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티 바히 가람터마치 돌로 쌓은 산성 같다. 우선 그 규모가 대단하다. 현재 발굴돼 노출된 유지 외에도 미발굴의 왼쪽 두 개 큰 산봉우리까지 무너진 석조 벽들이 간간히 노출돼 있어 그 크기를 짐작하기 조차가 어렵다.

간다라의 3월 말 기온은 한국 보다 약간 더 따뜻했다. 한국 불교나 중국 불교에서는 볼 수 없는 옛 간다라의 가람에 대한 호기심을 안고 산중턱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입구의 산문 기둥부터가 돌로 쌓아올린 석조 가람이다. 석조에 사용된 돌은 간다라 지역에서 나오는 암록색의 편암(片岩)과 천매암(千枚岩)이다.

탁티 바히가람은 스와트에서 페샤와르로 가는 도중의 마르단 지역에 위치한 전형적인 간다라 산악 가람이다.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 후 7세기까지에 걸쳐 축조돼 간다라 지방에서 가장 오랫동안 번성했던 가람이다. 탁티 바히 사원은 간다라 불교의 수행 도량으로서 뿐만 아니라 아니라 이 곳을 지나는 인도 · 중국 · 한국의 많은 승려들이 일시 유숙하기도 하는 국제적인 가람이었다. 현재까지의 발굴 결과로는 한 때 1천명 정도의 승려가 살았던 대규모 비하라(종합사원)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① 탁티바히가람터 승원 : 한국 · 중국의 많은 승려들이 유숙하기도 한 고대 간다라의 국제적 사원이었던 탁티 바히 사원의 승원은 사방 19m의 정방형으로 15개의 승방이 설치돼 있다.

1869년 영국군에 의해 발견돼 1907~1908년 마샬의 지도 아래 최초의 학술발굴조사가 있은 후 1929년 까지 계속 발굴돼 현재의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정리된 유규는 북으로부터 남으로 승원 · 중원 · 탑원 · 선원 · 3탑원 등의 순으로 배치돼 있다. 승원은 19m 정방형 규모로 동면을 제외한 3면이 석축벽이고 15개의 승방이 설치돼 있다.

탑원은 중앙에 대탑이 배치됐고 서 · 남 · 동면에 불상을 봉안했던 조그만 방들이 대탑을 향해 개방돼 있다. 중원은 탑원과 승원 사이에 위치해 가로 35m, 세로 15m 규모고 원내에는 35기의 봉헌탑과 불당의 유지가 있다. 선원은 중앙에 통로가 있고 좌우로 5개씩의 선방을 배치했는데 동쪽의 선방이 서쪽 선방 보다 크다. 동쪽 선방은 고참 수좌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방은 앞에 넓은 광장을 갖추고 있으며 높은 담과 절벽에 면해 있어 매우 폐쇄된 공간 구성을 하고 있다. 3탑원은 선원 남쪽에 위치해 대형탑 1기와 소형탑 2기가 자리하고 있다. 대탑 기단 남쪽 면에는 인도 고린도식 주두(柱頭)를 갖춘 탱주 사이에 선정인(禪定印)을 한 작은 불상 1구가 모셔져 있다.

달마라지카 가람터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후 1세기에 걸쳐 창건된 탁실라 불교 유적의 하일라이트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 제3대 아쇼카왕 (B.C.320~B.C.185)이 세웠던 8만4천개의 석가사리탑 중의 하나로 추정되는 달마라지카 대탑(일명 법왕탑)을 비롯한 대규모 가람터가 보존돼 있다.

② 죠울리안가람터의 대탑 : 가람 탑원의 중심인 대탑 기단부 사방에 감실을 만들어 돋을새김한 불보살상을 모신게 두드러진 특징이다. 탑은 훼멸돼 없고 원형의 탑신 밑받침만 남아있다.
대탑의 규모는 원형 평면의 직경이 45m, 높이 13.7m의 크기로 기단의 동서남북에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이 설치돼 있다. 탑 둘레에는 8각 평면으로 봉헌탑과 불당 · 승방 건물지가 있다. 법왕탑(法王塔)의 기단부 축조법은 B.C. 1세기에 유행했던 루브레식(자연석과 각석재로 메우면서 쌓은 野石積式)이다. 탑의 북쪽 불탑지에서 그리스왕 조울리우스의 은화 28개가 발굴됐는데 은화의 명문이 B.C. 125년이다.

법왕탑의 서쪽 계단 부근 축대 적심에서는 샤카왕조의 아제스 2세 화폐 3백55개가 발굴되기도 했다. 발굴된 불상으로는 봉헌탑 기단면에 조각됐던 1~3세기 간다라 양식의 석불이 있다.

 죠울리안 가람터달마라지카 가람과 함께 탁실라의 대표적 간다라 불교 사원의 하나로 2세기 후반부터 4세기에 걸쳐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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