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 살인 참회, 전란 속 가족 목숨 구해

                      
 
청나라 사람 정백인은 오래도록 양주 땅에 살면서 〈법화경〉을 지송하고 또한 관세음보살님을 정성껏 섬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름 나라에 난리가 나서 적국 병사가 양주 땅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적병들의 행패는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습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인과 약탈, 방화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과 신음소리가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마을은 불지옥, 생지옥이었습니다. 17명이나 되는 정백인의 가족들은 모두 벌벌 떨고만 있었습니다. 정백인이 믿는 것이라곤 오직 〈법화경〉과 관세음보살님뿐이었습니다.

그는 〈법화경〉을 독송하며 관세음보살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관세음보살님, 부디 저희 가족들을 구하여주십시오.”
 
“가엾은 식솔들이 지금 죽음의 위난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이상하게 다른 집은 방화와 약탈을 당하는데, 오직 정백인 집만은 무사하였습니다. 분명 적병들이 양쪽 이웃집은 들이닥쳐 약탈을 하는데도 정백인의 집에는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우리 집을 사람이 살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것일까?”
 
식솔들은 그렇게 말하며 숨소리마저 내지 않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언제 적병이 집안에 들이닥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불안은 점점 가중되었습니다. 드디어 참다못한 아내와 동생들이 정백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밤에 몰래 도망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정백인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적지 않은 우리 식구가 몸을 움직이면 십중팔구 적병들에게 들킬 것이오. 내가 밤낮으로 관세음보살님께 간청하고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봅시다.”
 
“우리는 지금 가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적군들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모두 죽을 것입니다. 형님이 아무리 반대해도 우리는 오늘 밤 이곳을 빠져나갈 것입니다.”
 
동생들의 태도는 완강했습니다. 정백인은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나마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이지, 언제까지 적병들이 이 집을 가만둘 리 없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정백인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크고 좋은 집이었습니다.
 
“언젠가는 적병들이 우리 집에 오겠지. 그렇지만 오늘 하루만 더 기다려보자. 지금 나가다가 발각이 나면 우리 가족은 몰살이다.”
 
“형님, 안됩니다. 지금 저들의 약탈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저 비명 소리를 들어보세요. 더 지체하다가는 형님 말씀대로 정말 몰살당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도망치다 붙잡힌다고 해도  몇 사람은 살아남을 수 있겠지요.”
 
동생들은 울면서 간청했습니다.
 
“그래, 좋다. 단 하루, 하루만 참아다오.”
 
동생들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정백인이 그렇게 말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자신에게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나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 날 밤 꿈에 관세음보살님이 나타났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정백인은 관세음보살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너의 가족 17명 중에 16명은 환난을 면할 수 있지만 오직 너 하나만은 어려움을 면할 수가 없으리라.”
 
정백인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많은 식구들 중에 오직 자신만이 환란을 면할 수 없다는 보살님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식구 중에 자신이 가장 부처님을 잘 따르고, 또한 관세음보살님께 정성으로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백인은 필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 정성이 깃든 기도를 마치고 까무룩 잠이 들 무렵 다시 보살님이 나타났습니다.
 
정백인은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 저는 누구보다도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을 받들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오직 저만이 이 환란에서 구제받을 수 없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자 관세음보살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전생에 왕마자라는 사람을 칼로 스물여섯 번이나 쳐서 죽였으니 지금 그 목숨을 갚게 되는지라. 가족 16명을 다른 곳에 안전히 옮긴 후에 네가 혼자 기다리다 죽을지언정 가족에게는 누를 끼치지 말라.” 

정백인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만이 환란을 면할 수 없는 명백한 까닭을 알았습니다. 두 줄기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흘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죽인 왕마자에 대한 미안함의 눈물이었습니다. 가족만 무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는 마음 깊이 참회하고 관세음보살님이 시키는 대로 모든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고 자신만 홀로 집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관세음보살님 말씀대로 닷새 후 적병이 집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정백인은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목을 내밀었습니다. 정백인을 죽이려 칼을 빼든 적병의 선봉이 주춤 뒤로 물러섰습니다. 이상했던 것입니다.
 
“너는 왜 도망도 가지 않고, 반항도 하지 않는 것이냐?”
 
정백인은 칼을 빼든 적병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그대의 이름이 왕마자인가?”
 
적병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네가 어찌 나의 이름을 아는가?”
 
“내가 그대에게 스물여섯 번의 칼로 빚진 것이 있으니 나를 속히 죽일지어다. 그것 말고 나와 그대가 다른 원수진 일은 없도다.”
 
적병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 모든 걸 어찌 알고 있느냐?”
 
정백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이 꿈속에서 이르신 말씀이네.”
 
왕마자는 칼을 내던지며 탄식했습니다.
 
“네가 전생에 나를 죽인 까닭에 그런 것인지, 지금 너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나 내가 오늘날 너를 죽이게 되면 다음 세상에 다시 네가 나에게 앙갚음을 하지 않겠느냐? 그리고 관세음보살이 현몽까지 하신 것을 내 마음대로 하게 되면 이는 성현을 저버림이라. 어찌할 수 없다.”
 
“아닐세. 당장 나를 죽여 그대의 원한을 풀게나. 그래야 나도 새로운 세상을 살지 않겠나? 어찌 사람을 스물여섯 번이나 쳐서 죽인 죄인을 살려두려 하는가? 그건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 아닐세.”
 
한참을 생각하던 적병은, 아니 왕마자는 다시 칼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자네의 소원대로 해 주겠네.”
 
정백인은 비로소 입가에 웃음을 띠며 목을 왕마자 앞에 내밀었습니다.
 
“이것으로 나를 용서하시게. 자네가 지금 나를 죽였다고 해서 내가 다시 자네를 찾는 일은 없을 것일세.”
 
칼을 든 왕마자 또한 빙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그대를 죽이면 그대와 나의 악연도 끝나는 것일세. 부디 좋은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왕마자가 칼을 하늘 높이 쳐들었습니다.
 
정백인 또한 눈을 감고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곧바로 왕마자가 칼을 휘둘렀습니다. 그러나 왕마자는 칼을 거꾸로 잡고 있었습니다. 왕마자는 칼등으로 꼭 스물여섯 번, 정백인의 등을 치고 황황히 떠나갔습니다.

원한이 원한을 낳는 오늘의 세태, 이제 그만 원한이 용서를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참회의 디딤돌이 되었으면 합니다. 멀리 숙세는 아니더라도, 현세의 원한들만이라도 지금 당장 훌훌 털고 웃는 그런 중생들을 보고 싶은 꽃 피는 4월입니다. 하늘 가득 하얗게 흩날리는 꽃잎 속에, 사소한 우리들의 모든 원망과 분노를 깡그리 날려버릴 수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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