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 필요한 건
公이 私 누르는
‘史記’의 가르침

지난해 1년 동안 불교계의 관심을 극도로 집중시켰던 사건이라면, 동국대를 둘러싼 사건과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 사건일 것이다. 불교계의 역량을 보여준 이 두 사건의 처리 및 대처과정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하나는 우(愚)의 표본이었고, 하나는 현(賢)의 모델이었다.

동국대 총장과 이사장 선출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리숙하기 그지없는 어린애 장난 같은 사건이었다. 실착과 패착, 악수에 악수를 거듭한 결과 이사진 전원 사퇴라는 불명예로도 아직 미결된 상태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 불교계의 한계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의 미래는 너무나 아드막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조계사로 피신했던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 사건의 처리 및 대처과정은,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괄목’ 그것이었다. 한상균 위원장과 도법 스님이 함께 손을 잡고 조계사 일주문을 나서는 모습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정부와 조계종(조계사), 한상균. 이 3자는 모두 각각에 걸맞는 명분을 유지할 수 있었고, 3자 모두 상처를 입지 않고 해결된 평화의 상징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조계종의 내공과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는 경찰을 투입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도 난제를 해결하게 되었고, 조계종은 성역인 조계사에 무력이 투입되는 수모를, 한상균이 끌려 나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쳐다만 보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고, 한상균 위원장과 민주노총은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위엄을 갖출 수 있었다. 패자는 없고 승자만 있었다.

만일 조계사에 경찰이 투입되어 한상균 위원장이 체포되어 갔다면, 조계종은 적어도 6개월 이상은 대정부 투쟁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고, 민주노총 역시 같은 상황에 돌입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부 역시 불교계와 민주노총을 상대로 이전투구(泥田鬪狗)를 해야 하는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이 두 사건의 처리 및 대처방법은 향후도 충분히 귀감이 될 만하다. 정리한다면 한 사건은 세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미숙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었고, 한 사건은 기지(機智)와 성숙미가 어우러진 전형이었다. 동국대 사건은 불자의 얼굴을 들고 다니기 민망했던 보기도 싫은 사건이었고, 조계사 한상균 사건은 불자의 긍지를 심어준 자랑해도 좋을 사건이었다.

사실 이 두 사건을 놓고 보면 동국대 사건은 전혀 난제도 아니었는데, 난제 가운데 난제로 종결되었다. 한상균 위원장 조계사 피신 사건은 판에 박힌 난제였는데, 아름답게 마무리 되었다. 이렇게 엉뚱한 결과를 낳은 배경은 공(公)과 사(私, 사욕)의 차이이다.

치부를 한껏 드러낸 동국대 사건은 사(私)가 공을 억눌렀고, 아름답게 마무리된 한상균 사건은 공이 사(私)를 억눌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매사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적어도 미숙아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역사인식의 중요성을 경각시켜 주는 명저이다. 〈사기〉의 기준은 ‘그가 의(義)로웠는가?, 불의했는가?’, ‘공(公)이 앞섰는가?, 사(私)가 앞섰는가?’, ‘순수했는가? 권모술수였는가?’ 그것이었다.

우리가 역사서를 읽는 것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 세상을 조망해 보기 위해서이고, 선인(先人)들의 경륜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광활한 시야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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