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악몽 사로잡혀
불교계 총력 낭비
10년, 100년 후 대비하자

웬만한 불자들은 ‘앙굴마라’ 이야기를 알고 있다. ‘앙구리마라’라고도 불리는 앙굴마라는 부처님이 살아 계실 적의 인도 청년이었다. 그는 열두 살 때부터 당시 인도에서 유명했던 ‘마니 발타라’ 바라문을 스승으로 섬기며 도를 닦고 있었다. 앙굴마라가 청년이 되었을 때였다. 스승이 출타 중일 때 스승의 아내가 그를 유혹했다. 그런데 그는 그 유혹을 단호히 거절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스승의 부인이 남편에게 앙굴마라가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고 모함했고, 이 모함을 믿은 스승은 앙굴마라에게 ‘천 명의 사람을 죽여 천 개의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가지고 돌아오면 도(道)를 일러주겠다’고 선언, 앙굴마라는 999명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천 명 째를 채우기 위해 자기의 친어머니를 죽이려 하였다. 바로 그때 앙굴마라는 부처님을 만나 설법을 듣고 참회,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부처님은 999명을 죽인 살인마에게까지도 자비심을 베풀어 참회와 용서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했던 것.

그래서 우리 불교도들은 부처님의 그 한량없는 자비심을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 ‘지혜와 자비’를 양쪽 날개삼아 오늘날에도 전 세계에서 불철주야 정진하고 있다. 만일 불교에서 ‘자비’를 빼버린다면 불교는 껍데기만 남을 것이다. 그만큼 ‘자비’는 불교의 전부요, 불교 그 자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 한량없고 조건없는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우리는 법회를 마치기 전에 언제나 ‘사홍서원’을 소리높이 외쳐 부처님 전에 서약하고 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사홍서원’은 말 그대로 부처님 앞에서 나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네 가지 큰 서원’이다. 이 사홍서원 가운데서도 첫 번째 서원이 바로 ‘중생무변 서원도’, “끝없이 많은 중생이지만 기어이 모두 다 건지겠습니다”하고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부처님 전에 맹서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한량없는 부처님의 자비심을 배우고 가꾸고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불교 종단에서,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무자비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0여 년 전 발생했던 법난으로 ‘사형선고(치탈도첩)’가 내려졌던 80세의 노승을 ‘공권정지 3년’으로 감형한 데 대한 ‘항의 성명’, ‘규탄 성명’, ‘100인 대중공사’까지, 불교계가 온통 과거사 폭풍에 휩싸여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

여기서 우리 불교계는 스스로에게 엄중히 물어야 한다. 죽이는 게 불교인가, 살리는 게 불교인가? 빼앗는 게 불교인가, 나눠주는 게 불교인가? 싸우는 게 불교인가, 화합이 불교인가? 자비심이 불교인가, 복수심이 불교인가?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까지도 이 세상 끝없는 모든 중생을 다 건지겠노라고 매일처럼 부처님께 맹세하는 불자들이 ‘살리는 일’이 아니라 ‘죽이자’는 일에 두 팔을 걷어 부치고 악을 쓰며 떠들어 댄다면, 이것은 아름다운 일인가, 부끄러운 일인가?

‘참회와 용서’는 정말 아름답다. 한국불교는 지금 과거의 악몽에 다시 빠져 허우적 거릴 것이 아니라 10년 후, 100년 후의 한국불교를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하거늘 아무 실익도 없는 80살 노승의 과거사에 불교계의 총력을 낭비하고 있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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