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까야, 부처님 원음 담긴 보물창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중생들이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세상에 출현하셨다. 깨달음은 얻은 후 45년 간 세상을 돌아다니며 진리를 설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가르침은 부처님 열반 후 결집을 통해 초기경전(니까야)으로 후대에 전해졌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중국불교의 영향으로 북방불교가 전해져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남방불교의 초기경전은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풍토 속에서 30년 가까이 초기경전 역경(譯經)의 외길을 걸어온 이가 있다. 전재성(63) 한국빠알리성전협회 회장이다. 지난달 12일 그를 만났다.

사춘기 방황, 불교로 극복

10대의 전재성은 열등감에 빠져 힘든 시기를 겪었다. 4살 무렵 입은 전신화상이 원인이었다.
“그때는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이라 집에 부엌이란 공간이 별도로 없었어요. 단칸방 출입문 앞 작은 공간이 부엌이었죠. 어머니가 밥을 지으려고 팔팔 끓는 물을 대야에 담아 문지방에 놔두고, 무를 썰고 계셨어요. 어린 나이에 무가 먹고 싶어서 문을 열고 ‘엄마, 나 무 줘’라고 말하는 찰나, 형이 ‘나도’ 하면서 실수로 저를 밀어버렸죠.”

고꾸라지면서 작은 몸이 대야에 빠졌다. 입고 있던 스웨터가 뜨거운 물을 흠뻑 머금으면서 화상은 더욱 심해졌다. 서둘러 병원에 갔지만 상태는 심각했다.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했을 정도로. 다행스럽게도 아버지의 정성과 꾸준한 민간요법이 그의 목숨을 건졌다. 전재성은 이 사건 이후 목욕탕이나 수영장 등 사람들이 자신의 화상자국을 볼 수 있는 곳을 가지 않았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시절까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중학교 진학 후 화상 자국을 본 친구들이 그를 ‘얼룩소’라고 놀렸다. 예민한 사춘기, 콤플렉스는 방황으로 이어졌다. 불교와의 만남도 이 즈음이다.

“경주 석굴암 사진을 처음 봤습니다. 사진을 보고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당시 생물선생님이 참선에 대해 알려주셨어요. 일주일에 한번 씩 모여 참선과 간단한 불교교리를 공부하는 수행반이었죠. 불교가 뭔지 전혀 몰랐지만, 그때부터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관심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수행반에 꾸준히 참석하면서 불교관련 서적과 종교, 철학 등의 분야에도 관심을 가졌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메를로 퐁티, 사르트르,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 등 실존철학 관련 서적을 주로 읽었다. 스리랑카의 고승 월폴라 라훌라가 초기경전의 핵심을 요약한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를 읽고 깊은 감동을 받기도 했다. 육체에 새겨진 상처로 인해 생겨난 열등감은 이렇게 다양한 사상서를 읽으면서 점차 옅어져갔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학업으로 인해 불교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다. 공부와 현실 사이에서 부대끼는 삶을 살고 있을 때 문득 현실을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가를 결심한 것이다.

“‘욱’하는 마음으로 출가를 결심해 버스를 타고 오대산으로 향했습니다. 한밤중 오대산에 도착해 절을 찾아 올라가는데, 현재의 제 상황이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더군요. 잠시 걸음을 멈춰 생각했죠. ‘남아 있는 가족들은 어떻게 하지?’, ‘과연 출가를 한다면 지금 이 삶이 행복해 질까?’ 한참동안 생각을 해보니 출가를 해도 궁극적인 해결책은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지더라고요. 그래서 출가에 대한 마음을 접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요.”

집으로 돌아온 후 마음을 다잡고 학업에 열중해 서울대 농과대학(현 농업생명과학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농대불교학생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았다. 자연스레 문리대불교학생회, 법과대불교학생회 등 단과대 불교학생회와 어울렸고, 서울대 불교학생회연합인 ‘총불회’ 활동을 하게 됐다. 이 시기 불교 사회참여운동에 나섰고, 민중불교 이론에 빠져 군사정부의 요주인물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그는 서울대 총불회 활동을 계기로 한국대학생불교연합 총무부장과 제13대 중앙회장을 역임했다.

유학 중 초기경전 번역 발원

대학 졸업 후 취직이 어려워 잠시 방황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안양천을 산책하는데 사는 게 너무 괴로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가만히 앉아 흐르는 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심코 친구가 준 책을 폈다. 20세기 최고의 요가 수행자로 평가받는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자서전 이었다.

“우리가 생각한 것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가고 싶어 ‘죽자’라는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온 몸에 특별한 변화가 일어났어요. 숨(호흡)이 느려지면서, 믿기지 않겠지만 제가 숨 쉬는 장면이 보였어요. 그러다 레이저 광선 같은 게 제 몸으로 들어오더니, 이마가 있는 곳에 다이아몬드처럼 박히더군요.”

취업도 중요하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공부를 했다면, 앞으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와의 만남으로 인도철학에 대한 관심이 커진 전재성은 동국대 인도철학과 대학원에 진학해 석·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198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쾰른 대학에 입학한 후 그 곳에서 독일어로 산스크리트어와 빨리어ㆍ힌디어ㆍ티베트어를 배웠다. 이듬 해 옮긴 본(Bonn)대학에서 인생의 스승을 만난다. 힘든 유학생활에 지쳐 대학 호숫가를 산책할 때 그는 홀로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잘 다듬어진 나무인형처럼 앉아 있는 그와 만남이 없었더라면,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기회를 놓쳐버렸을 겁니다. 천천히 벤치 옆으로 다가가 그의 옆에 앉으니 노이야르 선생이 썩은 당근을 깎아 저에게 건네더라고요. 그의 얼굴을 쳐다보니 두 눈에서 밝은 빛이 샘솟고 있었어요. 아주 맑고 깊은 눈동자였죠.”

거지성자로 불리는 페터 노이야르와의 첫 만남이었다. 처음 봤을 때 예수가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노이야르는 불교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철저한 두타행(頭陀行ㆍ고행)의 삶을 실천하던 ‘유명한 노숙자’였다. 그는 나무 밑에서 수행을 하고 잠을 잤다. 또 빨리어로 된 경전을 읽었다. 청년 전재성은 그 후 유학생활을 마칠 때까지 6년 동안 노이야르와 만남을 가졌고, 그를 통해 독일의 초기불교에 대한 연구 상황을 알게 됐다.

“독일은 이미 1910년부터 이미 초기경전을 번역했어요,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당시 번역은커녕 초기불교 경전에 관심조차 없었죠. 그 같은 사실이 너무 부끄럽고 충격적이었어요. 그때 한국에 돌아가면 부처님의 살아있는 언어인 초기경전을 번역해야겠다고 다짐했죠. 노이야르 선생도 저에게 한국에 돌아가면 빨리어 경전을 번역하는 게 좋겠다고 힘을 줬죠.”

다수의 원력, 譯經 밑거름

7년의 유학생활 끝에 1989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동국대에서 박사학위(인도학, 티베트학)를 취득했다. 귀국 후 초기경전 번역에 나서자 주요 언론에서 큰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정작 불교계에서는 전혀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세계일보에서 후원을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하지만 문 선생(문선명)이 만든 언론사에서 지원을 받는 건 아니란 생각에 거절을 했죠. 그 후 돈연 스님이 설립한 경전연구소에서 빨리대장경의 경장인 〈쌍윳따니까야〉 번역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1992년 연구소에 화재가 나 1ㆍ2권 번역 원고가 일부 소실되고, 작업은 중단됐어요. 이후 제가 스리랑카 빨리불교대학 한국분교(한국불교대학) 교수를 맡는 바람에 번역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됐죠.”

한국불교대학의 후원으로 〈우리말 빨리어 사전〉 2권(어휘ㆍ문법편)을 출간했다. 하지만 이 대학은 얼마못가 문을 닫고 만다. 그는 초기경전을 연구하던 고익진ㆍ최봉수 박사 등과 세미나를 열며, 번역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번역을 해도 후원자가 없어 출간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도법 스님(현 조계종 화쟁위원회 위원장)을 만나게 됐다. 스님은 “10년 전부터 니까야를 번역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돼가고 있느냐”고 근황을 물었다. 그는 “출간을 하려면 종잇값이 있어야 한다”고 푸념을 했고, 스님은 동학사 등 여러 절을 돌아다니며 시주를 받아 출간 비용을 후원해 주었다. 당시 조계사 지홍ㆍ봉은사 원혜ㆍ실상사 수경ㆍ동학사 일연 스님 등이 그를 도와줬다.

후원에 힘입어 1999년 〈쌍윳따니까야〉 3권과 부록 ‘초기불교의 연기사상’ 1권을 출간했다. 이후 행원문화재단이 수여하는 역경상을 수상했고, 정대ㆍ월주ㆍ성타 스님 등의 도움으로 〈쌍윳따니까야〉 4~7권을 출간했다. 2001년 8~9권을, 2002년 드디어 우리말 〈쌍윳따니까야〉 총 11권을 완간했다. 이후 〈맛지마니까야(2003년)〉, 〈앙굿따니까야(2008년)〉, 〈디가니까야(20011년)〉 등을 잇달아 완역했다.

그는 앞서 1997년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창립했다. 빠알리성전협회(The Pali Text Society)는 1881년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 박사가 영국 옥스퍼드에서 창립한 단체로, 빨리어 성전 보급과 영어 번역 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다. 그는 당시 빠알리성전협회장 리차드 곰브리지(Richard Gombrich) 박사의 승인을 맡아 한국빠알리성전협회를 창립했다. 초창기에는 ‘앎과 봄’이라는 소식지를 발행하면서 초기경전 알리기에 많이 노력했다. 하지만 재정 악화와 인력 부족으로 활동은 축소 됐고, 현재는 초기경전 번역에만 집중하고 있다.

사회 갈등 해결책 초기경전에

“초기경전에는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대승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허구적인 신화, 신격화 된 부처님이 아니죠. 또 오늘날에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피부에 와 닿는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시공을 초월한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한 구절이라도 깊이 새기고, 생각한다면 세상을 살아가는데 당장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전재성 회장은 초기경전의 매력을 부처님의 인간적인 모습, 우리 삶과 밀접한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사회 갈등과 대립을 초기경전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초기경전에 이미 성소수자ㆍ안락사 등의 문제를 부처님께서 언급하는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는 끝으로 불교계와 불자들에게 초기경전에 대한 관심을 당부했다. 초기경전 번역을 서원한 지 30년 전. 한 평생 초기경전 번역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역경가 전재성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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