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머슴 품삯 시주… 사또로 환생

 

심산유곡.

철원 보개산 심원사에 묘선이라는 젊은 스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노스님을 모시고 산책을 하던 묘선 스님은 노스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스님, 아무래도 절이 너무 낡아 보수를 해야 되겠습니다.”

“알고 있다. 그러나 살림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디 엄두를 내겠느냐?”

“스님, 보수는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법화경〉이 합니다.”

“그래?”

“저는 오늘부터 〈법화경〉 독송 백일기도를 올리면서 불사를 시작하겠습니다.”

묘선 스님은 그날로 백일기도에 들어갔지요. 젊은 스님의 기도는 간곡했습니다. 〈법화경〉 7책 전부를 모두 독파하고 외워 백일기도를 회향하는 날 밤.

“묘선아, 네 기도가 그토록 간절하고 불심이 장하니 반드시 시주가 나타나 절 중창을 이루게 될 것이다. 내일 아침 일찍 화주를 구하러 나가도록 해라. 맨 처음 만나는 사람이 심원사 중창불사의 시주가 될 것이니라.”

꿈에 나타나신 분은 분명 부처님이셨습니다. 잠에서 깬 묘선 스님은 거뜬한 마음으로 길 떠날 채비를 차리곤 노스님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소승 화주길에 오르겠습니다.”

“오냐, 잘 다녀오너라.”

그런데 묘선 스님이 막 산문 밖을 나서는데 웬 나무꾼 하나가 아침 일찍부터 나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치려다 꿈 생각을 한 묘선 스님은 나무꾼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아랫마을에 사는 머슴 박 씨였습니다.

‘머슴 박 씨가 우리 절 중창 불사 시주가 될 수는 없을 텐데… 그냥 지나칠까?’

묘선 스님은 잠시 망설였습니다. 평생 머슴으로 산 세월, 그에게 돈이 있을 리 만무했습니다. 묘선 스님은 그만 빙긋 웃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절의 중창이 급하다고 하지만 오갈 데가 없어 남의 집 머슴을 사는 사람에게 시주를 부탁한다는 자체가 정신 나간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자 언뜻 묘선 스님의 표정을 바라본 박 씨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였습니다.

“아이구, 심원사 스님이시군요. 어디 먼 길 떠나십니까?”

“일찍 나오셨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어찌하여 저를 보시고 웃으시는지요?”

“아닙니다. 제가 거사님을 뵙고 이상한 생각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상한 생각이라니요?”

박 씨는 묘선 스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난감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박 씨가 아무리 머슴이라고 하지만 부처님 앞에는 평등한 법, 시주와 관계없이 묘선 스님은 박 씨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간 밤에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우리 절 시주가 되겠습니까?” 물론 묘선 스님은 조금의 기대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박 씨에게도 나름의 예의를 지킨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박 씨는 한동안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묘선 스님은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박 씨는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오십평생 못 간 장가, 이제 가서 뭘 하나. 차라리 그 동안 머슴살이로 모은 재산을 절 짓는데 보시하여 부처님께 공덕이나 지어야지.”

박 씨는 마음을 정리했는지 기꺼운 마음으로 스님에게 대답했습니다.

“스님께서 제게 시주가 되라는 데는 큰 뜻이 있을 것입니다. 스님 말씀에 따라 40년간 모은 저의 전 재산을 불사기금으로 시주하겠습니다.”

묘선 스님은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습니다. 박 씨가 그렇게 적지 않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놀랍고, 더구나 그것을 모두 중창불사에 희사한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고맙긴 하지만 거사님의 시주는 받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그저 예의적으로......”

그 순간 박 씨의 미간이 찌그러졌습니다.

“스님, 부처님도 사람 차별합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스님은 손을 저어 변명을 하려 했지만 이미 박 씨는 저만치 멀어져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얼른 뛰어가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시오. 내 거사님의 시주공양을 정성을 다해 받을 것입니다.”

그제야 박 씨는 빙긋 웃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이 인연공덕으로 거사님은 다음 생에 좋은 인연을 받을 것입니다.”

박 씨의 시주로 심원사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머슴 박 씨가 시주를 한 그날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그만 자리에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돈을 모두 절에 시주한 박 씨는 약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주인집에서는 머슴이 일을 못하고 눕게 되자 공밥을 먹일 수 없다고 박 씨를 절로 보냈습니다. 묘선 스님은 박 씨를 위해 극진히 간병하면서 정성껏 기도를 올렸으나, 차도가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병은 악화됐고, 끝내 박 씨는 죽고 말았습니다. 인근 마을에서는 묘선 스님이 순진한 머슴 박 씨를 속여 결국은 죽게 했다고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묘선 스님은 더 이상 심원사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절을 떠나기로 결심한 스님은 새벽예불을 올리러 법당으로 들어갔지요. 희미한 촛불 속에 부처님을 바라보는 묘선 스님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마침내 법당을 나온 그의 눈은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수지 독송하며 신주단지 모시듯 받들었던 〈법화경〉 책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이 세상 그 누가 와도 건드릴 수 없다던 〈법화경〉의 책들은 다른 종이들과 똑같이 홀랑 타버리고 재만 남았습니다.

“그동안 내가 감쪽같이 속았구나! 그 말도 안 되는 구절에 속아 세월을 허비하다니!”

재만 남은 〈법화경〉의 흔적을 바라보는 묘선 스님의 얼굴엔 두 줄기 눈물 자국만 선명했습니다. 그토록 영험하다는 〈법화경〉이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시주자를 죽게 한 경전이란 생각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묘선 스님의 분노와 원망은 그것에 그치질 않았습니다. 묘선 스님은 자기도 모르게 헛간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스님의 손에는 어느새 도끼가 들려 있었습니다. 스님은 법당으로 다시 들어가 부처님 이마를 도끼로 내려치고는 황망히 절을 빠져 나갔습니다. 그 뒤 신심을 잃고 그저 전국을 만행하는 묘선 스님의 발걸음은 늘 무겁기만 했습니다. 부처님 이마에 박힌 도끼가 빠지지 않는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어느 날.

묘선 스님은 심원사 부처님께 용서를 빌고 자신이 그 도끼를 뽑고 싶은 생각이 들어 심원사로 갔습니다. 절은 30년 전 불사가 중단된 모습 그대로였고, 부처님 이마엔 도끼가 그대로 박혀 있었습니다. 묘선 스님은 가슴이 아팠습니다. 마침 그 무렵 새로 부임한 젊은 사또는 신심 돈독한 불자로서 심원사 부처님 이마의 도끼를 손수 뽑겠다고 절에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법당에 들어선 사또는 삼배를 올린 후 부처님 이마의 도끼를 너무나 쉽게 뽑았습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도끼를 뽑아든 사또의 표정이 이상했던 것입니다.

‘시주 화주 상봉’

도끼에는 이렇게 여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법당 문밖에서 바라보고 있던 묘선 스님은 그 때 비로소 부처님이 머슴 박 씨를 죽게 한 뜻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사또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소승이 바로 30년 전, 〈법화경〉 7책을 모두 태우고, 이 도끼로 부처님 이마를 찍은 사람입니다. 사또님의 전생은 이 절에 시주하신 머슴 박 씨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시 시주를 구한 화주승은 바로 저이지요. 화주승과 시주가 인연 있어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시주 화주 상봉’이란 바로 오늘의 인연을 부처님께서 미리 계시하신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묘선 스님의 설명을 들은 사또는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간 일어나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습니다.

“스님, 이제 멀리 떠나지 마십시오. 부처님 뜻으로 인연 맺어 스님과 제가 다시 만났으니, 태워버린 〈법화경〉도 다시 제책하고, 심원사 불사도 완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필요한 돈은 제가 시주하겠습니다.”

그 후 심원사 중창불사는 30년만에 다시 시작되어 완성되었습니다. 아울러 정성을 드린 〈법화경〉 7책도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묘선 스님이 그 심원사본 〈법화경〉 7책을 어디에, 어떻게 보관하고 묻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처음 묘선 스님이 태운 〈법화경〉의 재를 다시 이기고 말려서 만든 〈법화경〉은 불에 타지 않고 물에도 젖지 않는 금강불괴의 〈법화경〉이었지만, 묘선 스님은 단 한 번도 사람들에게 그것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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