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만 있으면 넘치지만 봉사로 비우면 저절로 채워져요”

10여 년간 8000시간 어르신들 위해 봉사
거창하지 않아도 마음만 내면 할 수 있어

▲ '작은 선행이 곧 봉사활동'이라는 박정숙 씨. 그는 '스스로 부족함이 많다'고 했지만 봉사에 대한 신념만큼은 누구보다 오롯하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저널리스트로 평가되는 말콤 글래드웰(Malcolm Gladwell)은 2009년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을 소개했다. 즉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1만 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 말은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일종의 ‘전문가가 되기 위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이와 비슷한 의미로 ‘10년’을 강조해왔다. ‘10년이면 강산(江山)도 변한다’는 옛말에는 이렇게 10년이 갖는 긴 세월의 의미가 담겨 있다.

한 가지 일에 10년 동안 1만 시간을 매진하려면 하루 평균 약 2.7시간을 노력해야 한다. 휴식을 핑계로 종종 빼먹기라도 한다면 그 시간은 훨씬 늘어난다. 그렇기에 직장에서 하는 업무가 아니고는 한 가지 일에 1만 시간을 매진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업무가 아닌 봉사활동으로 이 같은 ‘공로’를 남긴 이들을 우리 사회에서 간혹 만나게 된다. 물론 당사자들은 공(功)이라고 생각지 않겠지만. 이들 중에서 2004년 대한적십자사에 봉사자 등록 후 현재까지 8000시간이 넘는 봉사활동을 펼쳐온 서울시립 송파노인전문요양원 박정숙(56) 요양팀장을 8월 13일 만났다. 

‘복지 사각’에 원력 세워

“저보다 대단한 사람들도 많은데 인터뷰를 하려니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무얼 바라고 한 것도 아닌데….”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박정숙 씨도 지금까지 인터뷰를 했던 여느 분들과 다르지 않았다. 인사를 나눈 뒤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다’는 겸손함이었다. 멋쩍은 듯한 그의 얼굴에는 몸에 배인 선함과 따스함이 가득했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박 씨는 젊었을 때 부모님을 따라 20년가량 성당을 다닌 독실한 천주교신자였다. 천주교재단 학교를 다니고, 세례를 받았을 정도로 그의 신심은 깊었다. 세례명은 비르지타(Birgitta, 스웨덴의 성녀). 이런 박 씨가 불교에 입문하게 된 것은 불교집안에서 자란 남편과 결혼하면서부터다. 선을 본 지 28일 만에 결혼식을 올린 탓에 서로의 종교관에 대한 속 깊은 얘기조차 나눌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친동생들이 자신과 달리 불교를 믿었던 터라 별다른 거부감 없이 시어머니와 절에 다닐 수 있었다.

“결혼하고 나서 시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시댁은 경북 구미에 있었고, 남편과 저는 한동안 전남 강진에 살았거든요. 한 번 시댁에 가면 1주일 넘게 머물다 오는데 그 기간 동안 절에 참 많이 다녔죠. 결혼 전까지 오랫동안 성당을 다녔었지만 마음이 크게 불편하진 않았어요.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 저도 깜짝 놀랐어요.”

박 씨는 이 같은 시댁생활에 천주교신자인 친정 부모님이 걱정하진 않을까 싶어 조심스레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부모님은 오히려 “시댁어르신 말씀 잘 들으라”며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박 씨는 그날 이후 종교에 대한 고민은 내려놓고 편안한 마음으로 절에 다녔다. 그러자 특별한 이유 때문에 입문한 불교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점차 불교와 가까워진 박 씨는 자연스레 ‘자비’라는 가르침을 듣고, 보고, 배우게 됐다.

박 씨가 봉사활동 분야의 ‘빠꾸미(한 분야의 달인ㆍ전문가를 일컫는 경상북도 사투리)’가 된 시기는 2004년 여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동사무소에서 행정보조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박 씨는 그곳에서 수많은 기초생활수급자 어르신을 보면서 그들 간의 ‘부익부 빈익빈’을 경험했다. 정부의 도움이 그다지 필요 없어 보이는데도 수급자로 선정된 어르신과 누구보다도 도움이 절실하지만 수급자로 선정되지 못한 어르신을 보며 수급 대상 선정에 대한 문제점을 느꼈다. 평소 워낙 넉살 좋은 성격 덕분에 개인적으로 몇몇 어르신들을 돕긴 했는데, 이때부터 복지 사각지대에 처한 어르신들을 위해 체계적으로 활동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얼마 뒤 적십자사 봉사회가 개별 동 단위로 구성돼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가입하기 위해 알아봤지만 박 씨가 살던 서울 장위동에는 봉사회가 없었다. 때문에 옆 동 봉사회가 장위동까지 넘어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장위동에 봉사회가 없는 이유가 궁금해 적십자사 관계자에게 묻자 “사람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박 씨는 지인과 통장(統長)들을 설득해 20여 명을 모아 적십자사 장위동 봉사회를 꾸리고 기본교육을 수료했다. 그 원력으로 봉사회장을 맡은 후 지금까지 독거어르신 지원과 요양원 봉사, 세탁봉사 등을 10여 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봉사회는 13명 정도로 꾸준히 유지되고 있어요. 요즘은 학생들이 준봉사원으로 참여해 일손을 돕기도 하고요. 제대로 된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어르신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데 행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메울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박정숙 씨가 요양원 입소 어르신의 식사보조를 하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어르신 돕는 일이 천직(天職)

박 씨는 10여 년간 누구보다 많은 봉사활동을 해왔지만 주된 분야는 독거어르신을 돕는 일이었다. 수년간 시부모님의 요양을 도맡으며 느꼈던 어른에 대한 ‘친숙함’과 ‘공경’이 가장 큰 이유였다. 시아버지의 복막투석을 5년 동안 직접 하면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르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됐고, 시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닐 때도 그곳에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할 정도로 봉사에 열성적이었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던 시아버지는 “내가 죽고 나면 나 때문에 하지 못했던 봉사활동을 더 많이 하라”면서 며느리를 응원하기도 했다. 이 때문일까. 박 씨는 시아버지 작고 후 혼자서 독거어르신 21명의 생활을 지원했다. 말벗, 가사, 욕구조사 등 매주 어르신들을 만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시절, 자택 지하에 조리시설을 갖추고 국수를 만들어 인근 노인정에 돌리거나 밑반찬을 대량으로 마련해 동네 어르신들 가정에 배달하기도 했다. 반찬을 배달할 때는 어르신들에게 드시고 싶은 음식을 물어보며 기호에 맞춰 준비하는 세심함도 곁들였다. 그의 봉사활동이 입소문을 타고 지역에 알려지자 떡집에서 다 팔지 못하고 남은 떡을 어르신들에게 전해달라며 갖다 주는 등 주변 상인들의 후원도 이어졌다. 이 같은 노력에 동네주민들은 “저 사람은 (봉사활동을 많이 해서)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 밥그릇이 몇 개인지 다 꿰고 있을 것”이라고 말을 했다.

“집안 경제 사정에 문제가 생겨 집을 팔기 전까지는 반찬이나 음식 만드는 일을 계속 했어요. 저 혼자 한 일은 아니고 봉사회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할 수 있었던 일이죠. 그러다보니 어르신들이 고맙다며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갖다 주기도 하셨고, 제가 집에 없을 때는 대문고리에 먹을거리를 걸어두고 가는 일도 자주 있었어요. 아무래도 어르신 돕는 일이 제 천직인 것 같아요.”

지금은 특별한 조리시설이 없어 반찬지원 등을 잘 하지 못하고 있지만 박 씨는 아직도 김장철만 되면 어르신들에게 김치를 나누기 위해 집에서 배추 100포기를 담근다. 박 씨의 이런 모습에 자식들은 “엄마는 우리를 방목했다”고 장난스레 농담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식들도 엄마의 영향을 받았는지 봉사활동에 적극적이다. 특히 둘째딸은 대학생 때부터 6년 동안 1000시간가량 봉사활동을 했다. 자식들과 봉사활동을 계속 이어오던 박 씨는 단순한 봉사로 끝내기보다는 조금 더 전문적인 일을 하기로 결심하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딴 뒤 2013년 1월에 송파노인전문요양원에 취직했다. 무엇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해 봐도 어르신들을 모시는 것 외에는 별다른 게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요양원 일이 힘들다고 하는데 저는 즐겁게 하고 있어요. 몇몇 분들은 ‘좋다는 얘기가 나오는지 몇 년 더 해봐야 한다’고 하시는데 일은 조금 서툴러도 정서적으로 가까워서 그런 것 같아요. 단순히 봉사활동만 할 때는 전문지식이 없어 당뇨환자 어르신이 쓰러졌을 때 119에 전화밖에 못 하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심폐소생술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등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져서 좋습니다.” 

“봉사, 특별하지 않아요”

오랜 기간 지속된 박 씨의 선행에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감사의 뜻을 전해오는 등 인연의 끈을 이어오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박 씨는 오래 전 한부모가정에서 태어난 신생아를 한동안 돌봐준 바 있는데, 얼마 전 “이제는 아이가 유치원에 간다”는 연락을 받았다. 또 장학지원사업을 연결해준 중학생은 어느덧 직장인이 돼 첫 월급 선물로 빨간 내복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박 씨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커다란 감동을 받으면서도 ‘꾸준히 봉사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고.

“봉사활동은 거창한 게 아니에요. 꼭 어느 단체에 등록을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요. 계단에서 어르신의 무거운 짐을 들어드리는 일이나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똑같은 봉사라고 생각해요. 그냥 몸에 배어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 중에도 봉사는 많아요. 무엇보다 내 것을 비우면 다시 채워진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갖고만 있으면 계속 넘치기만 할 테니까요. 그래서 항상 저는 ‘오늘은 무엇을 비울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경전내용을 잘 모르는 박 씨였지만 그는 이미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을 체득하고 있었다. 최근 불교공부에 관심이 생겨 집에서 가까운 불교교양대학을 알아보고 있다는 그의 말에 박 씨가 누구보다도 경전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 씨는 요즘은 교통비를 아껴 어려운 곳을 돕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지난 6월부터 편도 1시간 거리인 요양원에 걸어서 출퇴근하고 있다고. 한여름 무더위에도 지치지 않는 그의 원력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 얻은 기름으로 부처님 가시는 길을 밝혔던 여인 난타의 정성[貧者一燈]처럼 쉬이 꺼지지 않고 복지사각지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길 기대한다.

▲ 박정숙 씨가 대한적십자사로부터 받은 메달. 왼쪽부터 각각 1000ㆍ3000ㆍ5000ㆍ7000시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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