울대학교 수의학과 교수
 “제도틀 벗어나 불법 전파해야”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의미는 우리 삶의 진리를 일깨움이다. 부처님은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을 말씀하시며 허망한 것에 끌려 다니지 말고 우리 삶의 주인으로서 살아가기를 가르쳤다. 이는 연기(緣起)와 무상(無常)에 대한 자각으로 ‘체념하지 않는 적극적 삶의 자세'를 말한다. 서로 연관된 관계(緣起)를 인식하고, 그 고정되지 않고 변화하는(無常) 관계에 대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진리를 아는 것은 초심(初心)으로서 내 마음을 열고 주위를 바라보는 것이며, 이는 ‘깨우침'이 아닌 ‘깨어 있음'과 뜻을 같이 한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열리고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종종 삶에서 무엇을 잃고 왜곡시키고 있는지 되돌아보지 않고 ‘체념'하는 모습을 보곤 하는데, 이는 ‘관계의 단절과 왜곡'이라는 또 하나의 폭력으로 결코 진리의 삶을 살고자 하는 모습이 아니다.

이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범사에 감사하며 날마다 부처님오신날이 돼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고통 받고 있는 이웃도 나와 다름 아니듯(不二)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이를 위해 각 종단은 제도안에서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 불법을 전파하며 현대인에게 다가가려는 고민이 필요하다. 

■ 윤청광 방송작가
“승가, 하화중생 외면 안된다”


최근 불교계를 바라보면 상구보리는 있으나 하화중생은 미흡해 보인다.

대승불교의 이념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다. 이러한 이념은 불교와 스님의 존재 이유라고도 생각된다. 부처님이 오신 의미이기도 하다.

물에 빠진 중생을 구해야 하는데 수영만 즐기고 있다. 능력 있는 스님은 물에 뛰어 들지 않고 아직 미흡한 스님은 물에 뛰어 드는 경우도 많다. 중생제도를 등한시 하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일부 스님들의 경우이긴 하지만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경우도 주변엔 많다. 고급차를 타고 고급 음식점에 고급 가사 장삼 등 무소유를 지향해야할 스님들의 이런 모습은 불자들의 신심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하화중생의 이념에 맞지 않는 모습들이다.

다르게 말하면 현재의 불교가 가는 길은 목적과 실천이 상이하다는 것이다. 스님들의 이런 모습은 바라보기에 답답하다.



■ 이혜자 성균관대학원 예절ㆍ다도 겸임교수
“계율 강조보다 현대인에 감동 줘야”

불교는 부처님오신날 축제 분위기도 좋지만 사부대중은 사회적으로 재환원과 봉사 등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실천봉사가 잘 된 기독교에 비해 불교는 ‘희생과 배려, 보살정신'을 강조함에도 정작 봉사는 뒷전일 때가 많다. 가톨릭 신부님과 수녀님은 불우이웃돕기 등 봉사에도 전문적ㆍ체계적인데 반해 불교는 그렇지 못하다.

부처님오신날 등 행사 때에만 절을 찾는 신도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불교는 철학이 있는 과학적 종교임에도 많은 대중들은 ‘내가 잘 되고 본다'는 기복에 치우치고 있다. 불교는 현대인들이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싶은 귀의처가 돼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불교는 현대인에게 음악처럼 화합과 정서적 안정을, 예절처럼 남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음악과 예절이 감동을 주듯 불교 역시 계율만 강조하지 말고, 현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각 연구단체는 기존 연구의 답습보다는 현대에 맞는 포교법을 연구해야 하고, 딱딱한 지식보다는 감동을 주는 교리서를 발간해야 한다. 각 사찰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는 포교에 고민해야 하며, 스님들은 한층 발전된 설법과 현대화된 포교 방식으로 불법을 전파해야 한다.



■ 김인숙 조계종 불교여성개발원 원장
불교계 사회 공헌도 걸음마 수준

지금 우리 사회는 청소년·외국인 노동자·저출산고령화·어린이 유괴·한미 FTA타결로 인한 농촌 피해 문제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재돼 있고, 종교의 역할이 필요한 부분도 많다.

몇해 전부터 개신교나 가톨릭에서는 저출산·고령화 문제가 자기 종교의 ‘존폐위기'라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미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 추진하고 있다. 타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참여하고 있는 실정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아직도 불교계 내부에서 대사회적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도가 낮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불교계 행사에 가보면 항상 ‘2천만 불자'를 운운한다. 그럼에도 위상에도 걸맞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중들이 힘들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종교가 어찌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라 말할 수 있겠는가. 부끄럽고 아쉽다.

아직 늦지 않았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앞으로 불교계가 해야 할 일은 마음을 열고, 눈과 귀도 열어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종교로 인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추락한 불교의 위상을 높이고 1천 5백년 간 민중들과 함께 해 온 불교 본연의 임무이자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일 것이다.



■ 박광서(서강대 물리학 교수)  종교자유정책연구원 대표
“소외된 이웃 위한 등 켜야”

불자들 위주의 부처님오신날 행사는 지양 해야 한다.

전 세계인의 축제가 되고 있는 부처님오신날, 그런 부처님오신날을 단순히 즐겁게 노는 날로 보낼 것인가. 그 의미를 되살려 잘 살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게 잘 살았는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가까운 예를 들어 봉축 기간이 되면 각 사찰은 연등 접수를 받는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라면 연등을 하나 달아도 ‘나'만을 위한 연등이 아닌 소외받거나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한 등을 달아야 할 것이다.

더욱 의미 있고 값진 부처님오신날을 만들기 위해 사부대중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멋진 사진을 제공하고 영상을 제공하기 위한 틀에 박힌 행사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은 많은 이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길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한다.

발전된 부처님오신날을 만들기 위해서는 선행돼야 할 부분이 있다. 불교계가 우리 사회에서 위상에 맞는 역할을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기반성이다. 불가전통에 있는 자자포살과 같이 스스로 참회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 그래서 불자들을 비롯한 참가자 전체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축제가 돼야 한다.


■ 전 불교언론인회 회장 공종원
“경쟁적 물질 집착 자성 필요”


부처님은 중생을 구제하려고 세상에 나투셨으며, 모든 사람을 만족스럽게 잘 살게 하려는 것이 그의 뜻이다.

하지만 현재 불교계는 물질만능주의에 좌우되는 경향으로 본래의 뜻을 잃고, 모든 불사가 돈만 많이 들이면 되는 것인 줄 착각하고 있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등을 화려하게 달고, 축하행렬이 진행되는 것은 축제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괜찮지만 너무 과열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경쟁적으로 물질적인 부분에 집착해 화려하게 보이기만 하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줄 알고 있는데 자성이 필요하다.

또 스님들이 보시금을 아깝게 생각하지 않고 너무 쉽게 써버리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스님들이 신도들의 정성이 모인 보시금을 아끼고, 불우한 이웃을 돕는 등 꼭 필요한 곳에만 사용해 불교계 내실을 다져야 더욱 의미 있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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