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6일 봉사 ‘행복해요!’
“남 돕는 삶 나를 위한 삶이더군요”

▲ 매일매일 봉사하는 삶이 즐겁다는 이문희 씨. 인터뷰 내내 밝은 얼구로 '실천'을 강조하는 그에게서 보현보살의 원력 같은 강한 힘이 느껴졌다.

비온 뒤 땅 굳듯 단단해진 봉사 다짐
보현보살 원력 세워 20여 년간 실천

“혹시 이 중에 재(財)보시 하실 분 계십니까? 한두 번하다가 끝낼 것 같으면 시작하지 마시고 장기적으로 성심껏 하실 분만 손 들어보세요.”

1990년대 초, 서울 미아동 한 포교당을 다닐 무렵이다. 여수 흥국사-향일암-남해 보리암으로 무박2일 삼사순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 주지스님이 마이크를 잡더니 버스에 타고 있던 불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불교에 큰 관심이 없던 40대 이문희(64) 씨는 시주자를 찾는 스님의 말이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혹시 스님과 눈이 마주칠까봐 몸을 한껏 웅크린 채 딴청을 피웠다. 신도회 총무가 손 든 사람 이름을 종이에 적었다.

주지스님이 다시 마이크를 입에 갖다 대고 물었다. “그럼 봉사하실 분은요?” ‘무슨 봉사인가?’라는 생각을 채 하기도 전에 손을 번쩍 들었다. 앞서 딴청을 피운 게 가슴에 미안함으로 남아 있다가 재보시가 아닌 몸으로 하는 봉사라는 말에 불쑥 손이 올라간 것이다. 포교당 인근 복지관에서의 무료급식봉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봉사하다 아상(我相) 생겨

우연도 인연이었는지 이렇게 시작된 이문희 마음나눔회장의 봉사활동은 20여 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그가 몸담은 봉사단체는 조금씩 늘어 현재는 마음나눔회(1996년 경불련 부설 해외구호단체로 설립된 (사)이웃을돕는사람들에 속한 봉사단체) 뿐만 아니라 조계종사회복지재단 ‘화목회’, 길음종합사회복지관 ‘사랑봉사회’, 성북구자원봉사센터 ‘송이봉사단’ 등 여러 봉사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 달 평균 봉사하는 날은 25일 남짓. 웬만한 직장인들의 출근 날짜보다 많은 날을 봉사활동으로 보내고 있다.

그녀의 봉사활동 시간을 알게 된 주변사람들은 대부분 ‘힘들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지금보다 더 많이 했다는 대답에 깜짝 놀란다.

“나이가 드니 벅차더군요. 그래서 봉사시간을 좀 줄였어요. 개인 시간이 없어 보여도 여행도 다니고 할 건 다 하면서 지내요.”

20여 년 간 봉사활동을 하게 된 이유가 첫 봉사활동에서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은 아니다. 당시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었고 이후로도 봉사활동과 신행활동을 병행했지만, 특별한 사명감을 갖고 있진 않았다. 그저 무료급식ㆍ수지침ㆍ염불ㆍ수해복구ㆍ군법당 지원 등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그냥 찾아갔을 뿐이다.

이렇게 묵묵히 봉사활동을 하던 어느 날,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 마음을 비집고 올라온 아상(我相)이었다. 별 생각 없이 열심히 봉사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이제는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집착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 번 자리 잡은 아상은 좀체 떨쳐낼 수 없었다.

“당시엔 나 아니면 안 되는 건 줄 알고 목에 깁스한 사람처럼 힘주고 다녔죠. 지금 돌이켜보면 별 것도 아닌데 그때는 엄청 대단한 일인 양 생각했어요. 한편으로는 전보다 더 열심히 봉사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독이었다고 생각해요.”

아상을 깨는 기회는 큰 고통과 함께 찾아왔다. 어느 날 사찰 앞에서 시내버스에 올라 토큰을 넣는 순간, 누군가 뒤통수를 때린 것처럼 정신이 아찔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팔다리에 깁스를 한 채 병원 침대에 누워있었다. 당시 버스 뒤를 따라가던 유조차 운전사가 졸음운전을 했는지 버스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교통사고, 하심의 계기

이 사고로 그녀는 1년 반을 병원에서 살았다. 으스러진 뼈가 붙을 때까지 하루하루가 고행이었다. 오랜 병원생활에 우울증이 생기고, 다리가 낫지 않아 부처님을 향해 욕도 많이 했다. 복덕을 그만큼 쌓았는데 나한테 왜 이런 고통을 주느냐고. 친언니가 세상을 떴을 때는 거동이 불편해 장례식장조차 갈 수 없었다. 더욱 화가 났던 건 나 없으면 안 될 것 같던 봉사활동이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조금씩 ‘내려놓기’를 시작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복지관에 목욕차가 생겼어요. 저보고 시승식을 같이 하자고 해서 도반들의 부축을 받아 갔죠. 그런데 제가 몸이 불편하니까 폐만 끼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홀로 설 때까지 봉사활동 대신 재활에 힘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문희 회장은 교통사고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아상을 놓고 주변을 다시 돌아보니 그동안의 봉사활동이 얼마나 큰 공덕이었는지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날마다 사람들이 병문안을 다녀가며 그녀를 위로했다. 강원도에서 좋은 물을 떠왔다며 건네주는 사람도 있었고, 알고 지내던 목사님이 쾌유를 빌며 기도를 해주기도 했다. 그동안 그녀의 손길이 닿았던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아와 그녀의 쾌유를 빌어줬다. 특히 생전 본 적 없는 스님이 찾아와 매일 반야심경을 독경하며 기도해줬을 때는 만감이 교차했다.

“옛 속담에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머리카락으로 신을 삼아 바친다’는 말도 있지만, 병상에 누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하나 늘 고민했어요. 그때 ‘내 남은 삶은 덤으로 얻은 것이니 죽을 때까지 남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이문희 회장이 봉사하는 삶을 다짐하며 재활을 할 당시, 문득 떠오른 사찰이 있었다. 도봉산 만월암이었다. 만월암은 24년 전 산행을 하다가 밤에 길을 잃고 헤매던 중, 기도를 위해 산을 오르던 한 비구니 스님의 도움을 받아 하룻밤을 묵었던 사찰이다. 그 인연 때문인지 이문희 회장은 자신의 불심에 싹을 틔워준 계기가 됐던 만월암이 갑자기 가고 싶었다. 아픈 몸은 생각지도 않고 도봉산을 향하려 하자 담당의사가 막고 나섰다. ‘절대 안 된다’던 담당의사도 이 회장의 막무가내 고집을 꺾지 못하고 ‘문제가 생겨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조건을 붙여 외출을 허락했다.

막상 허락은 받았지만, ‘과연 이 몸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도봉산에 발을 디딘 날, 만월암까지 오르는데 5시간 반이 걸렸다. 평소 걸음으로 넉넉잡고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과 함께 도착한 만월암, 그곳에 있던 스님은 “도대체 어떻게 내려가려고 왔느냐”며 걱정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오래 전 그날처럼 만월암에서 하루를 보낸 이 회장은 비료포대를 끌며 3시간이 걸려 내려왔다.

우여곡절 끝에 다녀온 만월암은 그녀의 가슴에 용기를 불어넣어줬다. 재활운동을 열심히 한 덕분에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얼마 후 다시 만월암을 올랐을 때는 3시간이 소요됐다. 그렇게 조금씩 건강을 되찾은 이 회장은 웃으며 퇴원할 수 있었다.

“힘든 병원생활이 마음수행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퇴원 후에는 항상 웃으며 살게 됐어요. 그냥 삶이 즐겁더라고요. 그리고 봉사에 임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졌어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소임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니 제가 할 일인데 나태해지면 안 되잖아요.” 

불자들, 봉사 적극 나섰으면

스님들은 항상 불자들에게 하심(下心)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대부분 불자들은 하심의 의미는 이해하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이 회장은 뻣뻣했던 목에 힘이 빠지는 걸 느끼며 ‘이것이 하심이구나’ 깨닫게 됐다. 어떤 지인이 “법회 때 절을 하는 건 내 앞에 있는 보살님 엉덩이에 대고 하는 것”이란 우스갯소리를 했을 때, 어느 스님이 밍크코트를 입고 온 불자에게 “옷이 더러워질까 노심초사하면서 어떻게 보살의 마음을 지닐 수 있겠느냐”고 질책을 했을 때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이문희 회장의 법명은 ‘금강심(金剛心)’. 이 법명은 80년대 남양주 봉선사 청풍루 불사를 할 때 운경 스님에게 받았다. 이 회장은 이런 시련을 거치며 법명처럼 깨지지 않는 굳건한 봉사 원력을 세웠다.

이문희 회장이 봉사활동에 매진하게 된 배경에는 수지침을 가르쳐준 선생님의 가르침도 한몫했다. 1994년 방생선원에 불교자원봉사연합회가 창립한 이후 그곳에서 수지침을 배웠다. 그때 수지침 선생님은 “내 손으로는 한 사람밖에 (수지침을) 못 놓는다. 하지만 여럿이 배우면 더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무료로 배웠으니 무료로 봉사를 하라”고 당부했다.

이 회장이 요즘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단체는 길음종합사회복지관ㆍ경희의료원ㆍ탑골공원 무료급식소ㆍ생명나눔실천본부ㆍ백련장학회ㆍ국방부 및 경찰청 법당 등이다. 이외에 몇몇 군부대 먹거리 후원과 사찰 울력 봉사도 하고 있다. 그녀의 한 달 일정은 항상 이렇게 빡빡하다. 매일같이 자원봉사를 하는 그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뭘까?

“복지관을 통해 알게 된 혼자 사는 할머니를 돌봐드린 적이 있어요. 집안 청소하고 반찬 갖다 드리고, 말동무도 해드렸는데 당최 말씀을 안 하시더군요. 한 3년 정도 지났을까? 조금씩 제게 마음의 문을 여셨어요.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당신 돌아가실 때 수의 좀 예쁘게 입혀달라고’.”

이 할머니와 10년 넘게 인연을 이어갔다. 작은 냉장고를 할머니 댁에 놓아드리기 위해 사찰에서 모금도 했고, 먹거리가 생기면 항상 두 손 가득 들고 할머니를 찾아갔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할머니는 경증 치매가 왔고, 사위라는 사람이 찾아와 일언반구도 없이 데려갔다. 그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사위여서 할머니의 전세금을 노린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이후 한동안 마음 한 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헛헛하더라고요. 내 부모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연이 끊어지고 나니 허탈함을 감출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는 쉽게 인연을 안 맺으려고도 했었죠.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데요. 지금도 다른 어르신을 돕고 있거든요.”

이문희 회장이 가장 가슴 깊이 담고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보현행원(普賢行願)’이다. 특히 보현보살의 10대원 중에서도 자신의 모든 수행공덕을 중생에게 회향하겠다는 ‘보개회향원(普皆回向願).’그래서 그녀는 많은 불자들이 앞장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눔(봉사)을 펼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봉사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젊은 불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데까지 봉사를 멈추지 않겠다는 이문희 회장. 그녀의 큰 원력이 메마른 사바세계에 내리는 한 줄기 감로수처럼 느껴져 반갑고 고맙다.

▲ 이문희 씨가 도반과 함께 경희의료원에서 한방뜸 재료를 틀에 넣어 모양을 내고 있다.
▲ 2013년 열린 제15회 전국불교사회복지대회에서 '자비나눔 유공자'로 선정된 이문희 씨.<사진제공=길음종합사회복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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