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는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 오랜 경험으로 깨닫죠”

경제적 위기 이겨낸 후 봉사 삶
기피 봉사분야 저변 확대 필요

“할머니, 우리 집엔 공짜로 밥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아?”

“이 사람들은 공짜로 먹는 게 아니란다. 시간이 흐르면 누군가에게 다 돌려줄 게야.”

1960년대 강원도 원주의 한 시골마을에 살았던 현우네는 매일 끼니를 해결하러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럴 때면 행랑채에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던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밥상 좀 내오라”고 말했다. 당시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현우는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밥을 나눠주는 이유가 궁금해 할머니에게 물었지만 어린 나이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만 돌아왔다.

조계종사회복지재단 목욕봉사단체 수신회의 이현우(58) 봉사자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나눔’이다. 그가 어렸을 때 집안 살림살이는, 부자는 아니었어도 넉넉한 편이었다. 집에 대문이 있다고 해서 ‘대문댁’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할머니는 언제나 찾아오는 이웃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줬다. 그러다보니 마당 한쪽에 높게 쌓인 볏가리는 늘 금세 줄어들었다. 이런 광경을 보며 자란 이현우 씨는 ‘여유가 있으면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품게 됐다.

▲ 힘든 봉사에 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길 바란다는 이현우 씨. 봉사의 사각지대를 돌보며 회향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마치 청솔처럼 한결같다.

고난 겪으며 수행 박차
이현우 씨의 삶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웠고, 결혼해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도 낳았다. 아이를 한 명 입양하고 싶어 사전 적응을 위해 입양원에서 목욕봉사도 했다. 하지만 봄꽃도 한때였을까? IMF를 한 해 앞둔 1996년, 남편이 이사로 있던 기업 대표이사가 250억 원에 달하는 부도를 낸 뒤 중국으로 잠적하는 일이 벌어졌다. 회사 중책을 맡아 보증을 섰던 이 씨네는 순식간에 빚더미를 안게 됐고, 전 재산을 날린 채 일산에서 서울의 한 지하방으로 이사를 해야 했다.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남편의 흔들리는 모습에 이 씨는 ‘나라도 중심을 잡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삶에서 하루아침에 빚에 쪼들리는 신세가 되자 이런 다짐은 태풍 앞의 촛불처럼 흔들렸다. 다행히도 하나뿐인 아들의 위로가 큰 힘이 됐다.

“아들이 중학생 때 친구들을 데리고 집에 온 적이 있어요. 지하에 살 때라 창피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저에게 ‘엄마, 우리는 방이 세 칸이잖아. 방 한 칸에 사는 친구들도 있어’라고 하더군요. 어찌나 기특하던지. 그런 위로마저 없었으면 못 버텼을 거예요.”

이즈음부터 이 씨는 안암동에 있는 개운사에서 매일 1000배를 올렸다.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아들이 바르게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단순히 초파일과 백중 때 사찰에서 기도하는 무늬뿐인 불자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나 아들은 4년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했다. 경제적인 문제도 차츰 해결돼 더 이상 걱정거리가 없었다. 이 씨는 수년간의 위기를 극복하고 나자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은 마음이 불쑥 솟았다. 친구들은 여행을 다니거나 취미를 가져보라고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울까 고민하던 중 신문에서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이 자원봉사교육을 한다는 걸 보고 신청했다.

“젊었을 때는 그저 ‘어려운 사람에게 내 걸 나눠주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만 갖고 살았어요. 그런데 위기를 겪고 나니 생각이 바뀌더군요. 봉사는 단순히 내 걸 주는 게 아니라 나도 받는다는 걸 깨닫게 됐죠. 행복을 얻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잖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제가 겪은 위기는 ‘더 이상 교만해지지 말라’는 가르침인 것 같아요.”

인기 없는 봉사를 찾아
“현우 보살, 아니 뭣하러 목욕봉사를 하려고 그래? 거기 엄청 힘들 텐데 괜찮겠어?”

이현우 씨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수신회에 들어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같이 자원봉사교육을 받은 도반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때 이 씨는 “봉사 중에 힘들지 않은 게 어디 있겠느냐”고 되물으며 주변인들의 걱정 섞인 물음을 흘려보냈다. 당시 40대 중후반이었던 그는 봉사자들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열악한 곳을 돕고 싶었다. ‘굴곡진 삶을 부처님 가피로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었다’고 믿었던 터라 참된 회향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간 수신회는 회원이 자신과 같이 봉사교육을 받은 동기 1명을 포함해 6명뿐이었다. 다른 봉사단체들의 회원 수가 수십ㆍ수백 명에 이르는 것에 비해 단출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수신회 선배들은 대부분 나이가 10살 남짓 많았다. 결국 선배 봉사자 4명이 수신회를 수년간 꾸려왔음을 의미했다.

각오는 했지만 목욕봉사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여름은 차치하고 한겨울에도 땀으로 뒤범벅이 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여성으로서 남성 환자의 신체를 닦는 일은 심적으로 부담이 됐다. 목욕 도중 환자의 대소변을 받는 일도 많았다. 그나마 함께하는 선배들이 잘 이끌어준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 또한 목욕과 함께 전신마사지를 병행하면서 점차 안색이 좋아지는 환자들을 보며 평소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과 보람도 느끼게 됐다. 이 씨가 이렇게 동료들과 우정을 쌓으며 목욕봉사를 한 지 어느덧 10년. 그동안 회원이 늘거나 봉사환경이 나아지진 않았을까? 대답은 ‘No’. 도리어 회원이 4명으로 줄어들어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단다.

“저희가 하는 목욕봉사는 4인1조로 진행돼요. 그래서 지금은 누구 한 명이라도 빠지면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갈 수 없듯 차질이 생기죠. 2년 전에 갑상선암 수술을 하고, 두 달 정도 봉사활동을 쉬었는데 그땐 동료들에게 정말 미안했어요. 지금 수신회는 팀장님을 비롯한 선배 봉사자들의 나이가 70대이고, 새로운 봉사자가 들어오지 않아 미래가 불투명해요. 게다가 국립재활원에 목욕봉사팀이 저희밖에 없어서 더 걱정입니다.”

그의 말처럼 현재 수신회는 앞날이 캄캄한 상황이다. 지금까지 간헐적으로 새 봉사자가 들어온 적은 있었지만 목욕봉사의 힘든 과정을 버텨내는 사람이 없었다. 몸이 힘들다는 둥, 비위가 상한다는 둥의 이유를 들며 다들 얼마 못 가 수신회를 떠났다. 조계종사회복지재단에서도 수신회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가입의사를 밝히는 봉사자는 전무하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불교계뿐만 아니라 타종교계, 일반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몇몇 기독교계 봉사단체가 목욕봉사를 시도했다가 몇 개월 만에 포기한 일이 부지기수였다고. 그래서 수신회 봉사자들은 가끔씩 “우리가 10년만 더 하자”고 우스갯소리를 한단다.

“목욕봉사 하려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제가 남편이라도 데리고 가서 할까 했는데 동료들이 말렸어요. 이렇게 힘든 거 알고 나면 아마 못 하게 할 거라면서요. 솔직히 목욕봉사는 진짜 큰맘 먹고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어요. 여타 봉사처럼 밝은 분위기 속에서 웃으며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요.”

▲ 국립재활원 입소 환자의 목욕을 돕고 있는 수신회 회원들. 〈사진제공=국립재활원〉

“봉사에 귀천 있나요?”
수신회는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가량 목욕봉사를 하고 있다. 하루 평균 10명 정도의 목욕을 돕는데 대기자가 많을 때는 점심시간도 빼가며 한다. 국립재활원은 요양원이 아니어서 간병인이 직접 환자를 목욕시켜야 하기 때문에 수신회가 오는 날이면 많은 환자들이 대기표를 받고 순서를 기다린다. 이때만큼은 간병인도 잠시나마 쉴 수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메르스로 인해 봉사활동을 하지 못해 마음에 걸린다는 이현우 씨. 그가 봉사를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밝게 지내던 한 아이다.

“한 번은 중학생 정도 되는 아이가 목욕을 하러 왔어요. 선천적으로 근육이 점점 줄어드는 병을 앓고 있었는데도 성격이 참 밝았어요. ‘아줌마들에게 목욕 받기 불편하다’고 하기에 ‘너보다 큰 아들이 있다’고 하면서 친해졌죠. 당시 어른들도 애한테 배울 게 많다는 걸 느꼈죠. 어른들은 근심걱정만 하고 웃을 줄을 모르니까요.”

이 씨는 목욕봉사를 시작한 이후 자신의 삶에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됐다. 오래 전 잃은 재산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두 팔과 두 다리가 성한 것만 해도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는 걱정 중 가장 편한 걱정이 바로 ‘돈 걱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무언가에 대해 불평불만 할 때면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조언을 한다고.

이 씨가 불교계 자원봉사를 하며 느낀 점은 ‘소통 부족’과 ‘편향된 봉사’다. 소통에 관한 정기적인 자원봉사교육이 있긴 하지만 봉사자들의 연령대가 높아 일명 ‘끼리끼리 문화’가 생겨 대화가 단절되는 걸 느꼈다. 또한 다른 불자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봉사팀이 다르다는 이유로 겪는 갈등도 자주 봤다. 반면 이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타 종교계의 봉사활동을 보며 느낀 점이 많았단다. 그리고 불자들만큼이라도 힘든 봉사라고 해서 멀리하지 않고 모든 분야에서 고르게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봉사에는 있는 것 같아요. 봉사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생각보다 심하다는 걸 느끼거든요. 이걸 불교계가 가장 먼저 극복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말미, ‘자원봉사에 귀함과 천함이 있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졌다. 봉사가 돈으로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자본주의 경제논리도 아닌데 말이다. 이현우 씨의 법명인 ‘선타행(善他行)’이 쉬이 꺼지진 않겠지만 그의 바람처럼 열악한 봉사환경에 많은 불자들의 손길이 닿아 아랫목뿐만 아닌 윗목도 따뜻해지길 기대해본다.

▲ 수신회는 2011년 국립재활원 자원봉사자 간담회에서 우수자원봉사상을 받았다. 맨 왼쪽이 이현우 씨. 〈사진제공=조계종사회복지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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