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말을 경청(傾聽)해 주는 것은 따뜻한 배려이자 건강한 소통 방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기보다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말하기를 잘하고 좋아한다고 해서 소통이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말하기보다 듣기를 잘하는 사람이 소통을 잘 할 뿐 아니라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형성합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신망을 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 주변엔 말이 지나치게 많아 비난받는 사람은 있지만 남의 얘기를 잘 들어준다고 해서 비난받는 사람은 적습니다. 이런 점에서 경청은 배려이고 상대에 대한 예의입니다. 미국의 의학자이자 시인으로 유명한 올리버 웬들 홈스(Oliver Wendell Holmes, 1809~1894)는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영역이다”며 경청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남의 말을 들어준다고 해서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도 예의가 있어야 하고 방법이 따라야 합니다. 경전에 나오는 다음의 일화는 남의 말을 듣기 위해 필요한 자세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우다이(優陀夷) 존자가 어느 때 코살라 카만다야 마을 암라 동산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 동산은 여자 바라문 베라카트야나 소유였는데, 마침 그녀의 제자들이 나무를 하러 왔다가 존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존자의 평화롭고 자비로운 얼굴에 마음이 움직여 설법을 청했습니다. 존자는 그들을 위해 진심으로 성의껏 설법하셨습니다. 그들은 스승 베라카트야나에게 돌아가 말했습니다. “스승님! 저희들은 지금 암라 동산에 와 있는 우다이 존자로부터 설법을 듣고 오는 중입니다. 그는 진리에 대해 막힘없이 친절하게 가르쳤고 우리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들은 그녀는 존자를 만나 설법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우다이를 초청해 공양을 올리기로 하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우다이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다음날 아침 그녀의 집을 방문해 공양을 받았습니다. 공양이 끝났을 때 그녀는 좋은 신을 신고 높은 자리에 앉아서 우다이 존자에게 법을 청했습니다. 그러나 무슨 까닭인지 우다이 존자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다음날에도 공양을 올리고 법을 구했으나 존자는 설법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존자가 설법하지 않는 것은 아마 당신이 가죽신을 신고 높은 자리에 앉아 거만하게 설법을 들으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존자는 진리를 존중하는 사람이니 예의를 갖춰 겸손하게 법을 청해 보시라.” 그녀는 이 말을 듣고 다음날 신발을 벗고 겸손히 법을 청하니 그때서야 존자는 성의를 다해 설법하셨습니다. 〈잡아함경〉 9권 ‘비뉴가전연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오만한 사람에겐 어떠한 말도 약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귀를 열고 남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선 먼저 듣고자 하는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치 학교에서 수업을 받는 태도가 먼저 옳게 갖춰져야 선생님의 가르침을 빨리 익힐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귀를 기울이는 자세가 되어 있을 때 학습효과가 극대화된다는 분석과 궤를 같이 합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아는 사람은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즉 경청은 대인관계의 기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은 대인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주변의 증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입이 하나, 귀는 두 개가 있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뜻이다”라는 가르침이 탈무드에 나옵니다. 또 영국 속담에 “지혜는 듣는 데서 나오고, 말함으로써 후회가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말하기보다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매순간 일상의 삶에서 남의 말을 들어주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나와 다른 의견을 피력하거나 공동의 주제에서 벗어나 엉뚱한 말을 해대는 이의 말에는 대단한 인내심이 요구됩니다. 훌륭한 경청은 귀로 듣는 게 아닙니다. 가슴으로 듣는 것입니다. 내 마음 안에 상대방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소통이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이청득심(以廳得心)이란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몽골제국을 일으킨 칭기즈칸은 “배운 게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지금의 나를 가르친 것은 내 귀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듣는 것과 ‘경청’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귀로서 듣는 것이 소리라면 경청은 마음으로 상대방의 기분까지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청은 불교에서 말하는 ‘동사섭(同事攝)’의 마음가짐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는 말을 들어주는 자세도 보시라 할 것이고, 거기에 인지상정을 더하는 것 또한 동사섭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소통과 배려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대화의 단절이 소외를 불러오고 극단적 소외가 사회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범죄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때 다른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경청의 자세야말로 따뜻한 불자의 자세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