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혜 스님 (천태종 교무부장, 서울 구강사 8월 23일 법문)

천태종은 8월 19일 제109회 하안거 결제식을 봉행했습니다. 전국의 천태불자들이 천태종 고유의 수행종풍인 주경야선(晝耕夜禪) 수행정진을 하기 위해서죠. 천태종 안거(安居)는 가장 천태종다운 수행법입니다. 더 나아가서 가장 불교다운 실천법이죠. 이 안거제도는 부처님 재세 시부터 있었습니다. 물론 부처님 당시에는 인도의 계절적 영향으로 비가 내리는 우기철 바깥출입을 삼가면서 한 곳에 머물러 수행하는 풍습이었죠. 이렇게 본다면 안거제도는 굉장히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안거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과 같이 재가자들도 함께 했던 안거였을 확률이 높습니다.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 부처님에 의해 성립된 후 지금까지 26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종교입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들 중 하나죠. 오랜 시간이 지나며 불교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 중 불교를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로 분류했습니다. 소승은 작은 수레를, 대승은 큰 수레를 뜻합니다. 불교에서 대승이라는 것은 위대하다는 뜻이죠. 그런데 우리가 자주 쓰는 소승과 대승이라는 단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우선 대승이란 원래 위대하다고 생각해서 대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붙여서 쓰는 말이라 어떻게 생각하면 맞는 말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는 대승불교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으니 크게 무리가 없죠. 하지만 소승은 대승 쪽에서 폄하하고, 무시하면서 그들이 붙인 거죠. “우리는 많은 사람과 함께 갈 수 있는 큰 수레고, 너희들은 너희들만 타고 갈 수 있는 작은 수레다” 이런 개념으로 소승이라고 부른 겁니다. 그러니 소승불교라는 것은 대승불교가 끌어 붙인 이름이지 원래 이름은 ‘부파불교’ 또는 ‘아비달마불교’라는 말을 씁니다.

부파불교의 입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너무 심오해 아무나 가르칠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으니 소수의 전문가 그룹들이 부처님의 경전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또 부처님의 경전을 연구하다 보니 궁극의 목적이 수행인데, 그 수행을 여러 사람과 함께 했을 때 분명히 장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20개가 넘는 파들이 똑같이 주장하는 내용은 “우리 파가 부처님의 말씀을 가장 올바르게 실천하고 있다”입니다. 최소한 우리가 부처님 말씀을 가장 잘 연구하고, 잘 실천하고 있다고 주장해야 되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앞서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부파가 한가롭게 사람들의 상담을 해주고, 어울릴 때 다른 파에서는 더 열심히 연구와 공부를 해서 우리 부파를 추월하면 어떻게하지?’라는 위기감에 빠지게 된 거죠. 그래서 수행환경을 훼손하는 것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자꾸 일반 대중을 멀리하게 된 겁니다.

그러다보니 출가자 중심과 경전 연구를 하는 전문가들만 모여 부파의 결속력을 갖게 되는 모습으로 자꾸 변질됐죠. 일반 재가불자들이 절에 가도 스님을 만날 수 없고, 부처님 말씀을 배울 기회가 없어지다 보니 ‘아 이래선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을 한 거죠. 결국 모든 사람들이 함께 수행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배워서 모두가 깨달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대승불교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리고 출가자 중심인 부파불교를 소승이라고 폄하한 것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거죠. 이게 부처님께서 줄기차게 강조하셨고 실천하도록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부처님 법이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어느 순간 부파가 난립하다 보니 그럴만한 여유도, 그럴만한 필요성에도 자꾸 거리를 두게 됐습니다. 결국 부처님이 강조한 상황과 거리가 있는 그런 불교의 모습으로 200년 가까이 진행되는 우를 범한 것이죠.

이런 과거의 모습이 어쩌면 지금 우리나라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돼 안거하면 당연히 스님만 하는 것, 일반 재가불자들은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죠. 천태종의 안거를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거는 경전에도 나오고, 불교 역사에도 나옵니다.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니죠. 깨달음을 찾아 가는 데 차별은 없습니다. 그 차별이 없다는 걸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죠.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안거 수행을 통해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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