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제 지구촌을 경악하게 한 버지니아공대의 끔찍한 사건이 신문 지면에서 사라져주기를 바랄 것이다. 금세기 일어난 여러 가공할 사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충격에 대한 면역성을 강화시켜 왔다. 이제 그들은 웬만한 일로 크게 동요하거나 이야깃거리로 삼지 않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부터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가는 속도도 점점 빨라져가고 있다. 이 조용하고 무서운 변화를 우리는 또 어떻게 인색해야 할 것인가.

이번 일은 비단 한 불행한 청년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미확인 폭발물을 감지하게 하는 일이다. 죽음이라는 카드가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직무유기요 크나큰 모독이다. 나 하나 죽어버리면 모든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야말로 오늘날의 혼란을 야기하는 주된 원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불행은 무엇보다 자기 앞의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어쩌면 삶 저 너머에 있으리라고 생각되는 불확실한 희망이라는 헛것을 좇아가느라 정작 소중한 삶 자체를 사랑할 여유를 잃어버리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돈, 명예, 성공, 권력과 같은 잡히지 않는 것들을 향해 질주하느라 그날그날의 삶 속에서 목숨과 같이 없으면 안 되는 삶의 알맹이들을 하찮게 여기는 풍조가 날로 극악해지고 있음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겠기에 말이다. 이른바 물질만능주의의 팽배와 함께 생명경시의 정도가 갈수록 그 심각성을 더해가는 현실을 더 이상 남의 일이라고 외면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목숨에 관한 한 이제 그 소유의 입장을 재고 해보아야 할 필요가 긴급하고도 절실해지고 있다는 말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내 목숨은 완전한 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목숨과 목숨들의 희생과 사랑 덕분에 부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숨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다른 목숨에게 크게 빚지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다른 수많은 목숨들의 도움을 받아 삶을 지탱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갓난아기가 받아먹는 최초의 우유 한 방울에는 들판에서 종일 풀을 뜯는 암소의 노동과 침묵이 들어있다.

그 뿐이겠는가. 물 한 모금 밥 한 숟가락이 다른 목숨들의 도움 없이 우리 입에 들어올 수 없으며, 벼와 보리와 콩과 푸른 잎사귀들을 어김없이 키워내는 믿음직한 흙의 힘과 그것들을 날마다 돌보아 꽃피우고 열매 맺게 하는 태양의 뜨거움, 그리고 그 꽃가루들을 실어 나르며 우리의 허파 속을 부지런히 드나드는 바람의 도움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목숨이 아닌가. 이와 같은 목숨의 우주적 공존의 사정을 직시한다면 내 목숨이 어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나 하나 사라져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끝날 수 있을 것이라는 무지한 계산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말이다. 모든 이치가 그렇듯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 엄연하고 우주는 바늘 하나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완전한 것을, 그렇잖아도 구차한 목숨에 빚만 가중시켜서 다음 생에서 그 과보를 받지 않을 수 없는 이치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더라면 죽더라도 희생자 유가족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는 길을 각오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유가족들의 마음에 맺힌 한이 크나큰 슬픔을 딛고 일어나 용서라는 긍휼을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목숨을 존재하게 하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를 다하지 못하였다면, 내 목숨이 빚진 것들에 대한 갚음을 다하지 못하였다면, 나 또한 다른 목숨에게 그만한 헌사를 나누지 못하였다면 설사 삶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짐 지울 때라도, 결코 내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이 귀한 목숨을 마음대로 베어버릴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경 시인ㆍ경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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