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잊으라는 이들
부처님의 ‘悲’ 되새겨
묵묵히 함께 해주길


불교강좌에서 수강생들에게 이렇게 묻곤 한다.

“불교에서는 자(慈)와 비(悲) 가운데 어느 걸 더 중요하게 볼까요?”

사람들은 좀 당혹한 표정이다. 흔히 ‘자비’라고 쓰고 ‘사랑’이라고 읽어 왔는데 그걸 새삼 가른다? 하지만 경전을 읽어보면 ‘자비’는 하나의 단어로 쓰이기보다는 엄연히 ‘자’와 ‘비’ 두 글자로 나눠 쓰이고 있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경전에서 뚜렷하게 자와 비로 나눠 말하고 있는 만큼 우리도 좀 진지하게 이 두 글자의 뜻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앞서의 질문에 대한 답은 ‘비’이다.

물론 자(慈)는 중요하다. 요즘 자애명상도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경전 요소요소에 가슴 찡하게 ‘비’가 등장하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에게만 있는 덕성인 18불공법의 마지막 항목은 대비(大悲)이다.

부처를 낳는 이는 반야요, 반야를 낳는 이는 대비(大悲)다. 그리고 모든 보살들은 맑고 깨끗한 불국정토를 원하나 석가모니만큼은 혼탁한 사바세계에 가서 성불하기를 원하니 이런 석가모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슬픈 꽃이라고 부르는 〈비화경(悲華經)〉도 있다. 관세음보살을 향해서도 ‘대비관세음보살’이라 하지 않는가.

자(慈)의 뜻은 아시다시피 우정, 자애, 사랑이다. 그리고 비(悲)의 원어는 까루나(karua)로서, 연민, 동정, 슬픔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뜻은 조금 더 넓혀져서 ‘힘든 상황에 처한 생명체들을 향해 품는 슬픔’을 뜻하게 되고, 그리고 나아가 저들의 괴로움을 없애주려는 마음까지도 뜻하게 되었다. 측은한 마음, 동병상련의 마음이 비심(悲心)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는 힘이 드는 일이다. 부처님이 생명체를 향해 보내는 시선에는 그런 존재를 향한 애틋한 슬픔이 담겨 있다. 그러할진대 유난히 힘든 처지에 놓인 생명체를 향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매의 공격을 피해 숨어든 비둘기 일화를 보자. 비둘기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살을 도려낸 보살에게는 약한 비둘기를 향한 측은한 마음과 그걸 먹어야만 사는 매에 대한 연민이 크게 움직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의 충격이 사람들에게 크나큰 아픔을 안겨준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여전히 몇 사람은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세월호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살릴 수 있음에도 손 놓고 있었던 그 때 상황에 대한 해명과 책임규명은 없다.

참다 못해 거리로 나온 유가족들을 바라보면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다. 그런데 저들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더러 있다. 아이들은 배에 갇혀 죽어가는 마당에 대입특례니 보상금이니 하는 말을 흘러냈던 정치권. 전국적으로 애도했고 두둑하게 보상받았으면 됐지 뭘 더 바라느냐는 사람들. 이미 지난 일을 왜 자꾸 들먹이냐며 빨리 잊으라고 재촉하는 사람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저들의 마음이 새털보다 가볍고 흐르는 강물보다 빨라서 놀랍다.

진득하게 슬픔을 머금고 지켜볼 수는 없을까. 저들의 아픔을 속속들이 살펴서 그 아픔의 근원을 찾아내 도려내는 일을묵묵히 함께 하기가 그토록 어려울까.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저 인정에 모쪼록 슬픔의 무게가 얹혔으면 좋겠다. 부처님이 자애의 꽃이 아닌 슬픔의 꽃이라 불리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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