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보는 공부하며, 모든 존재 스승 되자

 

2016년 동지 우리나라 모든 설악·백악·관악·치악 같은 악산의 엄마산인 모악산 자락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세상일은 모두 기미·조짐·징조가 있고 현상계가 펼쳐진다.

동지날은 주역 64괘중의 지뢰복괘(地雷復卦) 이다. 지뢰복(地雷復)은 ‘지봉뢰처(地逢雷處) 견천근(見天根)!’ 이라한다. ‘땅에서 우뢰가 일어나면 하늘의 근간을 보게된다’라는 뜻이다.

100세 인생? 이제 우리는 살아가는 모든 일에서 마음 향하는 곳을 바꾸어야 한다.

나 위주에서 나 아닌 일체중생으로. 그렇게 하늘의 인사고과방식이 바뀌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분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그러나 그 분이 무엇을 깨달았는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본 적 없다. 적어도 필자는 그랬다. 깨달은 사람은 아프면 낫는 법도 알고, 내가 힘들면 나를 힘들지 않게 해주는 것도 알고, 이사를 어디로 가야하는지, 승진은 언제 하는지, 돈은 얼마나 버는지, 우리 집 아이가 큰 인물이 되는지 그런 것을 다 아시는 분으로 아는 사람도 많다.

‘그렇지 않다!’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은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며,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 내가 있다!’ 가 아닌 ‘무아(無我)’이며, 우리는 아주 먼 과거로부터 와서 아주 먼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는 그 과거와 미래를 잇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인연이 계속 일어나서 그렇게 된다!’라는 연기(緣起)와 원하지 않는 인연이 일어나거나 생기거나 마주치는 것에서 벗어나서 우리에게 바람직한 인연이 계속 일어나는 원리를 ‘원(願) 이 있는 삶!’ 즉 업(業)에 의해서 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라 서원(誓願)에 의해 삶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신 분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들 자신도 그렇지만 많은 정치인 중에는 ‘1. 내가 2. 무엇을 했다’는 두 가지를 망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지난 과거와 앞으로의 미래를 잇기 위해 ‘사심(私心)’이 아닌 ‘공심(公心)’으로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닌 분들이 많았다. 자기 자신이 ‘결론짓고 싶어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 자신이 공(功)을 취하고 싶은 사람은 많은 미움을 받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아버지 세대의 일을 지금도 하고 있다. 아버지에게 배운 방식대로 살지 않아 자신의 인생이 힘들어졌다고 생각하는 아들, 자기 아들이라도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살면 잘 되는 줄 알고 할아버지의 가르침을 아들에게 강요한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다. 머나먼 과거의 아버지와 아득한 미래의 아들을 이어주기 위해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더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해야하는지 알고 있는가

지금까지 이야기는 필자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필자도 부자가 되고 싶었고, 성공하고 싶었고, 남의 윗자리에 올라가고 싶었고, 많은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고, 존경받고 싶었다. 그런데 필자가 아는 방식을 모조리 동원해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궁금했다, 왜 일까?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 사서삼경·역학·채근담·병법서·마음 다스리는 법·성경 그리고 불교서적. 마음의 정원에서 원하는 꽃과 나무는 피지도 않고 당연히 벌과 나비는 오지도 않았다. 파리와 잡벌레들만 우글거리며 내 마음의 정원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어느 날 모든 것을 버려 보기로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 내가 맞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버린 것이 ‘내가 알고 있는 불교’였다.

그렇게 공부하기를 3년 ‘내가 모르는 불교’가 보이기 시작했다. 경전이 새로 보이고, 법문이 새로 들렸다. 그러고보니 참 이상한 일이었다. 세상은 바뀌고 있었는데 내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과 살아가는 방식은 20살이나 40살이나 55세나 비슷한게 아니라 같았다. 그러니 어찌 남에게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해보면 반만년 동안 유지되던 ‘호주제’가 페지되고, 아이들이 엄마 성을 따를 수도 있고, 여자와 남자의 구분도 없어져 버렸다.

그제서야 부처님이 어느 것도 항상(恒常)하지 않다고 설하시던 ‘무상(無常)’이 눈 앞에 들어왔다. 공부 잘하면 평생 호의호식할 줄 알았던 친구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았고, 항상 부자라고 생각하던 재벌회장이 붓글씨를 팔고 다니는 것도 보았고, 착하게 사는 사람이 망하거나, 아프거나 죽거나 하는 것도 보았으며, 참으로 인간답지 않게 사는 것 같은 친구가 성공하고 주위의 사랑받는 것도 보았다. 도대체 뭔가? 나이 60이면 환갑(還甲)이라고 다시 갑(甲)이 돌아오는데. 그래서 55세면 정년이 되고 통상 60~70세면 금생에 받은 이 몸 벗고 저쪽세상으로 가는데, 사람들이 죽지를 않는다. 도대체 우주 법계의 살림살이는 무엇인가?

배우며 60년, 가르치며 60년

앞으로 우리의 기본 수명은 120살이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앞의 60년은 공부하면서 산다. 학교 공부나 경전 공부가 아니다. 그것을 포함하는 세상 공부, 사람 공부, 환경 공부다. 어렵게 산 사람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좋고 유복하게 태어난 산 사람은 사람들이 항상 좋고 유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공부해야 한다. 잘 생긴 사람·이쁜 사람·머리좋은 사람·못 생긴 사람·힘든 사람 그리고 살다가 넘어져 신체의 손상을 입은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신체가 부족했던 사람, 힘이건 돈이건 자리이건 인기이건 사랑이건 남들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가졌다가 잃은 사람, 없다가 생긴 사람 등.

그렇게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저마다의 환경과 처지를 가졌던 머나먼 과거와 앞으로 자신과 같은 환경과 처지에 직면하게 될 먼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저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필자가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전이 아니다. 필자는 그렇게 60까지 우리 아버지 세대처럼 살던대로 각각등보체로 열심히 살아야 한다. 예전에는 보통 60이면 죽었고, 그리고 죽을 때는 위패에 ‘학생(學生)부군지묘’라고 썼다. 즉 ‘평생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말은 알았지만 내용과 깊이와 그 낙처(落處)를 모르고 우리는 살았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며, 어떤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인가?

학생으로 60년 살고, 선생으로 60년 사는 시대가 왔다. 그렇게 우리의 120세 인생이 펼쳐진다. 요즘 학교 선생님들과 의사 선생님들 중에는 배은망덕하게도 영어·수학·국어 선생님만 하려고 하고, 소아과·내과를 버리고 성형외과 의사만 하려는 분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고생하게 되어 있다. 법계의 인사고과 제도가 바뀌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기에 그렇다.

앞으로 61세는 환갑이며, 다시 태어나야 하는 돌잔치가 되어야 한다. 많이 배웠건 적게 배웠건, 돈 되는 것을 배웠건 돈 안되는 것을 배웠건, 인기있는 환경이건 인기 없는 환경이건, 머나먼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 올바른 연기(緣起), 원하는 것을 얻는 인연이 일어나게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선생이 되어야한다.

새해 ‘불도무상서원성’ 발원

팔지가 어린 시절에는 ‘국민교육헌장’이라는 것을 외워야 했다. 이 국민교육헌장은 참으로 이상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되는데 그 다음에는 이미 1945년에 일본으로부터 우리가 독립에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라는 구절이 있다. 생각해 보면 경제적으로, 혹은 군사적으로 남에게 의존해야만 살 수 있는 것은 자주 독립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다. 한국 국민들의 70%는 은행 빚을 지고 산다. 너무나 슬픈 비유지만 강아지 목에 줄을 걸어 놓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다닐 수 있게 하는 것. 아버지 제사에는 못가도 은행이자 마감일에는 이자를 내야하는 피곤하고 슬픈 사람. 그것이 대한민국 가계부채 1200조의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서 돈을 벌어 은행에 바쳐야하는 노예적인 삶을 살고 있다. 지금도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제 오늘을 필두로 독자들에게 그 해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다시 계속해보면, 국민교육헌장은 우리에게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라고 했는데 필자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 미국인들이 주는 옥수수 빵을 점심시간 마다 받을 때,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 라고 했다. 물론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일체 중생을 맹세코 다 구하겠습니다’라는 사홍서원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지만 아무튼 황당했다. 그리고 나서는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라고 했다.

필자가 오늘 100세 인생 첫머리에 이 구절을 놓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 국민교육헌장 발표는 당시 대통령이 하셨다. 그러나 그가 우리 보고 하라고 강요한 것이 아니라, 불교의 연기 이치로 보면 1968년부터 1994년 사이에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말도 안되는 것 같은 억압적인 헌장을 외운것은 우리의 자성(自性)이 저런 가르침을 ‘반연(攀緣, 휘잡아 감아 들어온 인연)’해왔다는 것이다. 즉 우리 ‘내면의 나’가, 우리들 자신에게 우리는 저렇게 살아야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가르쳤다. 이 세상의 모든 인연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저런 식으로 온다.

우리 불자들은 모두 60이 넘어서는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시아본사 사생자부’ 석가모니부처님처럼 우리는 모든 존재들의 스승이 되어야 하며 모든 존재들의 자상한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새해에는 우리 불자들이 삶의 목적을 저렇게 바꾸었으면 좋겠다. 저렇게 나도 모든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서 ‘일체중생서원도’를 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나 위주만 생각하던 그 무진번뇌를 ‘번뇌무진서원단’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 무량한 법계의 가르침을 다 ‘법문무량서원학’하여, 불도는 무상하지만 인생의 마지막 결승점인 120세까지 기필코 그 서원을 이루겠다는 ‘불도무상서원성’을 2016년의 발원으로 삼았으면 좋겠다.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 우리는 금생의 자가보장(自家寶藏), 즉 주머니 속의 보물을 다 찾아서 군자금으로 활용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깊이 생각하고 자신을 보는 공부를 하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실 준비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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