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고 있는 순간 까지만 시를 쓰겠습니다

▲ 일상의 인문학콘서트에 초청된 고은 시인은 한국시가 세계 어느 나라에 비교해도 우수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인의 관심사는 오직 시를 쓰는 것
‘3포 세대’ 더 도전하고 더 강해지길
남북경색 겨레말큰사전 사업 지장 없어

관록이 깊은 시인은 존재 자체가 시다. 시인의 시간과 공간은 시인만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기도 하다. 관록 깊은 시인들이 둘러 앉아 옛일을 추억하는 것은 ‘지난 일’을 ‘오늘의 일’로 재생시키는 또 다른 시창작일 수도 있다. 입춘은 지났지만 봄기운은 아직 멀게 느껴지는 정월 초순 김남조(1927~ ), 고은(1933~ ), 신달자(1943~ ) 시인이 마주앉아 저녁을 먹었다. “두 분이 처음 만나신 게 언제였는지 기억하세요?” 신달자 시인의 질문에 고은 시인이 곧바로 답했다. “음, 1959년이었어요.” 뜻밖이었다고 느껴질 정도로 또렷한 기억은 “역시 고은 선생이야”라는 찬사를 받았다. 김남조 시인은 “어느 때 우리 셋이 같이 심사를 하는데 고은 선생이 신달자 선생을 유심히 쳐다보던 일도 기억나네요. 아마 젊다고 그랬겠지요?” 이러한 추억담이 오고가는 장면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인문학 운동을 기치로 내 건 사람들의 모임 ‘시노래 마을’이 매월 개최하는 ‘일상의 인문학 콘서트’. 2월은 ‘고은 시인의 밤’이었다. 이를 계기로 모인 노시인들이 저녁 식사를 끝내고 예술의 기쁨 2층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가을 편지’와 ‘세노야’를 부르고 있었다. 잘 알려진 대로 두 노래는 고은 선생의 시이고, 예술의 기쁨은 김남조 시인이 남편 김세중(1928~1986) 조각가와 함께 살던 자택을 허물고 새로 지은 문화공간이다. 시노래 가수 신재창의 공연과 시낭송가 현정희 한경동씨의 시낭송 등이 곁들여진 이날 콘서트에서는 오봉옥 시인이 고은 선생과 대담을 나눴다. 편집자

오봉옥:조금 전 관객들이 ‘세노야’를 불렀는데, 이 시를 쓰신 배경이 궁금합니다.

고 은:1960년대 후반 그러니까 68년인가 69년이었는데, 서정주 선생님과 함께 진해 육군대학에 초청되어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군부대의 배려로 군함을 타고 한려수도를 구경할 수 있었는데 박재삼 시인의 고향 삼천포도 가고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배를 타고 다니다가 멸치잡이 배에서 뱃사람들이 멸치그물을 끌어 올리면서 내는 소리를 들었어요. ‘세야’ ‘노야’ ‘세노야, 세노야’ 등이었는데 참 힘 있는 소리였어요. 그게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던가 봅니다. 그 해 겨울 어느 날 종로의 선술집에서 작곡가 최경식과 그의 동생 최양숙, 최양숙의 성악과 동창생 김광희 등이 함께 자리를 했는데, 최경식은 이화여고 음악교사였고, 최양숙은 샹송을 부르는 가수였고, 김광희는 작곡가였어요. 그 자리에서 최경식이 노래를 청하기에 그냥 세노야를 읊조렸는데, 그게 시가 되었고, 김광희는 즉석에서 종이에 오선보를 그려 작곡을 한 겁니다. 이후 양희은이 불러 널리 알려지게 되었죠. 

오봉옥:이 노래가 이런 일화를 품고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시와 노래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십니까?

고 은:시는 원래 노래였습니다. 천년, 5천년, 1만년 혹은 그 이전부터 그랬습니다. 시 보다는 노래가 먼저였고 노래 이전은 감탄사였던 겁니다. 아! 어! 뭐 이런 감탄사에서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표출되고 감동의 표현이 드러난 것이죠. 시는 노래입니다. 둘이 아닙니다. 

오봉옥:행사 전에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김남조 선생님이 “나이 드니까 좋은 게 있다. 깊어지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은 선생님께서는 1958년에 등단 하셨고 그 후 60년여 년 왕성한 시 쓰기를 보여 주고 계십니다. 그런 열정적인 시 쓰기는 어떻게 가능한가요?

고 은:오늘 아침, 문득 시를 쓸 것이 좀 생각이 나서 그걸 쓰려고 시도를 하다가, 이 자리에 오기 위해 집을 나설 시간이 되어 그냥 놓고 나왔습니다. 밤늦게라도 집에 가서 다시 써 볼까 합니다. 허허허. 

오봉옥:부럽습니다. 요즘 선생님의 관심사는 무엇인지요?

고 은:시인에게 뭐 따로 관심사랄 게 특별히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시상을 떠 올리고 시상을 붙들고 사는 것이 시인이어야 합니다. 

오봉옥:선생님께서는 독서를 아주 많이 하십니다. 독서의 분야도 다양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고 은:쓰는 자라고 하여 쓰기만 할 수 없고 읽는 자라고 하여 읽기만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읽는 것과 쓰는 것도 다른 게 아닙니다. 어떤 때는 읽는 것이 쓰는 것보다 행복하고 또 어떤 때는 쓰는 것이 읽는 것보다 행복합니다. 산에서 읽고 바다에서 쓰고 바다에서 읽고 산에서 쓰는 것이죠. 그렇게 읽고 쓰는 것이 왔다갔다합니다. 여러분도 많이 읽으시고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오봉옥:최근 남북 관계가 상당히 경색국면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우려되는 것은 ‘겨레말큰사전’ 편찬 작업에 큰 지장이 생기기지 않을까 하는 것인데요.

고 은:그런 걱정이야 하지 않을 수가 없겠지요. 그러나 작업이 이미 80% 이상 진척을 보이고 있고 그간의 성과를 바탕으로 나머지 작업을 진행할 수도 있으니까, 크게 어렵거나 지장이 많을 것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어찌된다는 것보다는 좀 더 긍정적인 생각으로 추이를 지켜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봉옥:선생님의 역작 <만인보>는 유럽의 어느 고등학교 교과서로도 채택이 되었다고 하던데요. 이것은 어떤 의미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고 은:교과서는 아니고 고등학교 수업의 보충 교재로 채택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 혹은 고대사를 알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들을 발췌하여 교재로 묶은 것이지요. 시는 문학뿐 아니라 문화와 역사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사회든 특수성이 있고 인간의 본질에서 기인하는 보편성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것들을 시를 통해 학습하고 전파는 하는 사례로 보고 싶습니다. 

오봉옥:지구촌 시대인데요. 국제 사회에서 우리 한국문학의 위상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고 은:우리 현대문학의 역사는 1908년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시작되었으니, 현대문학으로 볼 때 100년이 좀 넘는 역사를 가졌습니다. 그동안 우리의 문학은 우리의 몸에 충분히 체화 되었고 그러한 성과는 세계 어느 나라 문학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의 어느 문학에 대해서도 그저 배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학을 가르치고 전할 수 있는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우리 시가 좋아졌다 혹은 발달했다는 것은 다른 나라의 문학도 성장했다는 것과 같이 볼 문제이므로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직 우리 문학을 세계에 알려나가는 방식이 부족하기도 하니까요. 

오봉옥:요즘 젊은 사람들을 ‘3포 세대’라고 합니다. 취업과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이지요. 이 힘든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고 은:이 문제가 한 마디 말로 이해되고 위로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 시대 젊은이들의 절망을 이야기 하는 것에는 한시대의 모든 조건들이 동원되는 것이니까요. 정치 경제 문화적 조건이 같이 만들어 온 절망에 대해서 한 두 마디의 덕담과 충고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이죠. 다만, 요즘 젊은이들이 외적인 면에 비해 내적인 허약함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요. 도전할 줄 모른다는 것이죠. 맨주먹으로 바위라도 뚫겠다는 의지로 살았던 세대에 비해 많은 차이가 나는 겁니다. ‘3포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더 강해지라는 주문을 하고 싶고, 기성세대에 대해서도 환경적 변화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봉옥: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으신지요?

고 은:시에는 교사가 없습니다. 자기가 선생이 되고 자기가 학생이 되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과 열정으로 함께 써 나가도록 합시다. 

오봉옥:다시 태어 나셔도 시를 쓰실 겁니까?

고 은:전에는 다시 태어나도, 해골로 누워서도 시를 쓰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눈뜨고 있는 순간까지만 쓰겠습니다.

▲ 일상의 인문학 콘서트. 왼쪽부터 가수 신재창, 고은 시인, 사회자 오봉옥 시인.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