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게 부처님 법이죠”

▲ 손안식 전 조계종 중앙신도회 상임부회장은 "불교운동가들의 활동 여건이 하루빨리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가지의 일에 일평생을 바치며 걷는 삶을 ‘외길 인생’이라 한다. 수십 년을 한결같이 앞만 바라보고 묵묵히 걸어 일가를 이룬 이를 일컬어 ‘장인(匠人)’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특정한 기능에 통달한 이에게 붙이는 명칭이긴 하지만, 무형의 일에 일가를 이룬 이도 ‘장인’의 반열에 올려도 무방할 듯 하다.

불교계에도 수십 년 간 외길인생을 걸어 온 장인들이 여럿 있다. 이들 중에서도 50여 년 간 재가불교신도운동에 몸을 바친 이가 있다. 손안식(77) 전 조계종 중앙신도회 상임부회장 얘기다. 

부처님 정법 일러준 어머니

그는 1938년 전남 영암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등에 업혀 있을 때부터 집에서 40여리(약 16㎞)떨어진 곳에 있는 천년 고찰 도갑사를 오갔다. 그의 어머니는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예불문〉과 〈천수경〉, 〈화엄경〉 ‘약찬게’, ‘이산혜연선사 발원문’ 등을 독송하며 가족들의 건강을 발원했다.

어머니는 늘 그에게 ‘생명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등 5계를 강조하고, ‘보시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어머니는 부처님의 정법을 일러준 스승과 다름없었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면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부처님 상호를 쳐다보면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처님과 대화도 많이 했다.

“법당에 앉아 부처님과 마주하고 있으면 할 말이 생겨요.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부처님, 제가 올곧게 살 수 있도록 앞길을 밝혀주십시오’라는 말이었죠. 그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는 거겠죠.”

그는 사찰 법당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스님들의 법문을 들으면서 ‘사람은 진실하게 살아야한다’는 걸 깨닫게 됐다. 중학교 때의 일이다. 사찰에서 오계를 설하는 법회가 있어 참석했다. 그때 그가 알게 된 건 ‘사람이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 또 남에게 해를 끼쳐서도 안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남을 돕고 살아야한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남이 어려울 때 같이 옆에서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 소년 손안식의 마음에 불교는 그렇게 다가왔다. 

군 입대 후 불심 깊어져

1960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한 그는 4.19와 5.16을 겪으며 투쟁정신을 불태우다 ‘한 걸음 뒤에 서 있어야겠다’는 생각에 군대를 자원했다. 군에서 그는 더욱더 열심히 마음속으로 〈반야심경〉을 외우고 〈천수경〉도 읊었다.

남들이 자는 새벽에 홀로 일어나 기도를 한 것이 바탕이 돼 ‘모든 것이 자업자득’이라는 진리를 조금 알게됐다. 손 전 상임부회장은 “틀림없이 모든 것은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추오라도 내가 잘못을 하면 바로 나에게 손해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진실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됐다. 사회가 어떻든 자신만이라도 진실한 삶을 살면 집안이 편해지고, 한걸음 더 나아가 사회가 정화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군을 제대한 그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공사판을 전전했다. 우이동에 친구를 만나러 갔던 그는 도선사 입구에 건물이 들어서는 걸 보고 무작정 공사책임자를 찾아가 일거리를 달라고 읍소했다.

그렇게 일자리를 얻은 그는 쉬지 않고 일을 했다. 돈을 더 벌기 위해 힘든 일도 마다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공사 감독관으로부터 “도선사에 유명한 도인(청담 스님)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에 청담 스님의 이름은 들었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어떤 분인지는 몰랐다. 어느 날 일을 끝내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도선사에 올랐다. 석불전에서 “무탈하게 지내도록 제 몸을 지켜주세요. 그게 제 재산입니다”라고 기도를 올렸다. 

청담스님 인연 신도운동 첫 발

하루는 청담 스님을 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때 청담 스님은 그를 천천히 보더니 “자네 말이야, 박완일이라고 알어?”라고 물었다. 속으로 깜짝 놀랐다. 스님에게 “4ㆍ19 때 친해져 각별하게 지내는 사이”라고 했더니 스님은 “그러면 잘됐다. 박완일하고 같이 불교일이나 하지”라고 권유를 했다. 이 일은 그가 재가불교신도운동을 시작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몇 년 뒤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일을 접고 당시 종각 옆에 있던 전국신도회 사무실을 찾아갔다.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박완일 씨를 만났다. 박완일 사무총장은 그를 보자마자 웃으면서 “잘됐다. 안그래도 지금 사람이 필요한데. 내일부터 나와”라고 했다. 1967년 4월 1일의 일이다. 그때부터 그는 신도회와 인연을 맺었다.

1970년도부터 전국을 돌며 순회법회를 열었다. 군법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먼저 군법당에 갔다. 순회법회 제목을 ‘불교사상 강연회’로 정하고 부처님의 일대기를 25폭의 불화로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전시했다. 그리고 ‘알기 쉬운 불교’ 소책자를 60만부 가량 제작해 배포했다. 덕분에 군법사들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때 그는 권력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는 “불교계도 앞으로 인재를 길러 각 분야에 나가서 활동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고 했다. 군법당 순회법회가 끝난 뒤 그는 강원도 속초에서부터 시작해 전남 목포까지 3개월 반에 걸쳐 순회법회를 했다. 법회 때는 영화를 상영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는 법회 때 사람을 모으기 위해 하루종일 가두선전을 했다. 혼자 마이크 잡고 온종일 떠들고 다녀도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돌고 나면 저녁에 사람이 많이 모이 저절로 신이 났다. 당시만 해도 불교가 굉장히 홀대 받을 때였다고 한다. 특히 관공서에서는 스님을 ‘스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단다. 순회법회를 하고 나니 기관장들이 불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 결과 전국 총 200여개 시군 중 157곳에 시·군 신도회가 결성됐다. 종교단체 전국 조직으로서는 최대 규모의 조직력을 갖추게 됐다. 그때는 신도회 활동하는 이들도 신심이 나서 아주 열심히 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도회 회장이 연루된 큰 사건이 터져 신도회는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손 전 상임부회장은 “신도회장을 모실 때는 철저하게 검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도회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걸 보고 슬픈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종로구청 앞의 한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 전국신도회 간판을 내걸었다. 1995년 3월 전국 대의원 회의를 소집했다. 320~330명이 참석했다. 그는 신도회 몰락의 경위를 설명하고 신도회의 전통을 이어갈 것을 호소했다. 참석자들은 그를 지지하며 신도운동을 지속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고 법장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했을 때 중앙신도회와 전국신도회를 통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법장 스님의 주선으로 2003년 양측 사무총장이 만난 통합에 합의, 현재의 중앙신도회가 됐다.

이후 그는 신도회관 건립운동도 주도했다. 당시 총무원장이었던 지관 스님에게 건의했고, 김의정 중앙신도회장이 돕기로 했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지금의 전법회관이 건립됐다. 

살림 어려워도 수십년 ‘보시’

손 전 상임부회장은 불교계 내에서 신도운동의 대부로 불리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그는 “진짜 불교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홀대를 받고 있다. 누가 인정을 해주는 것도 아니다”고 회한을 털어놨다. 그가 바라는 건 불교운동가들의 생활이 안정돼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생을 불교운동에 매진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일은 ‘승가와 책임있는 재가자의 몫’이라고 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품은 데는 이유가 있다. 이미 그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신도운동을 하느라 집안 살림은 아내가 감당해야 했다. 그의 아내는 보험회사를 다니며 생계를 꾸렸다. 하지만 아내는 돈을 갖다 주지 않는다고 한 번도 말을 한 적이 없었단다. 그래서 불교운동을 할 수 있었단다. 그에게 아내는 어머니 다음 가는 보살이란다. 자식들에게도 미안했다. 특히 딸이 “아빠, 불교계에는 자녀들 장학금 주는 것 없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아팠단다. 살림이 어려워도 그가 멈추지 않는 일, 바로 보시다. 매일 아침 기도를 하며 일정금액을 적립했다가 연말에 어려운 이들에게 전달한다. 어머니 생전에 당부한 보시의 삶을 실천하고 있는 것.

50여년의 재가불교신도 운동을 해 온 손 전 상임부회장. 그는 지금까지 해온 일의 마무리를 어떻게 지을지 고민하고 있다. 자신이 겪은 험난한 길을 후배들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그래서 마음껏 불교운동을 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원을 세워서 매일 기도하고 있다. 

불교운동가 활동 여건 개선 ‘발원’

불자로 살면서 그가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스님의 법문이 있다. 고교 시절 목포 정광사에서 고암 스님이 들려 준 “사람이 사람다워야 한다. 그래서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것. 그 말에서 그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올바른 행동을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부처님 법이 아니고는 생사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게 됐다.

다시 태어나도 불교운동을 하겠다는 손 전 상임부회장. 그는 불자로 살면서 느꼈던 인간 손안식의 번뇌와 방황, 고민들은 후학들에게 ‘타산지석’의 교훈이 되길 바란다.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불교, 그 불교를 통해 부처님을 닮아가려는 손 전 상임부회장. 그에게서 풍기는 향기는 바로 ‘사람 냄새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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