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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사석탑(婆娑石塔)

허 황후 싣고 온 신비한 돌탑<파사석탑>
한반도-인도 잇는 소중한 유물

   
▲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인도에서 가져왔다면 한반도 불교 전래는 공식 전래된 시기보다 300년이 앞서게 된다. 파사석탑은 마멸이 심하며, 기단을 포함 7층으로 되어 있다. 몇 번 옮기면서 탑층 순서가 명확치 않다.

왕의 명에 따라 망산도에서 기다리니 서쪽에서 붉은 돛을 단 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육지로 내렸다. 한 신하가 대궐로 달려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은 기뻐하며 아홉 촌장[九干]을 보내 예의를 갖춰 왕후를 대궐로 모시게 했다. 이때 왕후가 아홉 촌장에게 말했다.

“나는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신하들이 돌아와 왕후의 말을 전하니 왕은 친히 행차해 대궐 서남쪽 산기슭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만들고 기다렸다. 왕후는 별포 나루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랐다. 그리고 높은 언덕으로 가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왕후가 왕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니 왕이 나가 맞아 장막 궁전으로 들어갔다. 왕과 왕후가 함께 침전에 드니 왕후가 말했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데,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열여섯입니다. 지난 5월,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모후께서 말씀하시길 ‘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옥황상제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의 왕 수로를 내려 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니 그는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리는데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 배필로 삼게 하라 하셨다. 꿈을 깬 후에도 그 말이 귓가에 남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작별하고 그곳으로 떠나라’하셨습니다. 이에 배를 타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성스러워 공주가 멀리 올 것을 미리 알아 왕비를 맞으라는 신하들의 청을 따르지 않았소. 이제 현숙한 공주가 오셨으니 이 몸은 매우 다행한 일이오.”

왕과 왕후는 혼인해 두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는데 뱃사공 15명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을 주어 돌아가게 했다.

〈삼국유사〉 ‘기이 제2 가락국기’ 일부  

가야는 신비의 나라다. 한반도 최초로 철기를 사용했으면서도 역사의 굴곡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보니 교과서에도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있다. 어느 나라든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기록이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경우 역사는 왜곡당하고, 외면당한다. 서글프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다.

가야국과 관련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서술돼 있다. 특히 건국에 대한 부분과 시조 김수로왕과 허 황후의 첫 만남은 소설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다. 두 사람은 따사로운 햇살이 내려쬐는 여름, 남해 별포 나루에서 처음 만났다. 짐작컨대, 허황옥은 부모가 정해준 배필을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센 바다를 건넜다. 이른 바 정략결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생각만큼 달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전을 둘러싸고 제법 신경전을 벌였을 정도로 녹녹치 않았다. 

가야불교, 고구려보다 300년 앞설까?

허황옥의 가야 출현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닐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허황옥이 언급한 ‘아유타국’이 인도의 한 지방을 의미한다면 당시 가야가 인도와 직접 교류를 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한반도 불교 초전(初傳)이 알려진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보다 300년 이상 앞서는가 하는 점이다. 의문은 두 가지지만 의문을 풀어줄 열쇠는 파사석탑(婆娑石塔,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 하나로 귀결된다. 〈삼국유사〉 ‘탑상 제4 금관성 파사석탑’의 내용 때문이다. 

“허 황후가 동한(東漢) 건무 24년 서역 아유타국에서 배에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향하려 하는데,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받게 돼 가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께 아뢰었다. 부왕은 이 탑을 싣고 가라고 했다. 그리하여 편하게 바다를 건너 도착했다. 이때 배에는 붉은 돛과 붉은 깃발을 달았고, 아름다운 주옥(珠玉)을 실었기 때문에 배가 닿은 곳을 주포(主浦, 부산 강서구 미음동 와룡마을 추정)라고 한다. 또 공주가 비단 바지를 벗던 바위를 능현(綾峴), 붉은 기가 해안에 들어가던 곳을 기출변(김해시 장유면 동쪽 추정)이라 한다. 수로왕과 황후는 같이 150여 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그때까지 해동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신봉하는 일이 없었다. 제8대 질지왕 2년(452)에 이르러 그곳에 절을 세우고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서역 ‘아유타국’과 ‘파사석탑’이 분명하게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기록에 이의를 제기한다. 일연 스님이 1281년 저술한 〈삼국유사〉가 1200년 전 사건을 기록하면서 사실을 과정, 조작했으리라 주장한다. 허황옥이 인도 출신이라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인 수로왕릉의 태양문양과 쌍어문(雙魚紋)은 인도 뿐 아니라 중동·로마에도 존재하는 문양이고, 무령왕릉 출토유물에서도 발견된다고 반박한다. 중국 사천성 보주(인도 아유디아 가문의 이주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건너왔다는 주장의 근거인 허 황후 능비의 내용도 조선시대에 와서 후손이 세웠으므로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건국신화의 논리에 맞추려 출신지와 불교전래설 모두 조작한 설화라는 주장이다.

물론 〈삼국유사〉 곳곳에는 과장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가락국기’만 보더라도 그렇다. 김수로가 왕위에 오른 직후 석탈해가 찾아와 한 판 대결을 벌이는 장면은 단적인 예다. 이때 두 사람은 왕위를 놓고 술법을 겨루는데, 탈해가 매로 변하면 수로왕은 독수리로 변하고, 탈해가 참새로 변하면 수로왕은 새매로 변해 서로를 상대한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삼국유사〉를 접할 때는 직역보다 의역, 즉 잔가지를 치고 글이 품고 있는 속뜻을 읽어내는 기술이 필요하다. 위 기록에서 분명한 점은 허황옥이 정략결혼을 목적으로 먼 곳에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사실이다.

허황옥의 고향이 인도이고, 허황옥이 불탑을 전래했다는 주장에 반박하는 학자들도 파사석탑이 한반도 외부에서 들어왔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못하고 있다. 2010년 KBS 역사스페셜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는데, 취재진은 파사석탑의 재질을 한반도에서는 찾지 못한 반면 인도에서 동일한 재질을 확인했다. 〈삼국유사〉에도 파사석탑에 대해 “탑은 4면이 5층으로 되었고, 그 조각은 매우 기묘하다. 돌에는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데, 우리나라에서 나는 종류가 아니다. 〈신농본초〉에 말한, ‘닭의 볏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리를 드러낸다’는 뜻을 지닌 파사석탑은 이런 점에서 가야 역사에 가장 중요한 유물이라 할 수 있다. 

인도≫중국≫한반도 이주설 무게

최근에는 허 황후가 인도 출신이란 점을 인정하는 추세다. 국외에서 이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들이 잇달아 나왔기 때문이다. 먼저 허 황후가 가야국에 가기 20여 년 전인 서기 20년경 인도 아요디아 왕가가 쿠샨 왕조에 의해 왕도를 잃고 어딘가로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실은 아요디아 왕가가 중국으로 이주했다는 주장에 무게를 실어준다.

허 황후에 대해 오랜 기간 연구해온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는 허 황후의 부모가 인도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천성 보주(현 안악현)로 이주했다고 주장하는 대표적 학자다. 그는 사천성 안악현 허씨 집성촌에서 그 증거를 찾았다. 집성촌 서운향 우물 앞에는 그곳이 신정(神井)임을 표시하는 암벽이 있다. 그 암벽에 쌍어문과 함께 ‘허황옥’이 언급된 신정의 유래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암벽에는 “후한 초에 허 씨의 딸 황옥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남들보다 나았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김병모 교수는 나아가 김수로 역시 후한에 의해 멸망한 신나라 황실의 일족(흉노족)으로 보고 있다. 가락국으로 가기 전에 이미 허 씨 일족과 교류를 했고, 석탈해를 물리칠 때 등장하는 500척의 배도 철기문명과 함께 김수로가 타고 왔으리라 주장한다. 이 주장은 허황옥이 정략결혼을 위해 가락국까지 건너오는 배경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근거다. 철기 문명권의 젊은 지도자가 500척의 배를 끌고 부족국가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는 과정도 설명이 가능해진다.

일각에서는 허 황후가 중국에서 건너온 것은 맞지만 인도 출신이 아니고, 북방 출신일 것이란 주장도 있다. 사마천의 〈사기〉 ‘초세가(楚世家)’편에 등장하는 “영천 허창현이 옛 허국”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허 황후가 중국 하남성 허창현(낙양 동남쪽)에서 한반도로 이주했다고 주장한다. 〈김해김씨선원세보〉에 나오는 ‘후국(后國)’이란 단어도 ‘허국’이란 것이다. 김수로 또한 흉노 출신으로 한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김일제의 후손이고, 두 가문이 산동지역에서 교류를 했을 것이란 주장이다. 하지만 파사석탑을 비롯한 몇몇 의혹을 해소시키기엔 부족함이 없지 않다. 

파사석탑, 불탑 기능 없어

김병모 교수의 주장처럼 허 황후가 인도에서 중국 사천으로 이주한 후 파사석탑을 싣고 가락국으로 왔다면 허 황후의 도래 시점을 불교 전래로 봐도 무방할까? 학자들은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불교 전래라고 판단하기엔 이르다고 입을 모은다. 〈삼국유사〉 ‘기이 제2 가락국기’를 보면 수로왕이 허 황후를 만나기 전 수도를 정하면서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뀌[蓼] 잎과 같지만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히 16나한이 살 만한 곳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은 〈삼국유사〉 ‘탑상 제4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수로왕과 허 황후가 150여 년 간 나라를 다스렸을 때까지 해동에는 절을 세우고 불법을 신봉하는 일이 없었다’고 적시한 부분과 상충한다. 가락국에 처음 건립된 사찰이 300년이 지나 질지왕 2년(452)년에 세워진 왕후사란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파사석탑은 허 황후와 함께 들어왔지만, 불탑의 기능을 부여받지는 못하다가 후대 호계사에 옮겨진 후에 불탑의 의미를 지니게 됐다’는 홍윤식 동국대 명예교수의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수신(水神)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에 실었다는 얘기다. 홍 교수는 ‘금관가야 건국 초에 불교가 전해졌지만, 질지왕이 호계사와 왕후사를 세우는 452년에 왕실불교로 수용됐다’고 주장하는 학자다. 한반도 불교 전래를 보면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372), 백제가 침류왕 1년(384)에 들여온다. 신라는 법흥왕 22년(535) 불교를 공인한다. 가락국에 불교가 먼저 전해졌다면, 상식적으로 볼 때 300여 년의 기간 동안 이웃 삼국에도 불교가 전해지는 게 타당하다. 어찌됐든 가야 불교가 파사석탑이 계기가 돼 인도로부터 직접 전래됐는지, 이웃 나라를 통해 전래됐는지는 아직 불명확하다.

학자들의 입을 빌어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락국과 수로왕에 대해 첨언하자면 ‘서기 42년 알에서 깨어났다’는 내용은 출생이라기보다 가야 땅에 출현한 시기로 보는 게 타당하다. 또 수로왕이 199년 158세로 임종을 맞는데, 이 부분도 ‘158년’을 가야연맹의 지속햇수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韓-印, 허황후 사업 공동추진

지난해 5월 18일 인도 모디 총리가 방한했다. 그는 방한 첫날 정상회담을 가진 뒤 환영식에서 고대 인도 아요디아국 출신의 공주 허황옥과 금관가야 시조 김수로왕과의 결혼을 언급하며 “수백 년 전 인도 공주가 한국에 와서 일가를 이뤘고, 그 후손들이 지금도 인도와 관계를 맺고 있다. 인도인들이 한국에 매료된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라고 재치 있게 말했다. 양국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인도 아요디아 지역에 2001년 세워진 허 황후 기념비 개선사업을 공동 추진키로 합의했다. 2000년 전 허 황후가 한국과 인도 교류의 상징으로 받들어진 것이다. 파사석탑은 이를 증명하는 한반도 유일의 유물이라 하겠다.

끝으로 〈삼국유사〉에 나오는 파사석탑의 찬시를 소개한다. 

“석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험한 물결 헤치고 왔네.
어찌 황옥만을 도와서 이 언덕에 왔으랴.
천년 동안 왜국의 노경(怒鯨, 성난 고래)을 막고자 함일세.”

# 참고문헌

<삼국유사> 을유문화사
<철의 제국 가야> 역사의 아침
<이야기 가야사> 청아출판사
<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 주류성
<진화의 비밀> 효형출판
<박영규의 고대사 갤러리>
<세계인이 놀라는 한국사 7장면>
‘가야불교의 수용에 대한 비판적 고찰’
金英花 / 慶大史論. 10(‘97.12) pp.1-43 / 慶南大學校史學會

   
▲ 김수로왕 영정 <출처=김해시청>
   
▲ 허 황후 영정 <출처=김해시청>

 

윤완수 기자  yws3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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