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불교 살아있다’ 보여주고 싶었어요”

불교대학 다니며 심취, 이리불교대학 건립 주도
지역 불교 각 종단 스님 설득해 사암연합회 결성
불교 위해 악역 자처, 어린이·청소년 포교 발원

▲ 김진수 이리불교대학 부학장은 어릴적 소풍 다녔던 미륵사지를 찾아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도 한다.

“하는 일이 별로 없는 사람인데, 인터뷰 하러 서울에서 익산까지 오셨소. 입만 열면 불만만 털어놓는 사람이라 할 말도 별로 없는데….”

익산역에서 만나 간단한 손인사를 나눈 뒤 김진수(64) 이리불교대학 부학장이 내뱉은 말이다. 그의 말에서 거짓없는 겸손이 느껴졌다. 김 부학장은 익산 토박이다. 그의 어머니는 사찰에 열심히 다닌 신심 깊은 불자였다. 코흘리개 진수도 그런 어머니를 따라 사찰에 다녔다.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지만, 마냥 불교가 좋아졌단다.

20대 후반, 7년 간 병으로 누워 계시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 상을 치르고 돌아갔던 고모마저 할머니와 같은 병을 앓았다. 그 때 청년 진수는 그 원인을 알고 싶어 심령과학 관련 책을 섭렵했다. 명리학도 공부했다. 불교 경전과 성경 등 손에 잡히는대로 종교서적도 읽었다. 그때 그가 알게 된 사실은 부처님 가르침만이 자신이 품었던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것.

김 부학장은 1990년 김제 금산사에서 전주에 세운 화엄불교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2년 간 불교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웠고, 조계종 포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화엄불교대학 2학년 때 불교공부 하는 게 정말 좋아서 익산지역 불자들에게도 부처님을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1991년 익산지역의 신심 있는 재가자들을 모아 이리불교대학을 설립했다.

그가 이리불교대학을 설립할 당시에는 1급 자동차 정비공장을 3곳 운영했을 정도로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사재와 몇몇 불자들이 낸 성금을 모아 먼저 불교대학 건물을 지었다. 이후 불교대학 운영에 필요한 기금 마련을 위한 선서화전을 열기 위해 이름난 스님들과 인간문화재(중요무형문화재)를 찾아다니며 작품을 모았다.

“통도사 월하 스님을 찾아뵙고 작품을 달라고 하고, 서경보 스님도 찾아가 작품을 얻어왔죠. 불자들이 잘 사갈 수 있는 스님들의 글씨와 달마도 등 160여 점을 모아 선서화전을 열어 건립 기금을 마련했어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화주를 하러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당시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유지였던 그는 평소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던 그였지만, 불사를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헌신했다. 한 번 작정하면 끝을 보는 그의 불도저 같은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불교발전에 헌신하겠다’는 원력이 큰 힘이었다.

“관음사 땅을 빌려 이리불교대학을 만들었어요. 부처님 법은 어느 종단 소속이든간에 불자라면 누구든지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엔 조계종 불교대학에 다니려면 조계종 신도 등록을 해야 했기 때문에 스님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어요. 결국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기 원하는 불자들은 누구든지 와서 배울 수 있도록 울타리를 치지 않았죠. 그래서 (불교대학이)잘 되는 겁니다.”

‘누구에게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자격이 있기에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그의 지론과 노력이 조계종 스님들을 설득, 지역 불교의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리불교대학을 설립한 뒤 그는 먼저 불교대학 후원회를 조직했다. 현재 33명의 후원자들이 매년 각각 30만원을 후원하고 있고, 지역 사찰의 몇몇 스님이 후원금을 내고 있다. 그 돈으로 불교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2010년에는 여성불자들의 모임인 대원회를 설립했다. 불교대학 출신들이 주축이다. 120여명으로 구성된 대원회는 매월 두 번 독거노인 35명에게 반찬을 배달, 자비행을 실천하고 있다. 또 남자 불자들만 모이는 마한거사림회(60여명), 가릉빈가 합창단(40여명)도 결성했다.

익산에는 조계종 사찰이 10여 곳, 조계종 이외 종단 사찰이 40~50여개 된다. 그의 노력으로 익산시사암연합회와 신도연합회도 결성됐다. 종단 구분없이 불자들은 불교 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각 사찰 신도회장은 신도연합회 이사가 되고, 회비를 낸다. 그 회비로 신도연합회를 운영한다. 5월에는 체육대회, 연말에는 불자들의 밤을 열어 불자들 간의 화합을 도모한다. 특히 자원봉사단체를 결성해 익산시에서 자원봉사 인력이 필요할 때 불자들이 앞장 서 돕는 등 지자체와의 유대 관계도 돈독히 하고 있다.

그가 불교활동에 매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지역 내 타종교인과 시민들에게 ‘불교는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현재 익산시 인구는 32만 명인데, 교회는 16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에 비해 사찰은 60~70여개 정도다. 불자 인구도 전체 익산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관음사 신축 법당도 그의 주도로 이뤄졌다. 불자가 운영하는 석재상, 골재상 등을 찾아다니며 보시를 받는 등 공사비용의 절반을 아꼈다. 그래서 그는 사찰은 ‘스님들의 것’이 아니라 ‘불자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관음사 법당은 기쁨이자 슬픔의 현장이다. 한창 잘 나가던 그였지만, 관음사 법당을 새로 건립할 때 현금이 없어 쓰지도 않던 어음을 끊었다. IMF 때였다. 이를 알고 찾아 온 친구가 간곡한 부탁으로 어음을 빌려 준 게 화근이 됐다.

그는 “어음을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절을 지으면서 현금이 없으니까 3개월 덕 보려고 어음을 끊었다. 친구에게 어음을 빌려줬고, 결국 빚보증을 서게 됐다. 20억원이 넘는 어음이 돌아왔다. 익산에서 불자랍시고 휘젓고 다니는 사람인데, ‘진수가 누구 돈을 떼 먹었네’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천 원짜리 한 장 안남기고 다 갚아줬다”며 아픈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수십억 원을 허공에 날리고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따르던 그의 신심 때문이었다. 그는 사찰에 가서 스님과 대화 나누며 법당에 앉아 현실을 도피하려 했다. 김 부학장은 “무주의 한 사찰에 갔었는데 주지 스님이 ‘김회장, 다시 나가서 버무려’라고 하셨는데, 누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니 잊어버리고 다시 재기하라는 의미였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 스님은 “이제 마음 비워라. 다행히 돈을 받으면 부처님 덕이라 생각하고, 받지 못하면 전생의 빚을 갚은 거라 생각하라”고 조언했단다. 그 때 그의 머릿속에 용주사 정락 스님이 공부할 때 겪었다면서 해 준 말이 스쳐갔다. 정락 스님은 젊은 시절 도반들과 공부할 때 겪었던 일화를 들려줬다.

한 도반이 “바랑에 들어있던 돈이 없어졌다”고 하니 스님들이 다 자기의 바랑을 열어보았다. 그런데 한 스님만이 가만히 있었다. 스님들이 “왜 바랑을 열어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 스님은 “보면 뭐하게. 가져갔으면 전생의 빚 갚았으니 다행이고, 가져가지 않았으면 내가 그 사람에게 빚이 없었는가 보다 생각하면 되는 것”이라고 했단다.

정락 스님의 이 일화는 그가 당시 처했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

김진수 부학장은 개인 신행을 할 시간이 별로 없다고 했다. 한 달에 세 번 군산교도소 법회, 2ㆍ4째 일요일엔 가족법회, 셋째 주 일요일에는 익산 육군부사관학교 법회에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육군부사관학교 법당에 다닌 지 20여년이 됐다. 거의 혼자 다녔는데, 현재는 포교사단 군포교팀과 같이 하고 있다. 10여년 전 부사관학교에서 부사관 교육을 통합해 운영하겠다고 발표하자 개신교계에서는 1500여명을 수용하는 교회를 지었고, 천주교에서도 500여명이 수용하는 성당을 지었다. 그런데 불교계에서는 움직임조차 없었다. 그때 김진수 부학장은 부사관학교측에 요청해 겨우 창고 하나를 얻었고, 창고 자리에 법당을 짓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부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마치고 가는 부사관들에게 CMS로 월 5000원 씩 후원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들 중 40%는 자대 배치를 받은 후에도 해지하지 않고 후원금을 내고 있다고 한다.

그는 매월 3차례 군산 교도소 불자 재소자들과 만난다. 예나 지금이나 정부 기관들은 지역 유지들에게 교도소 교정교화위원, 법무부 범방위원, 검찰청 위원, 경찰서 선도위원 등을 맡아달라고 권장한다. 그 또한 그 여러 소임을 맡았었다. 처음엔 ‘필요할 때 돈이나 좀 내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맡게 됐다고 했다. 그러던 중 그는 군산 교도소 직원으로부터 “불교의 종교활동 모습을 보면 걱정스럽다. 일주일에 한 번 법회 시간을 만들어 주는데 염불 테이프나 찬불가만 틀어주고 스님들은 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내가 실력은 없지만 재소자들과 같이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시작하게 됐다. 하지만 교화활동은 녹록치 않았다”고 털어놨다.

교도소에 교화활동을 하러 갈 때 재가들로부터 보시를 받거나 자신의 사비로 먹을거리를 사서 간다. 그리고 재소자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해 매월 몇 명에게 치약과 칫솔 등 생필품을 살 수 있도록 일정 금액의 영치금도 넣어준다. 치아가 좋지 않은 재소자에게는 치과의사인 친구에게 부탁해 치료를 해주기도 한다. 재소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그의 보람이다. 다른 교도소로 이감하거나 출소하는 재소자들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보람을 느낀다. 타 종교계의 지원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사력을 다하는 김 부학장. “부처님 가르침이 있어 힘들어도 신바람 나게 다닌다”고.

지역 불교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는 그이지만, 아직도 못다 이룬 불사가 있다. 어린이ㆍ청소년 포교를 통한 젊은 불자 양성이다. 그는 “유치원 운영이나 법회를 통해 어린이ㆍ청소년 포교를 해야 신도층이 젊어지고, 젊은 부모들이 사찰을 찾게 된다”며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했다.

불교계 발전을 위해 지자체 관계자, 지역민들과 갈등을 빚는 등 악역을 자처한 김 부학장. 그는 담담한 어투로 “불교와 관련된 일이면 강하게 대처해야 불교를 괴롭히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구업을 많이 짓지만, 내가 감당할 몫”이라고 말했다.

첫 만남에 “하는 일이 별로 없어 할 말도 별로 없다”던 그에게서 많은 얘기를 들었다. 불교는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축이다. 불교를 만나 보람된 삶을 살고 있고, 그 삶을 다시 불교에 회향하고 있는 김진수 부학장. 어릴 적 소풍을 다녔던 미륵사지는 번뇌가 가득 할 때 비우러 가는 곳이다. 미륵사지 곳곳을 걷는 그의 묵직한 한 걸음, 한 걸음이 불연(佛緣) 깊었던 익산지역의 불교를 되살리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이어지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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