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선국사 창건한 천여 년 역사 관음기도도량

관세음보살입상ㆍ미타전 등 28년 걸린 중창불사


서울 남쪽에 있는 유서 깊은 관음 도량, 관음사를 찾았다. ‘관음사'는 우리나라 절 이름 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관음에 대한 사람들의 소망이나 그 영험을 믿고 관음을 따라 실천하려는 의지가 간절하기 때문이리라.

관악산 자락에 위치한 관음사는 ‘예술인마을'이라 불리는 남현동 동네 안에 숨어 있다. 주택이 끝나는 지점에 오르막이 나타난다. ‘관음사 가는 길'이라는 표지 만이 그 길을 따라가면 관음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 길은 연주암을 올라가는 등산객들이 하루를 멀다하고 찾아가는 유명한 산길이다. 지금은 도로가 모두 포장돼 차로 올라가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다.


관음사 오르는 길에 보이는 관음대장군과 관음여장군

숨이 조금 찰 만큼의 경사를 오르다 보면 왼편에 장승이 두 개 보인다. 장승에는 각각 ‘관음대장군'과 ‘관음여장군'이라고 적혀 있다. 관세음보살이 여성의 상징으로만 생각하기 쉬운 우리들에게 관음의 양성상징을 보여주는 일례라고 확대해석해도 무방할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장승을 보니 이제 관음사가 지척이다.

관음사 경내로 들어서는 길 앞에는 커다란 주차장과 안내문이 있다. 관음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안내문 옆 담장을 따라가 보니 관음사라고 적힌 작은 일주문 아래 담장 속에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 적힌 비석이 하나 놓여 있다. 그렇다. 마음이 곧 부처다.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는 부처본성을 깨워서 일주문을 통과했다. 일주문 안의 커다란 관세음보살 입상이 이곳이 관음도량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해가 지기 직전의 뉘엿뉘엿한 대기 때문인지 관음사는 푸른 안개 속에 자리한 신비한 하늘 세계와 같았다.

도선국사 창건 비보사찰

관음사는 신라 말 895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비보사찰(裨補寺刹)로, 천여 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관음기도도량(觀音祈禱道揚)이다. 지금은 사찰의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1977년 극락전 해체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과 여러 고서에 따르면 숙종 때 극락전을 개축했다는 기록이라든가 주변에 승방벌이라는 마을이나 승방교라는 다리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사실로 추론해 볼 때, 그 규모나 기능이 작은 사찰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음사 대웅전 옆에 있는 관세음보살입상.

지금의 건물들은 1973년 종하 스님이 주지로 부임한 후 사찰 중흥을 위한 불사를 계획하고 1977년 대웅전 불사를 시작으로 2005년 미타전과 관세음보살입상을 완성함으로써 28년에 걸친 장기 중창불사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대웅전 옆 범종각에서 저녁예불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아무도 보이지 않던 대웅전 앞마당으로 한 보살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손에 경전을 들고 바쁘게 대웅전에 들어가는 보살을 붙잡고 관음사와 관련된 경험을 물어보기로 했다. 예불하러 가는 것을 방해하게 돼 미안했지만 방문 시간의 탓 때문이었는지 다른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보살은 자신의 이야기와 관음사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관음사를 20년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다는 보살은 바로 자신의 딸 이야기를 시작했다. 곧 결혼을 할 딸은 누가 봐도 좋은 곳으로 시집을 가게 됐다고 하면서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또 그녀가 알고 있는 다른 처사님의 아들은 공부를 하고 있는데 단 한 번의 어려움 없이 박사학위를 땄다고 한다. 그 보살은 이 절의 관세음보살은 자식 잘 되게 하는 데는 최고라며 손가락을 세워 보이시더니 대웅전으로 황급히 들어갔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소망 중 자식이 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문득 후일 자식 기도를 하려면 이 절에 와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예불 시간 관세음보살 정근

경내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산세를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한 배려 때문인지 일반적인 사찰의 형세가 아니라 ‘ㄱ자' 형태로 지어져 있었다. 대웅전과 관세음보살상을 지나면 삼성각과 용왕각이 나란히 서 있고, 그 길을 따라 가 보면 ‘불교방송대탑'이라고 하는 9층 석탑이 서 있었다. 탑은 원래 부처님을 대신하는 불사리 등을 넣어놓은 숭배물이다.

후일 탑은 단순한 숭배 대상을 뛰어넘어 신도들이 간절한 소망을 담고 도는 ‘탑돌이'의 대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는데, 불교방송국에서 발원해서 세웠다는 불교방송대탑을 보니 불교방송의 방송포교가 그 탑을 조성하는 마음만큼 잘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이 자리를 신도들은 ‘탑 카페'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그 앞에 서 보니 역시 뒤쪽은 관악산의 바위가 웅장하게 서 있고 앞에는 시내의 불빛들이 별천지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전망은 없는 듯했다. 이곳이 바로 보타낙가산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이제 다시 관음사라는 절 이름을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의 주지 스님들을 한곳에 모셔 놓고 관음사에서 오신 분을 찾으면 수십 명이 넘을 것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그만큼 관음사라는 사찰명은 우리나라 절에 흔한 이름이다. 흔하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중생들에게 관음의 가피가 필요한 곳이 그렇게 많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관음사라는 절 이름은 그 사찰에서는 주로 관음기도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 사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전은 바로 관음경이고 일상의례에서 빼놓지 않는 것은 바로 관음정근이다. 관음경은 법화경ㆍ관세음보살ㆍ보문품을 따로 이르는 말로 관세음보살의 능력으로 고통에 빠진 수많은 중생들을 구제해 준다는 내용이다.

관세음보살 정근은 “나무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南無 普門示現 願力弘深 大慈大悲 救苦救難 觀世音菩薩)……”로 시작하여 멸업장진언(滅業障眞言)과 참회게(懺悔偈)로 끝을 맺는다. 이곳 관음사에서도 예불시간에 이 정근을 30여 분 가까이 독송했다.
예불을 하시는 스님의 독경소리와 목탁소리를 뒤로 한 채 컴컴한 산길을 내려 왔다. 밝은 불도 없는 산길이긴 했지만 관세음보살이 지켜주시고 있다는 느낌이 드니 무서움이 자리할 겨를조차 없었다.                                                         

자은림/ 불교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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