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지 못한 사랑 애절한 노래로 되살아나

▲ 박달도령과 금봉낭자 형상.

박달도령과 금봉 낭자 전설
대중가요로 불려 ‘대히트’
고려 거란병 침입 전적지
김취려 장군 활동 조명돼야

근래에 우리나라 도로망은 그야말로 거미줄처럼 촘촘해졌습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도로는 속도와 자본입니다. 잘 뚫린 도로는 이동시간을 단축시켜 주고, 시간이 단축된 만큼 물류비용이 줄어들어 경제적입니다. 그래서 강을 만나면 다리를 놓고 재를 만나면 터널을 뚫습니다. 도로는 최대한 직선이어야 속도와 자본의 논리를 충족시키니까 말입니다.

박달재는 충북 제천시 봉양면과 백운면을 가르는 고갯길입니다. 차령산맥의 지류인 구학산(九鶴山, 971m)과 시랑산(侍郞山, 691m)의 안부인데 높이는 504m입니다. 제천 쪽 봉양면에서나 반대편 백운면 쪽에서나 일주문 같은 문을 세워 고갯길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습니다.

박달재는 가수 박재홍이 부른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덕분에 전 국민이 아는 고갯길이 되었습니다. 이 노래가 발표된 것이 1948년이니 이미 70년 가까이 그 존재감이 살아 있는 셈입니다.

고려시대에 이미 이 고개가 영남에서 서울 쪽으로 올라가는 관로였고 김취려(金就礪, 1172~1234) 장군이 거란병을 크게 물리친 전적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은 고갯길 아래로 총길이 1765m의 2차선 터널이 뚫려(2000년 개통) 대부분의 차량이 직선 터널 길을 달려갑니다. 그래도 오랜 시간 유명세를 가진 박달재이니 지금도 일부러 고갯길로 올라오는 차들이 적지 않고 고갯마루의 휴게소에서는 끊임없이 ‘울고 넘는 박달재’가 여러 가수의 목소리로 흘러나옵니다.

▲ ‘울고 넘는 박달재’노래비.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 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이렇게 이어지는 노랫말은 이 고개의 전설을 모티브로 한 것입니다. 박달재라는 이름은 주변에 박달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것이라는 설과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슬픈 사랑이야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박달도령은 영남지방의 유생이었는데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 아래 한 집에서 유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룻밤 잠을 청해 잔 집에는 꽃다운 낭자 금봉이가 있었고, 젊은 선비는 이 낭자에게 연정을 품게 되었습니다. 금봉이 역시 박달도령의 준수한 외모에 한 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래서 둘은 사랑을 나누었고, 박달도령은 과거에 급제하여 데리러 오겠다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떠났습니다.

젊은 박달도령은 한양에 도착해서 공부를 하려니 자꾸만 금봉이가 떠올랐고 결국 시험 준비를 허술히 하여 과거에 낙방하였습니다. 실의에 찬 박달도령은 고향집에도 금봉이에게도 가지 못하고 한양에서 방황을 했습니다.

그런 즈음 금봉낭자는 하루하루 박달도령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감감무소식인 박달도령을 생각하며 점점 야위어 갔고 기어이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박달도령이 용기를 내어 금봉이를 찾아 왔으나 금봉이는 이미 3일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비탄에 빠진 박달도령은 홀로 정처 없이 고갯길을 오르다가 문득 자기 앞에 나타난 낭자 금봉이를 보게 되는데, 반가운 마음에 와락 그녀를 끌어안으려다가 그만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고 맙니다. 너무 큰 슬픔에 젖어서 낭자의 환영을 보았던 것입니다.

▲ 박달재 입구 표시문.
▲ 고려 김취려 장군 기마상.

이후로 사람들은 이 고개를 박달고개, 박달재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작사가 반야월 선생은 유랑극단을 따라 다니다가 제천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순식간에 노랫말을 썼고 김교성이 작곡하여 박재홍이 불렀는데 공전의 히트를 계속하여 국민애창곡이 되었던 것입니다. 길이 생기고 그 길에 사람의 이야기가 얽히고 다시 그 이야기는 노래가 되어 불렸습니다.

지금 박달재 고갯마루에는 전해오는 이야기들을 모티프로 한 조각상들이 전시된 조각공원과 관광 안내소 그리고 널찍한 마당을 갖춘 휴게소가 있습니다. 조각공원 건너에는 박달도령과 금봉낭자 상이 높다랗게 서 있고 그 옆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도 서 있습니다. 노래비 뒤 언덕에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곳에서는 멀리 백운면의 산세와 풍경이 조망됩니다. 조각공원과 휴게소 사이에는 김취려 장군의 기마상이 서 있는데 작은 사찰의 입구입니다.

김취려 장군은 언양 김씨의 시조로 1217년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였는데, 충청도 제천까지 침입한 거란병을 크게 무찔러 격퇴하였습니다. 그는 거란병의 남하를 예측하고 이 박달재 지역을 선점하여 전투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적은 병력으로 대승을 했습니다. 이후로도 거란병과 많은 전투를 치르며 호국의 공신이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크게 조명 받지는 못하는 듯합니다. 새로운 조명이 필요하다는 것이 지역 인사들의 의견입니다.

차를 타고 박달재를 넘는 것보다는 천천히 걸어 넘는 트레킹 코스로도 적합합니다. 길이 가파르지 않고 주변에 아름드리 소나무와 울창한 숲이 건강한 공기를 제공해 줍니다. 울고 넘는 고갯길이라는 전설 속의 슬픔 보다는 역사와 자연을 사랑하는 희망의 에너지를 몸에 새기며 이 고갯길을 걷는다면, 박달나무처럼 단단해지는 삶의 활력을 느껴볼 수 있을 것입니다.

▲ 박달재 고갯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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