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ㆍ몽고군 맞서 싸운 고려인 호국정신 깃들어

▲ 봉의산성은 춘천의 진산인 봉의산에 있는 산성이다. 현재는 일부 복원돼 약 170m가 남아 있다.

피끓는 청춘들이 젊음의 낭만을 만끽하기 위해 찾는 강촌과 남이섬을 품고 있는 강원도 춘천(春川)은 물의 도시입니다. 서울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완행열차를 타고 춘천여행을 다니던 때도 있었죠. 지금은 춘천행 직행열차인 ITX 청춘열차가 생겼고, 서울-춘천 간 고속도로가 개통돼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여행지가 됐습니다.

 

춘천은 강원도 서쪽 중앙부에 위치해 있는 역사의 도시입니다. 신라 선덕여왕 때는 우수주(牛首州) 또는 우두주(牛頭州), 문무왕 때는 수약주(首若州) 또는 조근내(鳥斤乃)ㆍ오근내(烏斤乃)ㆍ수차약(首次若), 경덕왕 때는 삭주(朔州)로 고쳐졌다가 다시 광해주(光海州)로 지명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고려 태조 왕건 재위 23년에는 춘주(春州)로, 조선 태종 때 춘천군(春川郡)으로 바뀝니다.

춘천에는 신석기ㆍ청동기ㆍ철기 시대 유적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는 예전부터 이 고장이 사람 살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삼국시대에 춘천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영토 확장을 위해 창칼을 겨누던 군사적 요충지였습니다. 결국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치고 삼국을 통일하면서 춘천은 신라의 지배를 받게 되죠.

상황이 이렇다보니 춘천에도 산성이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겠죠? 춘천에도 지역을 대표하는 산이 있습니다. 춘천의 상징이자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입니다. 해발 301.5m인 봉의산은 현 강원도청의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산이지요. 상서로운 봉황(鳳凰)이 날개를 펴고 위의(威儀)를 갖춘 형상과 닮았다고 해서 ‘봉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합니다.

봉의산 정상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알리던 봉수대가 있고, 그 아래 쪽으로 산을 빙 두른 길이 1241m, 높이 5∼6m의 봉의산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쪽 산마루에는 소양강 일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1호인 소양정(昭陽亭), 해발 150m 동쪽 기슭에는 경사면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파서 만든 석기시대의 동굴유적 혈거유지(穴居遺址, 강원기념물 1호)등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 봉의산을 빙둘러 축성된 강원도 기념물 26호인 춘천 봉의산성을 소개합니다. 봉의산 8부 능선의 가파른 지형을 따라 만들어진 봉의산성은 1979년 5월 30일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됐습니다. 봉의산성의 축성 시기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고려시대에 축성됐다는 설과 그 이전인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설이 대표적입니다.

옛 문헌에 이에 대한 기록이 나오지 않아 이견이 더 분분합니다만, 전문가들은 삼국시대부터 영토 분쟁을 벌였던 곳인 만큼 봉의산이 춘천을 방어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봉의산은 고려인들이 거란군과 몽고군을 맞아 목숨 걸고 싸웠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을 맞아 일전을 벌였고,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을 맞아 총칼을 겨눴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고려사절요〉,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언급돼 있어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습니다. 이 자료들을 보면 적으로부터 고려를 지키기 위해 온 몸을 바친 군인들과 민초들의 호국 정신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절요〉 제15권 ‘고종 안효대왕 2(高宗安孝大王二)’조에는 ‘거란병이 안양도호부(安陽都護府)를 함락해 안찰사 노주한(魯周翰)을 잡아 죽이고, 관속들 또한 많은 해를 입었다.(丹兵,陷安陽都護府,執按察使,魯周翰,殺之,官屬,亦多被害)’고 적고 있습니다.

또 〈고려사〉 권121 ‘열전34, 양리(良吏), 충의(忠義), 효우(孝友), 열녀(烈女)’조에는 ‘조효립(曹孝立)은 고종 40년에 문학(文學)으로 춘주에 있었다. 몽고병이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해 목책(木柵)을 이중으로 세우고, 참호를 한 길이 넘게 판 다음 여러 날을 공격했다. 성 안의 우물은 모두 말라 소와 말을 잡고 그 피를 마실 정도여서 사졸(士卒)의 곤함이 심했다. 이에 효립은 성이 지켜지지 못할 것을 알고 처와 함께 불에 뛰어 들어 죽었다(曹孝立, 高宗四十年, 以文學在春州. 蒙古兵圍城數重, 樹柵二重, 坑塹丈餘, 累日攻之. 城中井泉皆渴, 刺牛馬血飮之, 士卒困甚. 孝立知城不守, 與妻赴火死. 按察使朴天器, 計窮力盡, 先燒城中錢穀, 率敢死卒, 壤柵突圍, 遇塹不得出, 無一人脫者. 遂屠其城)’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자료에 ‘안찰사 박천기는 대책이 궁하고 힘이 다해, 먼저 성 안의 전곡(錢穀)을 불태우고 결사대를 거느리고 목책을 파괴하고 포위를 돌파하려 했다. 그러나 몽고군이 파놓은 참호를 만나 나가지 못해 한 사람도 살아난 자가 없었다’고 전합니다.

또 〈고려사〉 권24 ‘고종 40년(1253) 계축년 9월 병신일’의 기록에는 ‘몽고군이 춘주성(春州城)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돼 있습니다. 이때 봉의산성도 무너지고 그 안에 있던 사찰 충원사(沖圓寺)도 전소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사〉 권106, ‘열전19 박항 전’에는 ‘몽고병이 춘주를 함락할 때 박항(朴恒)이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부모가 죽은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성 아래에 쌓인 시체가 산과 같은데, 모양이 비슷한 자는 모두 거두어 묻기를 300여 명에 이르렀다.(朴恒, 字革之, 初名東甫, 春州吏. 聰慧, 美鬚髥, 高宗朝登第. 蒙兵陷春州, 恒時在京, 不知父母死所. 城下積屍如山, 貌肖者皆收時, 至三百餘人)’는 더 참담한 내용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46권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고적’ 조에는 ‘옛 난산현(蘭山縣) 본래 고구려의 석달현(昔達縣)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난산현으로 고쳐 우두주(牛頭州)의 관할현으로 하였다. 지금은 있던 곳이 어딘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고증하건대, …중략… 봉산고성(鳳山古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2463척, 높이가 10척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척은 30.3cm이니, 둘레는 746m, 높이는 3.3m 정도 되겠네요.

임진왜란 때는 강원도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의 활동지였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군과 총칼을 겨누던 곳이었다고 하니, 봉의산성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였는지는 두말 할 필요가 없겠지요. 봉의산성은 적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수비성이라고 합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지세가 험해 적을 막기에는 지리적 여건이 좋았지만, 식수가 부족하고 성역이 작아 장기전에는 불리하다고 합니다.

많은 전란을 겪으며 봉의산성은 곳곳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봉의산을 오르다보면 곳곳에 기와 조각도 눈에 띕니다. 그렇게 파괴된 산성은 지자체의 노력으로 1991년 동쪽으로 105m, 1993년에 서쪽으로 40m가 복원됐습니다. 현재는 원형 19m와 복원된 145m를 합해 약 170m가 보존돼 있습니다.

이 봉의산성에는 충원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인들은 외부세력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 해인사 소장)을 제작할 정도로 불심이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전국에 많은 사찰을 건립했겠지요. 그리고 그 사찰에서 수행을 하고, 국가의 태평성대를 기원했을 겁니다.

충원사는 봉의산성 내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타 사찰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도량의 역할을 다했을 테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려 고종 40년에 춘주성이 함락되면서 불타 없어진 듯 합니다. 현재 봉의산에 ‘충원사’라는 사찰이 있는데, 전문가들은 옛 충원사의 암자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충원사와 관련된 문화재가 있는데, 바로 ‘춘천 칠층 석탑’입니다. 보물 제77호로 지정된 고려시대의 석탑입니다. 조선 인조 때 충원현감(忠原縣監) 유정립(柳鼎立)이 인조반정으로 인해 파직당하고 낙향했다고 합니다. 유정립은 칠층 석탑 부근에 집을 세우려고 터를 닦다가 ‘충원사’라는 글이 새겨진 그릇을 발견했다고 전합니다.

이 때문에 칠층 석탑이 있는 그 부근을 옛 충원사 터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만, 단정하기는 이르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근의 근화동에 당간지주(보물 76호)가 있는데, 이 또한 충원사와 관련된 유물로 보는 이들이 있지만, 충원사와의 연관관계를 밝히려면 학자들의 연구가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봉의산성과 충원사, 칠층석탑, 근화동 당간 지주. 이 문화재들이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아픈 역사를 지켜보고 함께 했다는 문화재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겠죠.

차디찬 겨울 찬바람이 코끝을 빨갛게 만들고 손끝을 시리게 합니다. 이 겨울이 지나 파릇파릇 새싹이 돋는 봄이 오면 자녀들과 함께 춘천 봉의산으로 나들이를 떠나 보시죠. 우리의 아이들에게 잊혀져가는 역사를 제대로 알려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 복원된 봉의산성 성곽.

 

▲ 봉의산성에 있는 유구.
▲ 보물 제77호 춘천 칠층 석탑.

 

저작권자 © 금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