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서 느낀 다양한 대기설법
근기 맞춘 다른 가르침이지만
궁극은 결국 하나

“합장하시고 마음속으로 영가를 부르며 ‘극락왕생 하세요. 성불 하세요’ 이렇게 염원하십시오.” 주지스님의 말씀에 갑자기 신도들 가운데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음력 칠월보름 백중회향의 마지막 시간, 모두 소대에서 활활 타는 불꽃 앞에 서 있던 중이었다. 떠난 분을 향해 49일 동안 기도하고 그리워하던 마음이 그렇게 분출된 것이리라.

같은 사찰의 백중 입재와 회향에 참관하면서 조사자의 입장에서도 몇 차례 가슴 뜨거운 순간이 있었다. “지심귀명례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불타야중….” 수백 명이 하나 된 장엄하고 검박한 염불소리는 놀라운 감동이었다. 단순하면서도 종교적인 운율, 가슴에 와 닿는 노래가 또 있을까. 읊조림과 노래의 중간쯤에 있는 염불소리가 주는 종교적 환희로움을 새삼 절감한 시간이었다.

입재하던 날은 비가 내렸다. 마칠 즈음 합창단이 노래를 불렀는데 마지막 곡이 ‘동그라미’였다. 조금 뜻밖으로 여기며 전주를 듣고 있었는데, 노래가 시작되자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이 솟았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그때 꿈을
풀잎에 연 이슬처럼 빛나던 눈동자
동그랗게, 동그랗게 맴돌다 가는 얼굴

벽을 가득 메운 위패에 적힌 수많은 존재들. 그 자리에 앉아있던 우리는 비에 젖은 사찰마당을 내다보며 저마다 동그란 누군가의 얼굴을 그렸다. 그리고 내 마음 따라 피어나던 하얀 꿈 또한 언젠가 흔적 없이 사라져 가리라는 슬픔의 근원을 들여다보았다. 그날의 ‘동그라미’는 여느 법회의 마무리보다 압권이었다.

법사스님은 법문에서 백중 천도재를 영가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향하는 자천도(自薦度)의 뜻으로 받아들일 것을 거듭 당부했다. 불교에서는 백중(우란분절)을 ‘거꾸로 매달린 자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 준다’는 뜻에서 구도현(救倒懸)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지옥중생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런데 이 구도현을 영가가 아닌 자신에게 대입하라고 하였다. 거꾸로 매달린 우리 삶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스스로 돌아보고, 바르게 일으켜 세우는 발심의 날로 삼자는 것이다. 그래서 49일이 끝나는 날, 내 안에 부처가 꽉 차있었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깨달으며 회향하자고 하였다.

이처럼 백중 입재와 회향에서 불법의 다양한 변주곡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때로는 장엄한 염불소리의 환희로운 종교적 체험으로, 때로는 터져 나오는 울음에 대한 공감으로, 때로는 맑고 하얀 슬픔처럼 가슴에 와 닿는 동요로, 때로는 나를 향한 자천도의 성찰로…. 부처님이 보이지 않는 지휘로 변주곡을 연주하여, 중생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대기설법(對機說法)을 베풀어 불심에 조금씩 가까워지도록 이끈 셈이다.

여름비가 대지를 고루 적신 날 입재하여 무사히 회향했다. 하늘에서 똑같은 단비를 내리지만, 초목은 각자 근기에 맞게 비를 맞고 자라날 것이다. 나무와 풀과 약초가 서로 다르고 크기와 모습이 같지 않아도, 제각기 비를 맞고 윤택하게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도 언제나 중생의 근기와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가르침을 펼치지만 그 가르침의 궁극은 하나이며, 중생이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가르침 또한 결국 하나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꽃을 피우지만 그 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나있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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