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세계 인류의 화두는 포용과 통합으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서구 유럽은 테러와 난민 문제로 큰 걱정에 놓여있고, 한중일 삼국 역시 북한의 수소탄 실험에 이어 일본이 자위대와 핵군비 강화 태세에 돌입했기 때문입니다. 정치권에서는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미국 시민들은 앞다퉈 총기를 구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해 테러가 곳곳에 일어나면서 IS는 물론 무슬림에 대한 공포가 커지고 있는 게 원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공포로 인한 특정 세력의 배척보다 화합과 이해로 포용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남을 미워하고 배척하는 행위는 증오와 적개심을 키울 뿐 평화를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평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증오보다는 이해를, 배척보단 포용을 우선하는 마음가짐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해와 포용은 분별심을 뛰어넘습니다. 경제적 또는 신분과 계급 차이를 두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해 나보다 가진 게 적고 배움이 짧다고 해서 차별하는 마음을 내면 온당한 포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않고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고사성어로 ‘해불양수(海不讓水)’란 말이 있습니다. 바다는 어떠한 물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여 거대한 대양(大洋)을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 중 하나인 관중(管仲)의 업적을 기록한 책 〈관자〉의 ‘형세해(形勢解)’편에서 유래됐습니다. 이에 의하면 “바다는 크고 작은 물, 깨끗한 물, 더러운 물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능히 넓게 될 수 있고[海不辭水 故能成其大] 산은 크고 작은 돌이나 흙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능히 높게 될 수 있으며[山不辭土石 故能成其高] 현명한 군주는 신하와 백성을 귀찮게 여기지 않아 능히 주변에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다[明主不厭人 故能成其衆].”는 것입니다.

최근 한 언론매체에 보도된 원광대학교 임상훈 교수의 논문은 포용의 진정성이 던져주는 긍정적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임 교수는 ‘호한융합(胡漢融合)과 중국의 미래’라는 논문에서 “중국이 이민족과 융화하면서 섞였을 때 잘 나갔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56개의 민족이 공존하는 중국에서 90%를 넘는 한족(漢族)이 소수민족을 포용해 화해의 시대를 살았을 때 문화가 융성하고 나라가 번창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중국은 한족과 소수민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지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 완벽하지 않지만 소수민족에게도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정책을 내놓고 있는 등 중국의 발전전략에는 분명 포용의 이념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포용은 차별을 낳지 않는 데에서 그 가치가 빛을 발합니다. 부처님께서도 포용을 취함에 있어서 분별이 없어야 한다고 설파하셨습니다. 온갖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산하대지(山河大地)’를 그 비유로 삼으셨습니다.

“대지는 깨끗한 것도 받아들이고, 더러운 똥과 오줌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깨끗하다. 더럽다는 분별이 없다. 수행하는 사람도 대지와 같이 해야 하리라. 나쁜 것을 받거나 좋은 것을 받더라도 조금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분별을 내지 말고 오직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중생을 대해야 한다.” 〈증일아함경〉

중생을 차별 없이 포용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출가자에겐 바다를 비유로 들어 그 뜻을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흔히 불교교단을 일러 ‘큰 바다’ 즉 ‘대해(大海)’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엔 8가지의 깊은 가르침을 수반하고 있습니다. 이를 간략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바다가 점차로 깊어지듯이 승가에도 단계적인 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바닷물이 해안을 넘지 않듯이 부처님의 제자들은 계율을 어기지 않습니다. 셋째, 바다가 시체를 해안으로 밀쳐내듯이 범계에 대해선 반드시 거죄(擧罪 : 죄를 거론함)합니다. 넷째, 온갖 냇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원래의 이름을 묻지 않고 바닷물이 되듯이 승가에 들어 간 사람은 계급이나 성명을 버리고 오로지 사문석자(沙門釋子)로 불립니다. 다섯째, 바닷물이 동일하게 짠맛이 나듯이 승가도 동일한 해탈미(解脫味)를 맛봅니다. 여섯째, 바닷물은 온갖 물이 합쳐져도 덜하거나 더함이 없듯이 승가가 아무리 많이 열반에 들더라도 증감이 없습니다. 일곱째, 바닷물에 갖가지 진귀한 보물이 간직돼 있듯이 승가에도 미묘한 교법과 계율이 있습니다. 여덟째, 바다에는 갖가지 큰 물고기가 살고 있듯이 승가에도 위대한 제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도 네 번 째의 비유는 편협과 분별을 허용하지 않는 포용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일단 바다에 합류하면 똥물이었는지 하수도 물이었는지 계곡물이었는지 과거와 신분을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물이 바다가 되듯이 승가에 들어오면 누구나 과거의 신분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의 제자로서 절대 평등한 지위가 된다는 뜻입니다.

올해는 어느 때보다 테러와 국가 간 긴장관계의 고조로 포용과 통합정신이 크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부처님의 말씀처럼 바다의 포용력을 배워나가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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