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봉사가 세상 맑게 한다면 그걸로 만족”

▲ 장덕수 향기소리 상임대표가 조계사 탑 앞에서 자신의 서원 실천을 다짐하고 있다.

사찰에서 배운 불교 밖에서 실천
세월호 아픔 달래려 노란리본 앞장

훌륭한 수행자(종교인)의 삶이 누군가에게 본보기가 돼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쁜 짓만 일삼던 이가 그간의 삶에 대해 참회하고 개과천선해 보살의 삶을 살기도 하고, 때론 종교까지 바꾸어 놓기도 한다. 종교인의 행동을 본보기삼아 자신을 뒤돌아보고 나눔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만큼 종교와 종교인이 일반대중에게 끼치는 영향이 크다는 말이다.

젊은 시절,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이가 있다.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려고 성경 공부에 매달리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종교적 신념과 상ㆍ제례를 해야하는 현실 문제로 갈등에 빠지게 된다. 다니던 교회의 목사를 비롯해 여러 성직자들에게 자문을 구했지만, 속시원한 답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가 갈구하던 해답은 그 종교의 어느 성직자도 해결해주지 못했다. 지난해 세월호 침몰 후 무사생환을 기원하며 서울 청계천에서 노란리본에 소원 쓰기 캠페인을 전개했던 사회봉사단체인 향기소리의 장덕수(55) 상임대표의 이야기다.

그는 전남 장흥의 한 시골 마을의 가난한 집안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천수답(天水畓, 저수지나 지하수 펌프 등의 관개 시설이 없어 물을 오로지 빗물에만 의존하는 형태의 논) 7마지기로 생계를 이어가는 빈농이었다. 증조부 때는 지역에서도 알아주는 부자였단다.

제사 의무는 장손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들의 공통적인 고민거리다. 그 또한 장남의 무게를 항상 어깨에 지고 살아야 했다. 개인의 종교 때문에 집안의 대사인 제사를 저버릴 수는 없었다. 만약 그 문제가 해결됐다면 그는 지금도 기독교인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고, 봉사를 하며 보살의 길을 걷게 된 데는 2010년 3월 입적한 ‘무소유’의 저자 故 법정 스님의 영향이 컸다. 

어머니 영향 ‘불교’로 개종

기독교인이었던 그의 불교 인연은 법정 스님 이전 어머니로부터 비롯됐다. 학창 시절, 자신의 꿈인 사관생도를 꿈꾸며 서울로 유학왔다. 사관학교 시험을 하루 앞두고 불자인 어머니가 꿈에 어느 할머니를 따라 갔다가 먼 곳에서 빛을 발하는 부처님을 보고는 아들이 잘 될 거라고 기대를 했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취직 후 종교란에 무엇을 적을까 고민하다 어머니의 종교인 ‘불교’를 적었다. 매년 한 번, 부처님오신날 어머니를 모시고 절에 갔었다.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절에 가는 걸 좋아해 효도차원에서 갔단다. 결혼 후 아내가 다니던 단양 구인사에서 철야기도도 했다. 자동차가 없었던 시절이라 버스를 타고 갔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가슴 속에 담겨 있던 묵직한 것들이 하나씩 버려졌다. 장덕수 상임대표는 “아내와 함께 몇 번 구인사에 찾아갔었다. 밤을 새서 기도를 하고 나면 몸은 피곤했지만, 뭔지 모르게 가슴 속에 와 닿는 게 있었다”고 불교 인연을 소개했다.

이후 직장 인근에 있는 송광사 서울 분원인 법련사에 다니며 법정 스님을 알게 됐고, 불교에 심취하는 계기가 됐다. 그때는 법정 스님이 어떤 스님인지도 몰랐단다. 그는 “당시에는 법정 스님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굉장히 친절하게 불교에 대해 알려주신 스님이었다”고 기억했다. 그 인연으로 불교공부를 하게 됐고, 법정 스님으로부터 ‘법운(法雲)’이라는 법명도 받았다. 그 뒤 법정 스님이 길상사를 창건하자, 자신의 원찰로 삼고 신행활동을 이어갔다. 장 상임대표는 “법정 스님은 당시 대중들에게 ‘이 절, 저 절 다 좋아도 ‘친절’ 만큼 좋은 게 없다’고 강조하셨는데, 제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10년 법정 스님이 입적하기 전인 2009년 말 도반 2명과 함께 ‘산골’이라는 이름의 봉사단체를 결성했다. 법정 스님이 병상에 누워 있을 당시 사찰 내부의 분란 때문에 신행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였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장덕수 상임대표는 “사찰에서 불교를 배웠으면 졸업(절집 밖에서 봉사)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운 것을 행하지 않으면 초등학생 수준에만 머무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가진 재가불자 2명과 의기투합해 불교 밖에서 활동할 수 있는 봉사단체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군법당 지원부터 시작했다. 교회에 나오는 장병들에 비하면 불자장병들에 대한 지원은 매우 열악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처음엔 만원 씩 걷어 초코파이를 사서 군법당에 찾아오는 장병들에게 지원했다. 이를 안 불자들이 한 명 두 명 가세하기 시작해 인원도 크게 늘었다. 인원이 늘다보니 후원금도 많아져 타종교에 비해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후원을 할 수 있게 됐다.

그가 군포교에 더 매진하게 된 건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자살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장덕수 상임대표는 “장병들에게 ‘이 세상에 태어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 고통을 받게 된다. 사람 몸 받고 있을 때 그 이치를 알고 소중하게 국가에 충성하고 다시 부모에게 돌아가는 것이 큰 효도이고 부처님 공부하는 사람의 자세다’라는 요지의 내용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단체 이름도 ‘향기소리’로 바꿨다. 향기소리는 ‘향기(법향)는 만년을 가고, 좋은 소리(범음)는 천리 밖에 있어도 들린다’는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그는 봉사단체 운영의 원칙을 ‘투명하게, 자발적으로’로 정했다. 봉사활동 하면서 보람을 느낀 이들이 친구를 데려오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났다. 그리고 불교적 색채도 가능한 배제했다. 그래서인지 자발적으로 봉사에 참여하는 인원이 늘어 지금은 300여 명에 이른다. 대부분이 불자지만, 타종교인과 무종교인도 참여하고 있을 정도로 불교를 벗어난 봉사단체로 자리잡았다. 

청계천 노란리본 달기 전개

그는 회원들과 새로운 봉사 분야를 모색, 신생아 모자 뜨기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하안거 90일, 동안거 90일 동안 수행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직접 모자뜨기를 할 수 있는 이들은 재능기부를 하고, 할 수 없는 이들은 실값을 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2014년에는 이불을 포함해 1400여 개를 만들어 국제구호단체에 전달하기도 했다. 또 매주 둘째주 수ㆍ목, 셋째주 토요일에는 종로지역의 노인복지관을 찾아 밥퍼주기 봉사를 한다.

특히 그는 지난해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누군가는 울분을 풀어낼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청계천에서 노란리본에 희망의 메시지를 써서 달도록 하는 캠페인을 주도했다. 당시 연등회보존위원회 측의 요청으로 시작했다. 장 상임대표는 “힘겨워하는 국민들이 마음 속에 담고 있었던 아픔을 노란리본에 써서 달고 나서 조금이나마 마음을 치유하는 것 같았다”면서 “젊은이들도 아픔을 거기에 내려놓는 걸 보고는 이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청계천에 매달았던 노란리본들은 서울시에서 가져가 보관 중이다. 장덕수 상임대표는 세월호 노란리본달기 행사에 자원봉사를 한 공로로 한국불교종단협의회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이번 부처님오신날 연등회 때에도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요청으로 지방에서 올라온 대형버스의 주차 관리를 위해 여의도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그는 “간화선 무차대회와 연등회를 우리의 힘으로 도울 수 있어 뿌듯했다”면서도 “행사 후 불자들이 쓰레기 하나 남기지 않는 모습을 보고 우리 불자들의 의식수준이 높다는 걸 알게 된 것이 더 기뻤다”고 전했다. 

정년 후 염불봉사 매진 발원

법정 스님과의 인연으로 봉사단체를 만들고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봉사활동은 생각지도 못했었다. 그랬던 그가 개인의 봉사활동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정년퇴직 이후를 계획하면서 보람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봉사’를 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을 공무원으로 살며 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살았는데, 잘 회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면서 “정년퇴직하고 봉사활동으로 회향해야겠다는 원을 세웠다. 그래서 포교사 시험을 보고 자격증도 취득했다”고 밝혔다.

정년을 2~3년 앞둔 그는 퇴직 후 염불봉사에 매진하고 싶다고 밝혔다. 장 상임대표는 “예전에는 집집마다 식구들이 많아 장례를 치르는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요즘 문상을 가보면 상주가 없어 애를 먹는 모습을 많이 봤다. 안타까웠다. 그래서 염불봉사를 마음먹었다”며 “목탁습의도 열심하고 있다. 나의 봉사가 불교를, 사회를 좀 더 맑힐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다.

늦깎이 자원봉사자이지만, 열정 만큼은 수십 년 봉사활동을 한 이들에게 뒤지지 않는다. 연등이 장엄된 조계사 대웅전 앞마당에 서 있는 탑을 마주하고 ‘내가 세운 서원을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두 손이 활짝 피기 전 연꽃 봉오리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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